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130화 : 성좌의 권능 2
160 언저리도 안 될것 같은 자그마한 신장.
껴안는다면 한 손으로도 전부 품을 수 있을 자그마한 체구.
엘프 특유의 낭창낭창하고 부드러운 몸선과 행동까지.
"흐에…."
진짜 한 손으로 안아도 좀 남네.
덩치가 커져도 너무 커졌어.
아무튼 그게 시들지 않는 거목의 이미지였다.
물론 한예지팀과 함께 악몽에 휘말렸을 때
세계수의 뿌리를 휘둘러 콘크리트 벽을 부수고
근원을 파헤쳐 몽마 하나를 빈사까지 몰아간 걸 떠올리자면
그녀도 자기 몸 하나 지킬 정도의 능력은 충분하다.
내가 무기력한 악몽인 것 처럼
그녀도 '거목'이라는 이름을 받은 이유가 있겠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은, 특히 나는 보이는 것에 약한데.
한예지와 계약한 이유도 미소를 봤기 때문이고
이하린과 계약한 이유도 그 광적인 노력을 봤기 때문이다.
김하은과의 계약도 몸을 혹사시키는 광경을 봤기 때문이니
내가 얼마나 보이는 것에 약한지 알 수 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아포칼립스 세상에 틀어박혀서 십 수년을 버텼는데.'
물론 핑계는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건 금이 간 콘크리트에
발자국 소리만 들렀다 하면 방사능 괴물들만 보이는 세상을 살았으니까.
볼 수 있던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잿가루 묻은 맥심 표지요
볼 수 있던 가장 끔찍한 건… 너무 많으니 하나 정하기 힘드네.
열기에 눌어붙은 시체 더미가 기생형 괴물에게 잠식당해
수 십개의 손바닥으로 굴러다니는 꼴이 제일 인상깊기는 했지.
"자, 저길 봐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손부채를 파닥여 식히던 그녀.
고개를 돌리며 팔에서 힘을 풀자 품 안에서 후다닥 도망치더니
그 자그마한 손바닥을 파닥파닥 움직이다 어느 한 쪽을 지목한다.
조각된 나무 서랍장 위에 있는 스크린이다.
'일단 성좌들은 다 하나씩 가지고 있나?'
충성스러운 송곳니는 천막 하나 덜렁 있던데.
그런 생각을 하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황량한 도로.
하지만 눈에 확 띄는 커다란 표지판이 있다.
아무래도 곧바로 예지몽의 장소를 찾은 건 아닌가보네.
"뭘 보면 되는거야?"
"아, 잠시만 기다려 줘."
톡톡, 가느다란 손가락이 스크린 위를 휘젓는다.
키보드와 마우스, 게임 패드에 익숙한 나와 달리
손가락으로 마법을 다루는 것에 더욱 익숙한 엘프라서 그런 걸까.
손가락이 이리저리 움직일 때 마다 화면이 점점 확대되고 이동한다.
표지판이 점점 다가오면서 시야가 확대된다.
좀 커다란 표지판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크네.
서양 영화에서 봤던 것 같은, 도로 옆에 몇 m 높이로 크게 달려 있는 간판.
그리고 그 아래에 피어있는 자그마한 꽃 한 송이.
'민들레?'
여러 방향으로 뻗은 연녹색 풀잎과
그 위에서 천천히 피어나고 있는 샛노란 색의 꽃잎.
민들레라고 부르기에는 잎의 모양새가 좀 다르긴 한데-
'이걸 왜 보라는거지?'
이쪽 세상 남자들이 꽃이나 인형을 좋아한다 해도 그걸 왜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꽃이 조금씩 시들어간다.
아니, 정확히는 씨앗으로 변하고 있었다.
민들레 비슷한 종류는 맞는지
동글동글하던 꽃잎이 사라지고 솜털 가득한 씨앗이 생긴다.
그러더니 황야에 부는 바람에 톡, 하고 솜털 씨앗 뭉치가 터졌다.
그리고 그게 끝.
도로의 길이만 해도 수천 km는 넘을 것이고
그 도로가 북부 대륙의 군사 기지를 향해 수백 갈래는 있을텐데.
그 넓은 황야에 민들레 한 송이 피었다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저게 뭔데?"
"조금만 더 기다려봐-"
그래서 물어보았더니 자신만만한 얼굴이 히쭉 웃는다.
이런 반응이면 얄미워야하는데 웃는 걸 보면 없던 화도 풀릴 지경.
기대하며 입꼬리를 씨익 늘리는, 늘 보여주던 개구쟁이의 미소다.
장난을 치고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자신만만한 웃음.
지금까지 헛짓거리를 한 건 없으니 기다리면 되겠지.
"그으, 화면을 봐야 하지 않을까?"
약간의 장난기를 담아 뚫어져라 쳐다보아서
귀까지 붉게 물드는 걸 확인하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에는 색이 바뀐 꽃들이 피어있다.
둥근 노란색 잎 부터 길쭉한 연분홍색
장미처럼 붉은 잎도 목련처럼 흰 잎도 있다.
형형색색의 다양한 꽃들의 공통점은 하나.
꽃봉오리가 활짝 만개하고 나면
그 자리에 솜털 씨앗 뭉치가 생긴다는 것.
그제서야 스크린 속 장면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식하긴 한데, 확실한 방법이기는 하네.'
꽃봉오리가 시들어도 뿌리는 아래로, 아래로 향하고 있겠지.
세계수의 도움을 받는 엘프 성좌 다운 방법이었다.
꽃들은 차도를 따라 피어나고 있었다.
30초도 지나지 않아 꽃망울이 활짝 만개하고
1분이 지나기도 전에 수 백개의 꽃씨를 바람에 날려 보낸다.
촬영 후 빨리감기를 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바라본 게 고작 10분.
어느새 점점 올라가기 시작한 스크린의 시야.
트럭만한 간판이 점처럼 보일 정도로 높다.
그리고 그 스크린의 일부를 물들인 알록달록한 고운 색상들.
꽃들이 거진 10km는 양 옆으로 퍼진 것 같았다.
"봤지?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거야."
미소를 지은 그녀에게서 헥헥,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다시 한 번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보니
아까 닦아줬던 이마에 다시 땀이 흥건하다.
하기야 황야를 꽃으로 도배중인데 지칠 수 밖에 없겠지.
그 모습을 보고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무슨 의미인지 대번에 알아들은 뽀얀 얼굴이 다시 발갛게 달아오른다.
"응, 아니, 왜?"
"고마워서 그러지."
작은 몸으로 서로를 껴안는 것도 흥취가 있지만
커다랗게 돌아온 몸으로 품 안에 쏙 올려놓는 것도 나름의 맛이 있었다.
두꺼운 내 허벅지를 통나무 의자 삼아 털썩 앉는걸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존나 두껍기는 하네.'
자그마한 몸이라 해도 나올 건 나오고, 들어갈 덴 들어간 여인의 몸인데.
어떻게 허벅지 한 쪽에 사람을 앉혀도 자리가 남을 수 있나.
품 안에서 올라오는 풀향기를 맡으며 스크린을 보니
뭔가 어색한지 그녀가 꼼질꼼질 움직인다.
첫 남자인 내가 계속 엘프의 몸으로 함께하고 있었으니
이런 거대한 남자의 몸은 익숙하지 않겠지.
신기한 것 처럼 팔뚝을 살살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때문에 아랫도리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다행스럽게도 허벅지에 엉덩이를 대고 밖을 향해 앉아
시들지 않는 거목이 내 고간쪽을 볼 리 없었다.
팔뚝의 근육과 힘줄을 손가락으로 살살 만져보다가
그대로 몸에서 힘을 풀고 내 가슴팍에 기대온다.
살덩이 말고 바윗덩이같은 감촉이 대체 뭐 좋다고 저러는지.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몸을 만지작거리며 야릇한 시간을 보낸다.
스크린 속에서는 마치 잉크가 퍼져나가듯 꽃이 황무지를 메꾸고 있는 상황.
꽃봉오리는 커녕 도로조차 보이지 않을 높이에서
점점 퍼져나가는 꽃을 구경하며 포옹한 자세를 유지했다.
스윽, 품 안에 안긴 그녀가 손가락을 휘두른다.
동시에 화면이 빠른 속도로 땡겨지며 누군가를 비춘다.
벌써 찾아냈나? 싶었지만 보이는 것은한 가족.
"아빠, 아빠!"
군인인 엄마의 면회라도 가는 걸까?
이 쪽으로 가 봐야 군부대밖에 없을텐데.
아이 둘이 차뒷문을 열고 후다닥 내리자
느릿하게 기지개를 펴는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린다.
"무슨 일인데?"
"이거 봐, 이거!"
북대륙은 러시아라는 내 고정관념에 딱 맞는 모습이었다.
자그마한 인형처럼 예쁜 아이들도 그렇고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도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일단 미래가 좀 바뀐 것 같은데.'
예지몽 속에서는 저 아이들이 본 장면이 다르다.
꿈 속의 그들은 황야를 가득 채우는 꽃밭이 아니라
황야를 녹여버리며 지나가는 전함의 궤도폭격을 보고 울었으니까.
열기 가득 담긴 후폭풍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일은 없었다.
엄마에게 주겠다며 꽃을 꺾은 아이가
척 봐도 수상한데 함부로 손을 댄다고 혼나 울상이 된 것 정도는 괜찮겠지.
아빠의 잔소리가 우주전함의 궤도폭격보다는 부드러울테니까.
그렇게 스크린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 찾았다?"
"벌써?"
품 안에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움직인다.
아무리 빠르게 꽃이 자라난다 해도 크기의 문제가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품 안의 그녀를 내려다보니 오히려 그녀가 나보다 놀랐다.
"찾긴 찾았는데…."
"음, 뭔가 이상해?"
"응. 너무, 너무 많은데?"
품 안에 있는 자그마한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인적 드문 황야에 숨겨진 지하실이 많으면 무엇이겠는가.
세상에 범죄자가 한 명만 있는 건 아닐테니까.
똑같은 생각을 한 건지 품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세계수를 향해 허겁지겁 달려간다.
'꽃을 피우라는 명령 말고 새 명령을 추가하려면 세계수가 필요한건가?'
화면이 당겨지고 다시 꽃봉우리들이 보인다.
그리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후다닥 튀어나오는 사람도.
"이게 뭐야!"
"아이 씨, 입구 막고 공사 다시 해야 하나?"
황야에 갑자기 피어난 꽃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자신들을 추격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걸까?
후드티에 마스크까지 쓴 놈들이 짜증을 내며
삽과 괭이 같은 공구를 들고 슬금슬금 기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