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134화 : 거래 2
희소성은 곧 상품 가치가 된다.
희소성과 효용성이던가.
인간 사회의 어디에서나 사용하는 물의 효용성이 더 높지만
효용성은 부족하고 희소성은 높은 다이아몬드는 물보다 비싸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그러한 점에서 '몽마'라는 종족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볼 수 있지.
희소성도 어마어마하지만 효용성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으니까.
바로 지금처럼.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네 마력. 남자한테 엄한 짓을 할 생각은 없으니 너무 경계하지 말아. 나도 비슷한 처지니까."
상어 이빨처럼 뾰족한 이를 흐- 드러내던 그녀가 말을 이어나간다.
당연히 내가 거래를 수락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당당한 태도.
하지만 거래에 응하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합법이면, 불사르는 폭군이 왜…?'
불사르는 폭군은 분명히 북대륙을 불태우며 전진했다.
그게 황야라 해도 너무 과한 처사라는 건 바뀌지 않는다.
범죄자가 민간인들 사이로 숨어들었다고
광장에 폭탄을 터트리는 경찰이 어디에 있겠는가.
가정할 수 있는건 두 가지.
화신 살해범이 애초부터 북대륙 조직 소속이었다.
혹은 관계가 없이 우연히 입구가 북대륙 황야에 있었을 뿐이다.
확실한 건 한 가지.
불사르는 폭군이 급발진하는 미래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는 점.
"마력 말고, 정보는 어때? 이게 합법적인 사업장이면 꽤 중요한 정보가 있는데."
"정보? 이 상황에 몽마의 마력보다 중요한 정보가 뭐 있겠…."
낄낄거리던 여자가 갑자기 몸을 바르르 떤다.
다크서클만 가득하던 눈이 검게 물드는게 보인다.
뾰족한 이가 가득한 입을 헤벌레 벌리고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 아니라 명백히 뭔가를 바라보고 있다.
"너, 그거, 씨바알…, 무슨 정보냐?"
그러더니 명백한 적의를 띄고 나를 노려본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향한 적의가 아니다.
겁에 질린 짐승이 보일법 한 경계심.
'마족도 예지 능력 같은게 있나?'
하기야 온갖 권능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미래 예지던 위기 감지던 뭐라도 있겠지.
어느새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질질 흘리는 걸 보면-
"왜 불사르는 폭군이, 아니, 아니지. 그 미친놈이 나선다면…?"
뾰족한 이빨로 마약 덩어리나 씹어먹고 있길래
본능적이고 야성적인 마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인텔리 계열에 가깝나보다.
다른 대륙 출신인 내가 말한 중요한 정보에
자기가 본 환각을 더해서 순식간에 정답을 추리하고 있으니까.
"씨발, 그 새끼가 우리쪽으로 왔냐?"
지금 말하는 그 새끼가 누구인지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불사르는 폭군의 예비 친위대를 살해한 그 여자를 뜻할테니까.
긍정의 의미를 담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까놓고 말해서 급한건 내가 아니라 저 쪽.
경제가 흔들리고 북대륙이 난리가 나는 건
동대륙 성좌인 나랑 큰 상관은 없는 일이니까.
오히려 북대륙 사업가인 저 마족이 급하지.
"언제, 언제인지는 알아?"
여유만만한 모습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기야 우주전함이 날아와서 자기 빌딩을, 도시를 태운다는데
그 상황에 여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할까?
"거래라며? 서로 알고 있는 걸 이야기 하는게 좋지 않을까?"
나도 궁금한 게 많다는 점이 그녀에게는 다행이리라.
병풍처럼 서 있던 두 사람을 무시하고 그대로 사무실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쓰며 상대를 간보는 일문일답의 거래-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물어보면 대답해주고 자기 질문을 던지는
일종의 정보 자판기 같은 마족이 하나 있을 뿐.
왜 저리 조급한 모습을 보이는 지 물어봤더니
역시나 숨길 생각이 없는지 곧바로 대답을 해 준다.
"그래서, 그 위기 감지 능력으로 뭘 본거야?"
"마약 제조하는 년들 중 하나가 뭣도 모르고 그 살인범을 숨겨줬더니, 불사르는 폭군이 도시 하나 정도는 태워도 된다면서 이 쪽으로 전함을 몰고 오는 미래!"
레이저 빔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위기를 직접 경험했다는데 어쩌겠는가.
부들부들 떨면서도 이 쪽의 비위를 맞추느라 말이 빨라지는게 보인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게 꼬인 상태니 믿을건 나 밖에 없다는거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렇다.
우리가 발견한 황야의 비밀 통로는 비밀 통로가 아니다.
정확히 따지자면 군부대로 보낼 마약을 운반할
일종의 화물 엘리베이터와 같은 개념이다.
지하 주차장에서 트럭에 태워 황야로 곧장 보내면
그 곳에서 여러 군부대로 배분을 하는 방식으로 거래를 하는거다.
왜 그리 번거로운 방식을 선택했느냐?
사채업이 합법이지만 이미지는 나쁜 것 처럼
마약도 합법이지만 이미지는 나쁘니 뒷길을 만들어 두는거지.
돈도 되고 성좌, 화신과의 커넥션을 만들며 기업 이미지도 챙기고 싶어서.
황야에 숨겨진 입구개 여러개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
마약을 제조하고 연구하는 기업이 한 두개가 아니라는 뜻.
범죄자의 소굴이 황야에 있는 게 아니었다.
기업들이 자기 편하려고 뒷길 파둔 곳으로
범죄자 하나가 숨어들었을 뿐.
문제가 있다면 끝을 모르는 불사르는 폭군의 광증이겠지.
복수심 하나 때문에 마지막 남은 식민행성을 불태우고
영원히 우주를 떠도는 걸 선택한 남자다.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불태우는 수준이 아니라
마을에 불을 지르는 남자인데 도시 하나를 못 태울까.
"일단, 어떻게든 그 년을 찾아야겠네."
결론은 하나다.
임상시험 참여자들 사이로 숨어든 살인범을 찾아야 한다.
찾아낸다면 불사르는 폭군에게 큰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시간 내에 못 찾는다면 이 도시 위에 궤도폭격이 떨어지겠지.
"씨바알,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마족의 권능이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오는지
이빨 말고 손톱도 뾰족하게 변한 마족이 손 끝을 깨문다.
끼기긱- 하고 금속 갈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내 일이 아니라 여유롭게 구경하는 나와 달리
정신병에 걸린 것 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빌헬미나.
분명 시들지 않는 거목과 나는 본명을 말하려고 들 때
입이 턱 막히는 경험을 하지 않았나?
'그러고보니 쟤도 성좌인데, 어떻게 이름을 말한거지?'
"마족이 진짜 이름을 쓸 리 있냐? 당연히 가명이지!"
귀찮게 굴지 말라는 것 처럼 소리친 그녀가 마력을 움직인다.
일렁이는 검붉은 마력 뒤로 보이는 다양한 여자의 얼굴들.
그 모습이 마치 화상회의의 다중화면처럼 보인다.
이 쪽은 이제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분신을 흐트러트렸다.
※
시들지 않는 거목의 반응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일단 그쪽에서 만난 성좌에게 말 해 놨어."
"성좌가 있었어?"
몰랐던 사실에 눈을 댕그랗게 뜨더니
자기도 모르던 사실이 창피해 뺨을 발그레 붉히는 것이다.
선배 겸 누나로서 이끄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던 그녀니까
사소한 실수도 내 앞에서 보여주기엔 창피하다고 생각하나보다.
뺨에서 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에게 상황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가 본 게 범죄조직의 비상탈출구가 아니라
합법적 마약 제조 기업의 마약 운반용 통로라는 점을.
그리하여 마족 성좌와 만나 나눈 이야기까지.
"마족?"
"응, 마족."
다른 부분은 괜찮았지만 마족 이야기를 듣고 안색이 나빠진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마왕 때문에 멸망한 세상이던가.
다른 세상, 다른 종족인 걸 알아도 마족이라는이름은 부담되나보다.
불그스레 물들어 있던 뺨에서 핏기가 가시고
쫑긋 서 있던 귀가 아래로 추욱 늘어지는데
이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눈이 장식품이겠지.
말을 꺼내기에는 미묘한 부분인지라
조용히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덩치 큰 몸이 이럴때는 좋구나.
"그리고?"
"뭐, 위기 감지의 권능을 가지고 있었대. 그래서 그런지 불사르는 폭군이 도시를 밀어버리는 미래를 봤나봐."
"도시를? 너는 분명히…."
"맞아, 내가 본 건 황야를 밀어버리는 장면이었어. 아마 황야를 밀어버리고 소득이 없으면 도시까지 밀어버릴 계획인가봐."
부드럽고 가녀린 등을 토닥이며 말을 잇는다.
가슴팍에 살그머니 기대는 보드라운 감촉.
화면 너머, 검은 안개 속에서는
제 기반이 있는 도시가 날아갈까봐
겁에 질려 허둥지둥 기업을 시찰하는 성좌가 있지만
품 속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온기가 더 중요하니까.
"어, 검은 안개가 사라졌어."
"급하기는 급한가봐. 하기야, 자기가 쌓아올린 게 전부 모여 있는 도시인데."
화면 속에서 검은 안개가 스르륵 흩어진다.
그와 동시에 적나라한 장면이 스크린에 비춰진다.
봉을 끼고 춤을 추던 팬티 차림의 남자들이 옷을 황급히 껴 입고
마약에 취해 늘어져 가랑이 활짝 벌린 채 남자들에게 핥게 하던 여자들도
어디선가 우다다 달려온 양복 차림의 화신들에게 뺨을 맞고 강제로 깨어난다.
"음, 좀, 보기에 그렇네."
약에 취해 벌어진 난교 파티는
이제야 남자를 알게 된 엘프에게는 너무 자극적이었나보다.
마족 이야기에 핏기가 가셨던 새하얀 얼굴이 다시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와 동시에 화면 속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허공을 올려다보며 마력을 담은 목소리.
어떻게 생각해도 그 마족의 목소리겠지.
"야, 몽마! 보고 있지? 좀 도와줘!"
물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스크린으로 일일히 뒤져서 몽타주랑 비교하기?
그런 귀찮은 일을 내가 왜 해.
"저기, 저거 너 부르는 거 아니, 얏?!"
"내가 도와줄 이유는 없잖아. 그런거보다는, 응?"
그리 말하며 슬금슬금 손을 내렸다.
손도 두껍고 커다랗게 변한 상태라서 그런지
슬그머니 옷자락에 집어 넣으니 천조각이 풀리기 직전이다.
귓가에 맴돌던 붉은 기운이 목덜미까지 번져가는 모습을 구경하며
아주 천천히 손가락으로 배꼽 근처를 빙글빙글 어루만졌다.
"어휴, 증말. 남자애가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그와 동시에 뒤로 뻗어진 자그마한 손이 내 허벅지를 톡톡 건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