〈 137화 〉137화 : 꿈나라 2
도시의 중심으로 가니 둥글둥글한 궁전 닮은 모양새의 건물이 잔뜩 있다.
건축학과 예술에 대해 쥐뿔도 모르지만 TV나 인터넷에서 본 것 같은 건물들.
그런 아기자기하고 예쁘장한 건물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지금은 사람들만 지나다니는 게 아니지만.
창 밖에서 드래곤이 날아다니던 거인이 어슬렁거리던
자기가 처리할 서류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직장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행인들은 위험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직후 카메라를 들어올린다.
심지어 술에 취했는지 젊음에 취했는지 아니면 젊은 화신들의 자신감인지
거인의 발목에 매달리거나 짐승 등에 올라타는 여자들도 간혹 보인다.
어째서인지 곰과 방망이와 보드카가 함께하는 전생의 불곰국이 떠오르 모습.
그러한 광경을 시야 한 켠으로 흘려보내며 걷고 걸어서 빌딩에 도착했다.
"야! 저거 뭐야아!"
나를 맞이하는 것은 앙칼진 고함소리.
뾰족하게 올라간 히스테릭한 미녀의 고함이 나를 반긴다.
"찾아달라며?"
삐죽삐죽한 이빨이 드러나도록 으르렁거리는 모습.
하지만 위기 감지 때문인지 겁에 질린 감정이 너무 명확해서
무섭다기보다는 조금 안쓰럽고 귀엽다.
'굳이 비유하자면 치와와 같네.'
마력을 일으키거나 권능을 사용하기 이전의 이야기였다.
한 곳에 멈춰있지 못하는 눈동자가 자꾸 하늘을 올려다보고
익룡이나 드래곤, 초 거대 비둘기의 그림자만 봐도 움츠러드니까.
커다란 그림자가 회사 로비를 덮을 때 마다
목이 쑤욱 들어가는 걸 보면 치와와가 아니라 거북이 같다.
자기가 어떤 꼴인지 스스로 알고 있는지 내 말을 듣고 곧바로 조용해진다.
"그래서, 찾을 수는 있어?"
"아카데미에 왔던 기억이 있다면?"
대형 악몽들이 시선을 끄는 동안에도
자그마한 악몽들은 열심히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었다.
특히 자그하만 것들은 물량이 꽤 많은 편이라 사용하기 편하고.
소형 버스나 트럭만큼 거대한 거미를 무서워 하는 사람이 있지만
손톱만한 새끼 거미가 우글우글 모여있는 걸 무서워 하는 사람이 있다.
땅을 새까맣게 덮을 정도의 생쥐 무리를 무서워 하는 사람도 있고
기이할 정도로 많이 모인 새 떼를 무서워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드래곤과 익룡이 날아다니는데 비둘기 많아진 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고
골목길에 요정과 도깨비가 뛰노는데 생쥐를 찾아다니는 사람도 없지.
그 자그마한 악몽들이 일종의 정찰기가 되어 도시를 파헤치고 다닌다.
"그러면, 정보 좀 받아간다?"
뾰족한 손톱으로 허공을 슥슥 긋는 마족.
그녀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허공에 마법진이 새겨진다.
마족은 역시 마법에 능숙해야지.
판타지 소설을 읽어 생긴 일종의 편견이지만 어쩌겠는가.
판타지가 현실이 되어도 엘프는 엘프고 수인은 수인인데.
마족도 내가 생각하는 마족다움이 있으니 보는 맛이 있네.
목덜미가 아니라 손목을 잡아 당겨지는 기묘한 감촉.
그 이후 느껴지는 허전하면서도 시원섭섭한 상실감.
이론은 알 수 없지만 본능적, 감각적으로
악몽들의 제어권을 빼앗긴 게 느껴진다.
"무식하게 많네…."
"도시 하나를 꽉 채운거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제어권을 가져가준게 고맙다고 생각 할 정도.
도시 하나에 있는 사람의 숫자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게 하나가 아니라면?
아카데미의 기억이 있는 사람을 찾으라는 명령까지는 내릴 수 있지만
수 백만건의 정보를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하기는 힘들지.
내가 뭐하러 그런 고생을 일부러 하겠는가.
'이렇게 시켜먹으면 될 것을.'
눈썹이 밀려 올라가고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손 끝에서 그려진 마법진이 빙글빙글 돌며 늘어난다.
그렇게 몇 분을 건물 로비에 서 있으니 시선이 아플 정도로 늘어나는 상황.
마약쟁이 성좌 치고는 꽤 유명한걸까, 아니면 이 회사 CEO라서 그런가?
"계속 서 있을 거야?"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마법진을 거둬들인다.
허공에서 빙글 돌던 마법진이 꺼진 전구처럼 빛을 잃고 사그라든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어느 한 곳으로 척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저 유리문을 지나면 건물 1층에 자리잡은 카페가 나오겠지.
테이블 하나에 털석 주저앉아 손을 휘휘 저은 그녀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말한다.
"…일단 정보는 고마워. 아카데미에 방문한 사람이 꽤 있으니 조사가 좀 쉬워질 것 같네."
"어떤 식으로 찾게?"
"기억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볼 생각이야. 아카데미에 갔다고 나오는데 간 기억이 없다면 그 사람이 이용당하거나 협력하는 중일거고, 반대로 아카데미에 간 기록이 없는데 기억이 있다면 그 놈이 범인이겠지."
그렇게 말하더니 곧바로 나온 아이스 커피의 얼음을 아득아득 씹어 부순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조사하는 거니까 적어도 십만~백만 단위의 정보다.
그걸 동시에 처리하고 있으니 뇌가 익어버리는 기분 아닐까.
내 추측이 맞다는 것 처럼 등 뒤에서 피곤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관공서쪽에 말해서 여권 정보는 받아왔어."
메뉴판을 구경하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똑같이 생긴 마족이 하나.
보자 마자 쌍둥이라고 생각 될 정도로 완전히 같은 성좌.
그러나 같아도 너무 똑같아서 쌍둥이조차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어떤 쌍둥이가 감정과 심리 상태까지 똑같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곧바로 끼어드는 목소리들.
"이 쪽은 비등록 화신에 대한 자료 같은데. 난리 난 이유를 설명하고 강제로 자료 받아왔어."
"수사대 쪽에도 이야기 해 놨으니까 곧바로 추격조 편성 가능할거야."
역시나 쌍둥이가 아니라 분신이었나.
뾰족한 이빨, 검게 물든 눈의 마족이 하나, 둘, 셋, 넷…
서류와 USB와 스마트폰을 들고 한 명씩 계속 등장한다.
이러한 모습이 낯설지도 않은지 카페 알바생은
똑같이 생긴 마족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오히려 금발 미남의 모습인 나를 흘끗 쳐다볼 뿐.
그렇게 알바생으로부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얼음을 씹어먹는 마족의 분신들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간추리고 간추려도 거의 백 명은 나오는데."
"이거, 어떻게 할 거냐?"
"일단 잡아들이는 건 어때?"
"무고한 사람들이 잔뜩 잡혀가는데?"
"그래도 불사르는 폭군이랑 척을 지느니 시민들한테 배상해주는 게 마음 편하지 않을까."
"그건 그렇지. 머리 위에 우주 전함을 띄우느니 무고한 시민에게 머리를 숙일란다."
커다란 테이블에 앉은 다섯 쌍둥이의 회의.
생김새도 목소리도 말투도 완벽히 일치하는 게
눈을 감고 들으면 혼자서 말하는 것 처럼 느껴지네.
푹신한 의자에 파묻혀 커피향을 즐기고 있으니 뾰족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야?"
"내가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겠어."
"무슨 남 일 처럼…?"
못마땅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처럼 말하는 마족.
그제서야 내가 아직도 북대륙풍 금발 미남의 모습이란 걸 깨달았다.
나한테는 불사르는 폭군이 뭘 해도 남 일 맞는데 왜 저러나 했지.
그래서 곧바로 아바타에 마력을 둘러 변경시켰다.
가장 처음의 모습, 흑발의 적당한 근육남으로.
"남 일, 맞는데? 나는 아카데미에서 지내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우…."
유치한 반박에 할 말을 잃은 마족이 입을 뻐끔거리다 커피를 쭈욱 들이킨다.
분신을 포함해 똑같이 생긴 다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마시는 걸 보니 좀 신기하네.
명확히 따지자면 나는 동대륙 기반으로 아카데미에 자리 잡은 성좌.
북대륙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던 불사르는 폭군이 뭔 짓을 하던 상관 없다.
폭군이 황야를 밀어버리던 도시를 불태우던 상관 없이
내가 할 일은 그가 잡아올 범죄자를 심문하는 것.
그리하여 화신과 성좌의 마력적 연결을 파고들어
추방당한 뱀의 심장을 잡아서 불사르는 폭군에게 넘기는 일이다.
'참 대단하기는 해.'
추방당한 뱀의 심장은 그냥 화신의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하기야 그의 생각이 비논리적인 건 아니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화신의 일은 화신의 선에서 정리하는 게 당연하니까.
예를 들어 삼성 직원이 LG직원을 살인했다고
삼성 회장이 처벌받거나 LG회장에게 사과 할 일은 없다.
사원은 사원, 화신은 화신이니 성좌와는 관계가 없다.
혹여나 화를 내더라도 화신이 '정리'당하는 수준이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며 가볍게 손을 쓴 모양인데-
상대는 현대 사회가 아닌 왕권신수설과 제국주의가 옹립한 황제다.
식민 행성을 거느리고 우주를 노니는 인류에게 숭배받던 황제라고.
삼성 직원이 살인을 저지른다고 삼성 회장이 처벌받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신하가 죄를 저지르면 임금이 지탄받는 일은 분명히 존재한다.
상대가 왜 '불사르는 폭군'인지 이해했다면 절대로 손 대지 않았을텐데.
'뭐, 그 정도로 생각이 짧으니 우주로 추방당했겠지.'
멍청한 놈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그걸로 이득을 보는 사람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불사르는 폭군은 나의 성장을 원한다.
몽마, 드림 워커가 제국에서 꽤 유용한 존재였기 때문일까?
그가 여러 차례에 걸쳐 건네주는 지식은
졸업 예정이던 대학생을 몽마 성좌로 자리잡게 만들어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손해 볼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간추리니까 백 명 아래인데."
"얘가 좀 수상한데. 공항으로 갈 이유가 있나?"
"이쪽도 몇 명 걸러낸거 같아."
그러니까 얼른 잡고 성역으로 돌아가서
화신들과 뒹굴면서 편하게 지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