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125화 : 훈육 2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는 갔다.
부모를 잃고 복수를 다짐하자 마자 성좌와 계약.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네 대륙에 이름이 퍼질 정도로 승승장구.
환자만 치료해도 다른 화신과 비교도 안 되도록 마력이 늘어나지,
조금만 노력을 해도 권능을 스스로 깨우치니 자만심에 취하지 않았을까.
사회 생활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20대 초반의 철 없는 여학생이다.
사회 초년생들이 회사나 군대에서 실수를 하듯 그녀도 그럴 수 있겠지.
새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달뜬 숨을 내뱉는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이해와 용서는 다른 영역이였다.
'좆질 하다 뒤진 새끼 한 두명 본 것도 아니고.'
통조림 하나 때문에 사람이 죽는 세상이었다.
습기차지 않은 구석자리에 등 뉘이기 위해 노인을 목 졸라 죽이고
콘크리트의 갈라진 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차지하려고 어린애를 때려 죽이는 세상.
예뻐서, 이해 할 수 있어서 용서까지 하기에는 내가 겪은 일이 너무 많았다.
"서, 성좌님-?"
내 손아귀에 짓눌려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김하은이 공포에 질려 나를 부른다.
이 와중에도 몽마의 마력이 착실하게 일을 하는지 공포 사이에 아주 미세한 쾌락이 뒤섞여 있다.
'이건 좀 마음에 안 드는데.'
검은 구정물 위에 떨어진 한 방울의 분홍 페인트처럼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미약한 쾌감이라도 용납하기 싫었다.
그렇기에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려 그녀에게 때려박기 시작했다.
벌을 받는데 뭔 놈의 쾌감과 기대야.
평상시에 상상하는 것은 실타래.
그러나 지금 상상하는 것은 식물의 잔뿌리였다.
더 얇고, 더 세세하게 갈라지듯이.
그리고 피부를 파고들어 혈관에 뿌리를 내리듯이.
"흐, 크헤엑…."
어쩌면 다른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말 잘 듣는 화신으로 만들어 즐겁게 지낼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김하은이 내게 말하지 않고 성장에 취해 무례를 저질렀듯이
나도 내게만 쉽고 간편한 방법을 사용할 뿐.
"잘못, 잘못 했어요…."
마력, 몽마의 마력에 대한 재능이 넘치는 김하은이다.
조금씩 움직이는 내 마력을 느꼈는지 눈물을 줄줄 흘려 바닥을 적신다.
눈을 지긋이 감고 마력에 집중하자 거대하다 못해 비대해진 김하은의 마력이 느껴진다.
이제는 마력의 장막이라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로 많은 양.
그러나 반 쪼가리 몽마의 마력이 순수한 몽마의 마력을 이겨내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네, 네네!"
입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반응하는 김하은.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녀가 원하던 말이 아니리라.
"마력은 충분히 많은 것 같구나."
손 꼽힐 재능을 지닌 김하은이 아카데미에서 천 단위의 악몽을 받았다.
그것도 자잘한 악몽도 아니고 최전선에서 뛰는 군인과 화신들에게서.
촉진을 하듯 마력을 뻗어나가서 직접 느끼기에는
그녀의 마력량은 아카데미의 교관들을 뛰어 넘은 상태.
참으로 대단한 재능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오만해 진 걸까?
"아, 아으, 제바알-, 성좌님, 제발…."
애처로운 애원이 들려 왔지만 내 마력은 계속해서 뻗어나간다.
피부를 뚫고 들어가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향해서
바다에 잠수하는 잠수함처럼 거대한 마력의 아래로, 아래로-
그리하여 몽마의 근원까지.
"잘못했어요, 제발, 잘못했어요…."
전에 죽였던 놈의 근원이 유리구슬이라면
김하은의 근원은 마치 젤리 같았다.
아마 온전한 몽마가 아니여서 그렇겠지.
공포에 질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조금이라도 내 기분을 풀려는건지 몸을 꿈틀거린다.
사슬에 목이 묶여, 머리통을 내게 잡힌 상태로
필사적으로 애원하는 미인의 모습은 다시 한 번 몽마의 본능을 자극한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몽마가 아니라 성좌의 마음가짐.
끝내 나의 마력이 그녀의 근원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사실 생각했던게 있긴 했었으니까.'
재능이 넘치는 화신.
성좌와 화신의 갑을관계.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살던 내가 당연하게 떠올리던 것.
평화로운 세상에서 인간적인 교류를 하며 미뤄뒀던 것.
억압과 착취.
"이건…?"
근원이 잠식당했음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아서일까?
일말의 희망을 담은 연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본다.
아마 고문 당하거나 근원이 파괴당하고 마력이 통째로 사라지는 걸 걱정했겠지.
'차라리 고문을 받겠다고 할 것 같은데.'
입을 열자 나도 놀랄 정도로 묵직한 저음이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며 튀어나왔다.
"네 처벌을 결정했다."
다시 한 번 마력을 강하게 때려박는다.
흙을 파고든 식물의 잔뿌리부터
나무에 들러 붙은 겨우살이,
버섯이 피어난 동충하초,
삼투압 현상 실험처럼 갈래갈래 퍼져나가는 잉크까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을 전부 떠올리면서.
"너는 앞으로 마력을 모으지 못할 거다."
촘촘한 그물망처럼 근원을 감싸 내 마력이 뿌리를 내리도록.
"그건-"
물론 그걸로 끝을 낼 생각은 없었다.
6일, 그러니까 체감 시감으로 18일을 가짜 꿈 속에서 보냈는데.
그 긴 시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보낸 화풀이는 해야지.
감옥, 사슬, 쇠창살 다 놔두고 괜히 식물 뿌리를 생각한 게 아니다.
근원을 촘촘히 감싸고 뿌리 내린 마력을 반대로 돌려본다.
파고드는 게 아니라, 빨아들이는 움직임으로.
"흐, 흐앙-?"
근원이 빨아먹히고 마력을 착취당하더라도
고통 대신 쾌감이 느껴지는 게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사실 내가 하는 배려라기 보다는 내 고정관념이 만든 쾌감이겠지만.
'머리에서 마법 소녀 강간물이 떠나지를 않네.'
몽마를 떠올릴 때 프레디 크루거를 떠올렸던 것처럼
마력 착취를 떠올리면 섹스로 마법소녀를 패배시키는 악마 만화가 떠올라버렸으니까.
설정이 자극적이라서 그런지 어째 뜬금 없이 기억 속에서 튀어나오네.
김하은의 머리카락이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연보라색이라 더 그렇다.
머리를 놔 줘도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해 흐트러져 있는
새하안 피부와 어울리면서도 이질적인 머리카락의 색.
'…재능 하나는 대단하긴 하구나.'
그 와중에 빨아들여지는 마력이 벅찰 정도로 많다.
음료 잔에 빨대를 꼽고 쭈욱 빨아들이는 게 아니라
욕조, 아니 수영장에 고개를 처박고 물을 마시는 기분.
백날 쭉쭉 빨아봐야 고갈 될 것 같지가 않다.
'이러면 좀 부족한데.'
원래대로라면 마력을 고갈시키려고 했다.
근원을 가지고 협박하고, 마력을 고갈시키고,
그녀의 내부에 내 마력을 심어 상하관계를 확실시 하는 것.
그런데 마력 고갈은 커녕 내가 부풀어올라 터질때 까지 흡수해도 10%도 못 가져가겠네.
마음을 바꿔 마력을 좀 더 깊숙하게 집어넣는다.
마력에 뿌리내리고 근원을 건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물렁한 근원의 중심부까지 내 마력이 침투하도록.
"네가 마력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단 하나."
즉흥적으로 떠올린거지만 김하은에게는 효과적이겠지.
"내게 직접 받아가는 것 뿐이다."
"크, 커어, 허어억-"
마치 물에서 방금 나온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는 김하은.
마력을 흡수하지 못 하도록 방해를 받는게 갑갑한지
옷자락이 뜯어 질 정도로 가슴팍을 쥐고 컥컥 숨을 몰아쉰다.
절그럭 절그럭 사슬 엉키는 소리도 거친 숨소리를 가리지 못 할 정도로.
'답답해서 미치겠지.'
이번에 떠올린 것은 군대에서 사용했던 고장난 방독면.
숨을 쉬고 싶어도 공기가 들어오지 않아 질식할 것 같던 그 끔찍한 감각이다.
코가 아플 정도로 강하게 숨을 들이쉬지만 가슴이 먹먹하고 공기가 부족한 그런 감각.
멋대로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 하게 막기 위해서 떠올렸다.
이즈음 되니 직접적인 폭력보다 이렇게 제약이 덕지덕지 붙는 게 더 무섭다는 걸 깨달은걸까.
김하은이 바닥을 기면서도 필사적으로 내게 다가와 발치에 들러붙는다.
그 모습을 무시한 채 마력을 조금 더 움직여 보았다.
'확실히, 효과가 있긴 하네.'
반 쪼가리 몽마의 근원이라 해도
내게는 무엇보다 확실한 실험체니까.
꿈 속에서 머무르며 무의식을 주무르고
망상 속 존재를 끄집어내는 것 보다
몽마의 근원 하나를 만지작거리는 게 더 효율이 좋다.
백날 허수아비를 두드리는 것 보다
PVP에서 유저 하나를 잡는 게 경험치를 더 많이 주는 것 처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고작 몇 m를 힘겹게 기어온 김하은이 고개를 조아린다.
"제발, 용서를…, 아니 자비를."
치켜 올라간 내 눈썹을 본 걸까.
내 발등에 입을 맞추던 그녀가 말을 바꾼다.
'일상 생활에서 계속 이 상태면 써먹기 힘들겠지.'
아무리 마력이 많다 해도, 매일매일 빨아 먹다보면 언젠간 고갈 될 것이다.
거기에 체벌이라는 명목으로 아카데미의 치료동을 폐쇄 할 수도 없고.
벌은 줘야 하지만, 환자 치료는 계속되어야 하는 상황.
대기하는 환자가 백 단위인데 김하은 없이 내가 다 돌보고 싶은 마음은 없다.
삐죽삐죽하게 가시를 내린 마력을 좀 더 뭉특하게 다듬는다.
육체 내부를 찌르는 가시 뭉텅이 대신
마력이 흐르는 통로를 틀어 막은 끈적한 타르처럼.
"내게서 직접 받아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겠지?"
사슬을 쥔 손을 들어 올리자 땀에 젖은 머리통이 주욱 딸려와
내 허벅지 위에 축 늘어진다.
마력을 봉인하고 근원을 반 즈음 흡수하고
마력이 지나다니는 통로까지 막았으니 정신 좀 차렸겠지.
사람으로 치면 코와 입을 막아버린 다음
명치 부분을 후려쳐 숨을 쉬지 못하게 막은 상황이니까.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면 계약을 파기하는 게 맞지.
"죄송, 죄송하빈다… 마력 주세요…."
계약을 파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잠시 하고 있으니 허벅지에 따끈하고 축축한 감촉이 느껴진다.
눈이 헤벌레 풀린 김하은이 뺨일 부비며 조금씩 핥아 올라오고 있었다.
'이 정도였나?'
마력 흡수를 막았다고 대번에 맛이 가다니.
이 정도면 숨을 못 쉬게 막은 게 아니라
마약 중독자한테서 마약을 뺏은 정도 아닌가?
내 생각이 맞다는 것 처럼 김하은은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주제에
아득바득 내 고간쪽으로 조금씩 고개를 들이 밀고 있었다.
아마 그녀가 원하는 것은 마력을 얻을 유일한 방법.
몽마의 정을 받아가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