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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화 〉136화 : 꿈나라 1 (136/169)



〈 136화 〉136화 : 꿈나라 1

얼굴이 발갛게 물든 시들지 않는 거목이 손목의 덩굴을 풀어낸다.
몇 번이고 몰아친 쾌감 끝에 시작된 성녀 타임 때문이겠지.
그녀 딴에는 리드하기 위해 노력한다며 벌인 일이지만
그냥 떼놓고 보자면 다짜고짜 남자를 묶어버린 거니까.

"그래서, 좋았어?"

"…으, 저거 봐. 안 도와줘도 괜찮겠어?"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스크린을 다시 켠다.
어떻게든 대화의 주제를 바꾸고 싶다는 의지처럼 느껴진다.


[야, 수색이라도 도와줘! 시간이 없어!]

다시 한 번 위기 감지가 발동한걸까?
검게 물든 눈으로 애타게 허우적대는 마족이 보인다.
마족이라는 단어에 감정이 요동친 시들지 않는 거목도 안쓰러워 할 정도.
식은땀이 줄줄 흘러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 모습이 처량해 보이니까-


"이거, 메시지 보낼 수 있어?"

"응. 이걸로 대화가 가능해."


그녀가 내민 것은 나무 수화기.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고풍스러운 녀석이다.

생각해보면 내 컴퓨터는 아직 기본 업그레이드만 해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낼 땐 필터링이 아직 남아 있지.
정말 급한 일이거나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그냥 아바타를 보내서 직접 말하면 되니까.


하지만 엘프인 시들지 않는 거목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중견 성좌로서 벌어들인 포인트를 이런 편의성에 사용한걸까.

하긴 지난번 도와줄  내가 갔던 그녀의 농장만 수 십개였다.
거길 일일히 가서 대화하느니 그냥 전화를 여러통 돌리고 말지.


[그래서,  줄건데?]
[내, 피!]

화면 속에서 마족이 고함을 지른다.
그러자 수십 수백명의 화신들이 움직인다.
아니, 화신만이 아니라 회사원들까지.


 단위의 인파가 마치  오는날 개미처럼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가 청년 사업자 중 떠오르는 신흥 CEO라면
시들지 않는 거목은 백억 단위를 운용하는 중소기업 사장.
그리고 저 마족은 국내 기업순위 100위권의 대기업 사장 정도 되겠지.


그 때문인지 화면을 잠시 축소시켜 도시를 바라보자
새총 맞은 벌집처럼 사람들이 우글우글 움직이는  보인다.
전화  통으로 도시 하나 정도는 부려먹을  있는 영향력이 있다는거지.


그나저나, 피?


"마족의 피는 다양한 곳에 쓰여."

성녀타임에서 벗어난 그녀가 내게 작게 조언을 해 준다.
그걸귀신같이 수화기 너머로 들었는지 보충설명을 하는 마족.


[약도 만들  있고 마법 시약으로도 쓸 수 있어!]


아마 저 마족이 말하는 '약'은 의약품이 아니라 마약이겠지.
마약 원료를 무한정 찍어내는 성좌라.
다른 의미로 영향력이 어마어마 하겠는데.

그 영향력을 도시가 증명한다.
경찰이 도로 곳곳에서 검문을 시작하고
화신들이 슬그머나도시 밖으로 나가는 대로변을 점거한다.

아기 손 잡은 아저씨가 경찰에게 항의하고
짧은 차림의 혈기 넘치는 여자가 고함을 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족은 물러서지 않는다.


시민에게 불평 불만 들을래,
아니면 불사르는 폭군의 우주 전함한테 궤도폭격 맞을래?
이렇게 물어보면 누가 후자를 선택하겠어.

[마법 시약이라, 어느 정도  거야?]
[세 번!]


저게 뭔 소리인가 슬쩍 고개를 돌렸지만
이번에는 그녀도 모르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그래도 저 급해보이는 상황에 블러핑을 치지 않았겠지.


내가 마약을 빨 것도 아니고
마법 시약으로 이하린에게 사용해 보라고 넘길거니까.
세 번이란게 마약  팩인지 마법 세 번인지 몰라도
그 정도면 실험용으로는 적당하겠지.


거기에 생각치도 않았던 부수입 아닌가?


원래 노렸던 목표는 거대한 마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것.
물론 아카데미의 수련장이 아닌 실전에서 말이다.
도시를 배경으로 내 마력을 마음껏 펼쳐도
도시를 관리하는 성좌가 허락을 내렸는데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있을까.


[씨발, 다섯 번! 더 이상은 못 뽑아!]


내 침묵을 부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마족이부르짖는다.


[그래, 바로 간다.]

그와 동시에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마력을 움직였다.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시들지 않는 거목이 수화기를 받아들며 배웅을  준다.

"잘 다녀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찾는건 내가 도와줄 수 없으니까."

수화기를건내고 화면을 당긴다.
사람의 머리통이 개미처럼 보이던 화면에서
아예 도시의 건물만 보일 정도로 쭈욱-

어느 세월에 하나씩 검문을 하겠는가.
그 것도 아카데미의 온갖 경보장치를 무시한 암살자를 상대로.


마력을 움직인다.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양을.
이미지하는 것은 사진으로만 봤던 극지방의 오로라.
도시 위에 마치 보자기처럼 내려 앉아 모두를 감싸도록.


물론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잠들게 할 수는 없다.
출력으로 따지면 아슬아슬하게 될  같지만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다 컨트롤 자신도 없으니까.


막말로 병원이나 차도에서 운전하다 말고 깜빡 잠들면?
암살자 하나 잡겠다고 피해가 너무 커지는  아닐까.
그러니까 꿈 속으로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다만 꿈을 끄집어  뿐.

'우리 동네도 아니고, 뒷감당은 알아서 하겠지.'

조금 무책임하게 느껴져도  어쩌겠는가.
도움을 요청한건 마족인 그녀고 나는 받아들였을 뿐.
그 외에는 어떠한 조건도 걸리지 않았으니
하고 싶었던 그대로 최대한 마력을 뿜어내 봐야지.


마치 눈보라가 천천히 도시를 덮어가듯이
마력의 장막이 내려앉아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심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귀신과 괴물을 두려워하는 대중적인 공포부터
죽음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 같은 추상적인 개념
개인적 경험 때문에 곰인형이나 사탕 같은 사소한 걸 두려워하는  까지.


 악몽의 모든 정보들이 내게 몰려온다면, 나는 버틸  없겠지.


아무리 마력의 양이 늘어났다고는 해도
도시 하나를 통째로 삼키는 건 무리다.
마력이 늘어났다고 해서 내 재능이, 제어 능력이 늘어난 게 아니니까.

'개판이네.'

그래서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을 해치지 말라는 제약만 걸고 전부 도시에 풀어놨지.


"으, 우와악!"


"저게 뭐야!"


"일단 찍어 놔!"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그야 그럴게, 악몽이라는 놈이 전부 혐오스럽지는 않으니까.


물론 혐오스러운 악몽도 있었다.
사람 크기만한 바퀴벌레나 거미, 입이  찢어진 광대나 썩은 좀비
악취를 풍기는 오물 덩어리 괴물이나 괴인 같은거.

하지만 한예지의 트라우마처럼 남들에게는 별 거 아닌 악몽도 많다.
치와와 크기의 소형견부터 까마귀보다 조금 커다란 새.
걸어다니는 테디베어와 음산한 멜로디의 오르골 같은 거.

그 때문인지 도시는 생각보다는 덜 소란스러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끌벅적 사진을 찍고 관심을 가지지만
패닉에 빠져 우르르 대피하는 일 같은 없다는 뜻이다.

색감이 조금 다른 보도블럭이 가득한 거리.
건축 양식이 살짝 다른 건물들.
디자인이 다른 버스와 자동차.
그리고 우글우글한 금발 머리 사람들.


"저건 또 뭐야?"


"야, 카메라!"

고층 빌딩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에서는 익룡이 울부짖고 있고
건물만큼 커다란 거인의 그림자가 빌딩을 통과하며 걸어다니니
 와중에 도로변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에게 시선은 모이지 않는다.

그야 그렇겠지.

"와 씨발, 저거 협곡의 제왕에 나오는 앙칼라곤 아니야?"


"맞는 거 같은데…, 어제 영화관에서  거랑 똑같이 생겼어."


내가 걷는 도로변 바로 옆 궁전 모습으로 지어진 박물관 지붕에
날개와 비늘 달린 거대한 드래곤이 똬리를 트는 와중이다.
이 와중에 드래곤이 아니라 길 가던 남자한테 시선이 간다면

그 사람도 어지간히 독특한 사람 아닐까.

'묶어서 명령해야 하나?'

사람 수 만큼 득실득실한 악몽들.
 무수히 많은 것들을 일일히 컨트롤 할 자신은 없었다.
때문에 떠올리는 것은 AOS 장르의 병력 컨트롤 창.
분대를 지정하듯 악몽들을 대강대강 묶는다.

'섬세한 명령은 못 내리지만, 내릴 이유도 없고.'


내릴 명령은 간단했다.
최근 아카데미를 다녀 온 남자를 찾아둘 것.
아카데미는 이 평평한 지구 내해 중앙에 있다.


항구부터 펼쳐진 엄중한 검문을 생각해보면
 암살자가 헤엄치거나 날아서 오지는 않았겠지.
아카데미 방문객으로 들어와 슥삭 처리하고 도망쳤을거야.

만약 마법에 탐지되지 않은 이유가 정말 헤엄쳐서 도망친거라면?

'솔직히 태평양을 헤엄쳐서 도망친 도둑을 무슨 수로 잡아.'

 정도라면 내가 잡을 방법이 없지.
그냥 불사르는 폭군이 북대륙에서 지랄하는 거 구경해야 할 뿐.
검문과 마법결계를 피하겠다고 바다를 헤엄쳐서 건너는 화신?


그 정도면 내 어정쩡한 분신보다 강하지 않을까.

나머지는 악몽의 분신체들이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란스러운 도시를 관광하는 기분으로 걸었다.
건축물도 조금 성당 닮거나 궁궐 닮은게 많네.

굳이 따지자면 전생의 여행 예능에서 봤던 러시아의 도시를 닮았다.
추운 대륙, 금발 미녀들, 성당 모양의 건물까지, 북대륙은 그냥 러시아인가.

어쩌면 동대륙이 한국 중국 일본 동남아  섞어둔 상태인것 처럼
북대륙도 러시아를 포함해 다양한 문화가 섞인 걸지도 모르지.
다만 내가 그쪽 문화를 모르니까 적당히 넘기는 거고.

대형견보다 조금 큰 익룡 무리에게 겁을 먹었는지
핫도그 포장마차 아저씨가 카트를 버리고 도망친다.
순식간에 주인이 없어진 따끈한 핫도그를 손에 들고
조금 독특한 소스를 음미하며 제일 높은 빌딩으로 향한다.

아마 저기에 그 마족이 있겠지.
뭐하는 짓이냐는 비명이라도 지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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