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129화 : 성좌의 권능 1
성좌가 되고 나서 더 이상 늙지 않는 몸뚱어리를 움직인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전함의 내부.
어느 순간부터 아내와 함께한 궁궐보다 더 익숙한 공간이다.
함장실로 향하자 친위대들이 모두 모여 있다.
함 내에서도 헬멧을 벗은 것은 딱 하나.
맨 얼굴을 드러낸 어린 친위대 하나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다른 성좌의 질투로 여동생을 잃은 아이.
"폐하."
잃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소중한 사람을 잃을 때
사람이 어떤 기분이 드는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니 저 어린 것이 감정을 숨기고 보고를 올린다.
"추적을 명하신 화신을 찾았습니다. 동북쪽 최전선 라인의 황무지에 숨어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합니다."
보고와 함께 전함이 양 측 홀로그램이 변한다.
몇 백 km 넘게 펼쳐진 황량한 평야를 따라 이어진 차도 하나.
있는 것이라고는 먼지와 회전초 덩어리밖에 없는 황무지였다.
한 달에 차량 두어대 지나다니는 황야에 땅굴까지 파 뒀으니
이토록오랜 기간동안 추적자들을 피해 숨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봐야 북대륙의 추적자들을 완전히 속이지는 못 했지만.
제 머리 위, 구름보다 높은 곳에서
투명화를 사용한 우주 전함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할까.
후드를 뒤집어 쓴 여성 하나가 황량한 차도에 차를 주차하더니
종이 박스 몇 개 들고 흙먼지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촬영되고 있었다는 걸.
홀로그램에서 눈을 떼었다.
보이는 것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
황송함과 충성심조차 제 혈육 잃은 어린 아이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그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그녀가 떠오른다.
제 신민이 외계 종족에게 고통받는다는 말에
대번에 전함을 몰고 직접 전쟁에 참여한 나의 아내.
불타오르는 행성과 우주의 자기장 폭풍 속에서도
여황은 제국을, 제국은 신민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며
가지 말라고 만류하던 나를 달래주고 전장으로 떠난 나의 아내.
"저어, 폐하?"
"출전을,"
늙고 추레한 목소리가 차디 찬 강철의 벽을 울린다.
제국의 음유시인들에게 칭송받던 고운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늙고 갈라져 듣기 싫은 추레한 목소리만 남아 있을 뿐.
그 목소리가 나와 참으로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출전을 준비하라."
"예, 친위대들을 보낼까요?"
"전 함대, 출전 준비하라."
동요가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과거의 내신하들이 그러하였듯이.
무언가 말 하려다 급히 입을 다무는 자.
그저 조용히 내 명령을 따르며 생각을 곱씹는 자.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처럼 눈을 마주치는 자.
그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자.
하지만 상관 없다.
"친위대의 혈육이자, 예비 친위대원이 살해당했다."
수 십억의 무고한 시민들을 기생종들과 함께 정화시킨 날 이후
누군가의 이해를 받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으니까.
"황제는 제국을, 제국은 신민을 저버리지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면 나를 벌하시리라.
아니, 그 전에 제국을 구원하셨겠지.
제국의 주인, 황제의 머리 위에 설 수 있는 것은 신 뿐이니-
"설령 그가 이미 죽어버린 신민이라 해도 제국은 기억할 것이다."
신이 없다면 누가 내게 죄를 물을까?
※
달짝지근한 황금색 꿀물.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지는 향기로운 꽃밭.
그리고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파괴적인 광경.
열 다섯척의 우주전함이 나란히 떠 있다.
그 거대한 자태는 도시에서도 충분히 식별 될 지경.
그들이 차도 하나 덜렁 있는 황무지에 레이저 빔을 갈기기 시작한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몰아가는 것 처럼
우주 전함이 화신 하나를 궤도폭격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죽어버린 신민을 기억하라? 이게 뭐야?'
땅이 녹아내리고 도로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군 부대가 화들짝 놀라 돌 맞은 벌집처럼 난리가 난다.
뉴스에는 불사르는 폭군의 행태가 도배되고 주식은 요동치며
겁에 질린 시민들은 최대한 내륙쪽으로 대피하기 시작한다.
"저기, 왜 그래? 괜찮아?"
걱정스러워하는 시들지 않는 거목의 목소리.
서늘한 손이 이마를 스윽 쓰다듬지만 환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되려 환각에 환청까지 더해져 내 머리를 쿡쿡 찌른다.
그와 동시에 기묘한 확신이 뇌리에 새겨진다.
'이거, 예지몽인가?'
이미 일어난 일이 아니다.
곧 일어날 일이다.
불사르는 폭군이 전해준 기억 때문에 그와 내가 이어졌던가
아니면 이 총력전을 막고 싶은 누군가가 내게 메시지를 보냈던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하나만은 분명하다.
왜 시점이 폭군의 시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꿈은 경고를 담은 예지몽이라는 것.
'내가 막으라는 건가?'
문제가 있다면 너무 막연하다는 것이다.
대륙의 중심으로 올 수록 도시가 많고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미개발의 황야와 초원이 남아있다.
표지판 옆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황야에 숨었는데 무슨 수로 찾을까.
예지몽 속 홀로그램에서 본건 정말 도로밖에 없다.
표지판이나 간판, 하다 못해 독특한 모양의 바위라도 있어야 기억하지.
불사르는 폭군보다 먼저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은거야?"
상념에 빠져 있는 나를 깨우는 상냥한 목소리.
괜찮다 말해도 걱정 어린 시선이 떠나질 않는다.
그 때문에 내가 멍청했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애초에 숨길 이유가 있나?'
성좌 놀이를 하는 것도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어서였다.
다른 성좌들과 인연을 하나씩 늘려나가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
예지몽 꾼 거 말한다고 천기누설의 죄를 짊어지는 것도 아니고.
"저기, 부탁할 게 있는데-"
"응, 뭐든 말해!"
코 앞에 성좌 경험과 마법에 대해 지식이 풍부한 선배가 있는데.
말이라도 꺼내보자,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자 곧바로 대답하는 그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확언을 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든든해진다.
겉보기에는 여리디 여린 엘프 소녀지만
그래도 천 단위의 화신을 거느린 중견 성좌다.
화신이 아닌 농사꾼들에 대한 영향력까지 따지면 만 단위로 껑충 뛰지 않을까.
"북쪽 황야에서 찾아서 잡아야 하는 화신이 있어."
"응, 찾아 주면 될까?"
"가능해?"
여자로서, 성좌 선배로서 듬직한 모습을 보일 기회라 생각하는 걸까.
내 말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녀가 확답을 내놓는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오히려 내가 놀랄 지경.
'그게 쉽나?'
도넛 모양의 거대한 대륙.
사해나 카스피 해 처럼 바다와 호수가 있긴 있다지만
기본적으로 육지의 면적이 매우 넓은 평평한 지구다.
'아무리 북쪽 대륙 한정이라지만 그 넓이가 얼마인데?'
미국에서 다른 주로 이동할 때 네비게이션이 2,500km 후 우회전입니다
이딴 소리를 하는 걸 생각해보면 이쪽 세상은 그보다 더 넓을 것이다.
그 넓은 면적에서 사람 딱 하나 숨어있는걸 찾아달라는건데.
"그런데 가능하겠어? 엄청 넓을텐데."
뚝딱 찾아낸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찾아 낼 방법이나 해주고 싶은 조언,
추적에 특화된 화신이 있냐고 물어보고 싶었을 뿐인데.
"물론! 북쪽 도로가 맞지? 그걸 알면 충분해."
호언장담을 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그녀를 과소평가 하고 있던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이 넘친다.
"어떻게 찾으려고?"
"화신을 찾아달라는 건 어렵지만, 도로변 쪽 땅굴은 찾을 수 있어. 물론 바로 찾아내는 건 아니고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놀이공원에서 들뜬 아이처럼 그녀가 내 손목을 잡고 이끈다.
정원이 보이는 테이블에서 일어나 세계수의 쪽으로.
마중을 나오듯 연녹빛의 넝굴이 스물스물 기어나온다.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는 식물은 얼핏 보기에 징그럽지만
그 끝자락에 새하얀 엘프 소녀가 있기 때문일까?
기괴함보다 신비함이 느껴진다.
"엄청 급한 일은 아니지? 내일까지 찾아야 한다던가…."
확실히 찾을 수 있으니 자신있게 질렀는데
시간이 좀 걸리는 방법이라 불안한걸까?
가슴 쭉 펴고 자신만만하다가 갑자기 쭈그러드는 모습이 귀엽다.
"엄청 급한 일은 아니야."
"그래? 그러면 내가 찾아 볼게."
주가가 요동치고 경제가 불안정해지며
군대가 경계태세에 들어가고 화신들이 우르르 모여들지만
결국 범인 하나 잡으면 끝날 일이긴 하지.
내가 손해보는 일은 아니니 괜한 부담을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하고 시들지 않는 거목의 옆에서 무엇을 하나 보았다.
자그마한 양손을 기도하듯 모은다.
그 위로 마치 팔찌처럼, 장식처럼 휘감기는 넝굴.
세계수와 엘프가 하나로 이어지자 연녹색으로 은은히 빛난다.
하지만 그 뿐.
여기가 꿈 속 세계도 아니고
몽마인 내가 세계수를 들여다 볼 수 있을 리 있나.
내가 할 수 있는건 손수건을 만들어
지친 것 처럼 땀을 뻘뻘 흘리는 뽀얀 이마를 닦아주는 것 뿐이다.
땀냄새 대신 꽃향기가 나기는 하지만
지친 것 처럼 점점 이마가 젖어가며
잔머리가 달라붙는 게 보이니까.
손수건으로 땀을 살살 닦아내며 가까이에서 바라보았다.
숨결이 느껴질 거리에서 마력을 담아 노려보았지만
역시 몽마의 마력으로 세계수를 꿰뚫어 보는 건 안되는 것 같네.
호환이 불가능한 전자기기를 보는 기분이 든다.
'욕망과 관련 있는 감정, 꿈만 볼 수 있는건가.'
"후우,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살며시 감겨 있던 눈이 댕그랗게 뜨인다.
눈을 감았다 뜨니 숨결이 닿는 거리니 좀 놀랐겠지.
발갛게 달아오르는 뺨과 귀를 보고 있으니
눈동자가 화들짝 놀라 휙 돌아가는 게 보인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어떤 방식으로?"
그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팔을 뻗었다.
기다리면 된다니까 믿고 기다리면 되겠지.
대답은 없었다.
다만 더운 숨결만 나눌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