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133화 : 거래 1
뭐라도 되는 것 처럼 의기양양하게 등장해
지금은 피거품 끄륵대며 질질 끌려가는 백의의 여인.
매혹 저항 하나만 믿고 덤벼드는 빡대가리라고 상상도 못 했다.
아무래도 연구동에서 마약 제조만 하던 화신인지
허리춤에서 얼음 송곳을 꺼내 그대로 젖가슴 아래를 쑤실 때 까지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삶을 마감했으니까.
'어처구니가 없네.'
자신만만하게 걸어와서 팔을 확 뻗길래
무의식적으로 갈비뼈 사이를 쑤셨더니
윽! 소리 한 번 내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뭘 믿고 저랬던걸까.'
매혹을 사용하는 남자 화신.
나는 여자니까 매혹만 막으면 남자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적을 세우려고 혼자 뛰어나왔나?
그러한 점에서는 남녀역전이 꽤 도움이 되고 있었다.
화신과 초능력과 마법과 무공이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남자니까 약할 것이다~ 하는 선입견이 남아 있으니까.
뭐, 전생에도 그런 놈들은 많았다.
여자니까 무조건 내가 이겨~ 하다가
눈 돌아간 여자한테 옆구리에 식칼맞고
으헥으헥하다 그대로 뒤져버린 놈들.
'그나저나 매혹 효과 좋네.'
넘쳐나는 마력을 기반으로 새로 만들어본 기술이다.
무의식을 자극해 두려워하는 걸 꺼내오던 것과 달리
대상의 무의식속에 나에 대한 무조건적인 호감을 박아넣는 방식.
그 결과가 저거다.
"아 씨, 똑바로 들어 비실비실한 년아."
"이 쪽으로 가야 안 쓰는 비품실이 있으니까 너야말로 닥치고 따라와."
다짜고짜 사람 가슴팍을 얼음 송곳으로 쑤셨는데
아무런 혐오감이나 놀라움을 표현하지 않는 두 명.
오히려 나를 위해 시체를 숨기려고 든다.
"그래도 걱정 마세요. 아까 말했던 것 처럼 이쪽 경찰은 내가 꽉 잡고 있으니까."
"경찰을 왜 불러, 멍청한 년아. 경찰 귀에 안 들어가게 여기 내부에서 처리하면 될 일을."
시체를 질질 끌고 가면서도 저러고 있다.
내게 잘 보이기 위해 자존심 경쟁을 하는게 좀 웃기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바람으로 피가 흐르지 않게 시체를 감싼 상태로
다리를 질질 끌고 가는게 능숙해보여 오싹하기도 하다.
뭐, 중요한건 내게 도움이 된다는거지.
어느 순간 조용해진 여자를 대걸레 옆에 눕혀두고 다시 길을 걷는다.
조금은 어처구니 없게도, 저 여자 이후에 나를 잡겠다고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비품실에서 나와 텅 빈 회의실로 들어가서
잠겨 있던 문을 열고 나와 복도를 지나 임원실로 들어간다.
슬슬 걷는게 지루해질 무렵 코 끝을 찌르는 기묘한 향.
'이건 뭐지?'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회의실과 임원실에 어울리는 냄새는 아니다.
회사 사무실에서 날 잉크 섞인 종이내음 보다
병원이나 치과에서 날 법한 화학 약품의 냄새.
"으, 오늘따라 독한데? 뭐 새로운 거 만드나?"
"그러게, 원래 이 정도는 아닌데."
미간을 찌푸리는 내 모습을 본 걸까.
두 여자가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붙는다.
그와 동시에 바람이 부자연스럽게 내 얼굴을 감싸며 냄새를 지워준다.
"어때요, 숨 쉬기 쉽죠?"
"하여간 선풍기 새끼들, 생색은 잘 내요."
툭탁거리는 두 사람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생각을 정리한다.
매혹을 방해한다 해도 마력을 때려 박으면 될 것 같은데.
일단 연금동의 사람들도 매혹을 하는 걸 1차 목표로 두자.
마력을 통해 호감도를 강제로 때려 박는 행위니까
심장괴 뇌에 어떤 부작용이 있는지 모른다.
'실험체는 많을수록 좋겠지.'
여기가 동대륙도 아니고
범죄 조직을 소탕해 공적을 올릴 한예지도
아카데미에 와서 내 곁에 머무르기로 한 상황이니까.
그리 생각하며 두 여자가 연 문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사무실을 닮아 있었다.
'이건 또 무슨.'
말 그대로 닮아만 있었다.
파티션으로 나눠진 사무실 책상들.
하지만 그 위에 있는 건 컴퓨터 모니터가 아닌
비커와 플라스크를 비롯한 과학 실험실의 모습.
안에서 보라색 액체와 분홍색 액체가 보글보글 끓다
용수철처럼 빙글빙글 돌아가는 관을 지나
다른 곳에 모이고 응고해 덩어리로 변하면
고글과 마스크를 낀 사람이 곱게 빻고있다.
하지만 내가, 나와 두 여자가 놀란건 다른 이유였다.
"어서 와. 오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분홍색 덩어리를 으득으득 씹어 먹는 여자가 우리를 반겼으니까.
퀭하니 내려온 다크서클과 앞니까지 뾰족뾰족한 이빨.
옆에서 금속 기구로 겨우 빻고 있는 단단한 화학 약품 덩어리를
이빨로 과자 씹듯이 먹는 걸 봐선 평범한 사람은 아니리라.
정확히는, 평범한 성좌는 아니리라.
'성좌가 왜 여기에 있어?'
마력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기세.
굳이 따지자면 영혼의 격이라 불러야 할까.
본신으로 강림한 성좌가 왜 마약공장의 한 가운데에서
마약 덩어리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내가 모르지만 북대륙에서는 꽤 유명한 성좌인지
길 안내를 하던 두 사람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게 느껴진다.
"그렇게 긴장하지는 마. 두 사람은 내버려 두고 일 이야기나 하자고."
"일?"
"그래, 일. 이유가 있으니까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거 아니야?"
분홍색 덩어리를 먹다 만 샌드위치처럼 툭 던져버리는 여성.
그러자 방호복까지 챙겨 입은 사람들이 와서
진공청소기 닮은 기구를 사용해 치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약 공장을 돌리는 인외 성좌라니.
솔직히 말하자면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는다.
범죄자들은 매혹하고
매혹이 통하지 않으면 적당히 처리해서
비대한 마력을 사용하는 실험체로 사용하다가
적당히 북대륙의 성좌들이나 아카데미에 넘길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마약 덩어리를 씹어먹는 성좌가 나와서
사업을 시작하자- 이러고 있는데 어떻게 이해를 하겠는가.
"음, 뭐야. 사업 때문에 온 게 아니야?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애 하나 보내버리는 거 보고 이쪽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업이라니, 뭘 이야기하는거야?"
하기야, 저 다크서클 가득한 여자 입장에서는
마약 난교 파티에 끼어들어 여자 두 명 옆에 끼고
까불거리는 연구원 하나 내 손으로 직접 담구는 걸 봤겠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정의감 넘치는 행보는 아니지?
얼음 송곳으로 폐를 정확히 꿰뚫는 모양새나
끼고 다니던 여자한테 시체 처리를 명령하는 것도 그렇고
진짜 다른 조직에서 왔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
"음, 그냥 모르고 온 건가? 이거 이야기지, 이거."
분홍색, 보라색 화학 약품 덩어리를 들어보인 그녀가 설명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듣다 보면 전생의 상식이 참 쓸모 없다고 느껴지고.
'마약이 불법이 아니라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전생에도 어느 정도 합법인 나라가 있었다.
의료용 대마초라던가, 소프트 드러그는 합법이라던가.
그런데 이쪽 세상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마법과 이능과 초능력 때문에-
'별 이상한 나비효과가 다 있네.'
이쪽 세상의 의료는 어마어마하게 발전해있다.
암 치료제나 탈모 치료제가 만들어졌다는 게 아니다.
정신을 제외한 육체의 모든 부분을 고칠 '방법'이 있다는거지.
비용이 비싸고 효율은 나쁘고, 대량 생산은 불가능하더라도
사제 계열이나 천사 성좌들이 사용하는 치유의 권능이면
팔 다리가 잘려나가고 척추가 으스러져도 부작용 없이 뚝딱 고칠 수 있다.
영혼과 정신을 제외한다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는거다.
그리고 마약이 불법인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이 아닌 사회에도 해약을 끼친다는거다.
그렇다면 이쪽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
성좌가 관리하고 권능으로 치료하여
사회는 물론 개인에게도 해악이 없다면
마약을 사용해도 상관 없지 않나?
"그래서, 신종 약물을 실험하고 싶다고?"
"그래, 네 옆에 있는 두 사람을 보니 확실해졌어. 몽마, 몽마라. 이걸 왜 생각 못 했지?"
사람을 찢고 녹여서 잡아먹는 이형의 끔찍한 괴물들.
그 괴물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화신들은 마약을 복용한다.
마약이 가져오는 고양감과 용기로 전쟁을 무사히 끝마치고
부작용과 중독 증세가 몰려올 즈음 전선 후방으로 이송되어
부상과 함께 마약의 부작용을 말끔히 치유받는다.
마약에 관한 논의만 제외한다면
참으로 효율적인 방법 아닌가.
"북대륙 화신들의 마약 복용이 합법이라 해도 부작용은 귀찮지. 쉽게 말하자면 비용 절약을 위한 신제품 개발이야."
화신들의 마약 복용은 합법.
그런 상황이다 보니 눈 앞의 성좌를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빌헬미나라고 소개한 여자.
판타지 세상의 마족 출신의 성좌.
연금술사 겸 마약 제조사.
"마약이 합법이면-"
"음, 다른 대륙 출신인가?"
"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마약이 궁금해서 직접 자원한 사람들이지. 남자들도 마찬가지야. 성좌의 권능을 통한 완전한 치유가 약속되어 있으니 다양한 이유로 자원하는 사람이 많거든. 보수 때문에, 마약이 궁금해서, 화신이랑 섹스를 하고 싶어서."
그게 뭔 소린가 싶었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상하지는 않다.
내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예시는 헐리우드.
인지도 때문에 섹스 스캔에 비디오를 터트리고
불륜에 마약에 다양하게 지랄이 나지 않았던가?
먹으면 몸이 망가지는 걸 알아도 달려드는게 인간의 본성인데
돈도 줘 치료도 해줘 이러면 호기심으로 달려드는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아무튼간에 여기는 대륙 공인 합법적인 사업장이야. 표정을 보니다른 이유 때문에 이 곳으로 온 것 같은데, 그래도 상관 없어. 몽마는 귀하니까 말이야."
이야기를 들을수록 조금 어질어질하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는 범죄자 조직도 아닌데?
홍대 클럽에 와서 클럽 죽순이에게 칼빵 놓은 상황 아닌가?
물론 내가 느끼는 건 죄책감이 아니다.
냉정한 척, 대단한 척 깝치고 다녔지만
사실 헛다리를 짚었다는 창피함을 느끼는거지.
'씨발, 시들지 않는 거목도 동대륙 농사꾼 출신이니까 북대륙 마약 문제는 모르는 거였어….'
검은 안개가 있어서 다행이다.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