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123화 : 자존감 3
김하은을 따라다니며 구경 한 학교 생활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한예지의 기억처럼 갑자기 괴수 한 마리가 톡 튀어나오는 일 따위는 없는 평온한 하루.
체육 시간에 죽도를 휘두르고
혈기 왕성한 여학생들은 그걸로 내기를 하고
내향적인 남학생들은 슬그머니 구석에 앉아 빠져있는 상황.
그 뒤에도 김하은의 전형적인 학교 생활이 이어졌다.
수돗가에서 물장난을 치며 대충 땀을 닦아내는 모습.
급식을 받으며 고기를 더 달라고 급양사 아저씨에게 애교를 피우는 모습.
땀 흘리며 뛰어 놀다 배불리 먹으니 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꺼덕이는 모습.
그러다 연보라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흰 이마가 붉어지도록 딱밤을 맞고 깨어나기까지.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지?'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모든 무의식과 꿈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 있었다.
애정 결핍이라 맞이해주는 사람을 망상하는 꿈,
성좌 오타쿠라 성좌가 사라지는 걸 두려워 하는 꿈,
군대를 이끌고 괴물을 무찔러 위대한 존재가 되는 꿈.
아니면 무의식이 뒤섞여
개그성 짙은 공포 게임의 근육녀에게 쫒기는 꿈이나
낮에 봤던 공포 게임의 배경이 등장하거나
자기가 욕망하는 야한 꿈을 꾸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건 무엇 때문에 꾸는 꿈일까?
"반장, 인사-"
""감사합니다!!""
자그마한 머리통들이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교내가 와- 하는 웅성거림으로 가득 찬다.
하교 벨소리를 배경음 삼아 삼삼오오 흩어지는 어린 학생들.
욕망이고 무의식이고 간에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굳이 쥐어짜내자면, 어린 나이에 화신이 되었으니 평범한 생활을 동경한다?
전생의 연예인들도 학생 때 부터 성공하면
평범하게 등교를 해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긴 했었지.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일 리 없다.
세계 제일의 검객 겸 성좌가 인정한 최고의 재능.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고작 학교에 가고 싶어서 미쳐버린다고?
자신의 성좌의 위대함을 체감하고
갈 길이 막막하다고 느껴 절망을 느낀 다음
그 뒤에 이어지는 감정이 '중학교 가고 싶다' 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주변이 급작스럽게 어두워진다.
구름이라도 꼈나, 비라도 내리나 고개를 들어보니
보이는 것은 쑤욱 내려가는 태양.
"저건 또 뭔데?"
빨리감기라도 한 것 처럼 태양이 빠르게 저문다.
그리고 달이 떠오르고 바로 져버린다.
체감상 5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오후에서 자정으로, 자정에서 아침으로 시간이 흘렀다.
멍하니 구경을 하고 있으니 정문이 열리고 학생들이 몰려 들어온다.
검은 머리통의 물결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연보라색의 머리카락도.
실내화 주머니 달랑달랑 들고 친구와 장난을 치는 그녀.
머리카락과 피부색 때문인지 중학생이 아니라
외국인 키즈 모델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
남녀 역전 세계라 해도 중학생들은 아직 애.
여학생들이 치마 뒤집히는 것 도 모르고 꺅꺅거리며 뛰어다니고
남학생들은 그걸 보고 더럽다며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남의 교복 타이를 잡아 당겨 늘어트리고
복도에 왁스칠을 한 다음 스케이트를 타다가 자빠지고
계단에서 누가 더 높게 뛰는지 내기를 하다 팔 부러져서 양호실 간 놈이 영웅이 되어 돌아오고.
여학생이 아니라 그냥 머리 기른 남학생 아닌가 싶을 정도로 활발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어김 없이 사건의 중심에는 자그마한 연보라색 머리통이 있었다.
'이게 대체 뭔 꿈이야…?'
인싸가 되지 못했던 학창시절에 대한 아쉬움?
아니면 화신의 중압감 다 내려놓고 뛰놀고 싶다는 어리광?
세상 걱정 없이 뛰노는 중학생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되려 머리가 복잡해진다.
차라리 괴물 하나가 뛰쳐 나와서 애들이 패닉에 빠지고
화신이 영웅처럼 등장해 애들을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다시 하교 시간이 되어 벨이 울리자
마지막 학생이 교문을 통과하는 것을 기준으로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한다.
※
학교에 괴물이 나타난다던가
운동장이 갈라지며 로봇이 출동한다던가
학생 중 몇 명이 선택받은 아이들이 되는 일은 없었다.
단지 여제자의 기억처럼, 3번의 일상이 지나니 밖으로 자연스럽게 나올 뿐.
'죽도가 없으면 동양풍 저택, 죽도가 있으면 학교.'
잠들어 있는 여제자에게 손을 올리고 꿈 속으로 들어가면 동양풍 저택이 나온다.
반대로 죽도에 손을 올리고 꿈 속으로 들어간다 생각하면 중학교가 등장한다.
공통점이라고는 3일이 지나면 체험이 끝난다는 것 뿐.
이 난해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심리학 전문가들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내가 상상하지도 못 했던 문제가 있었다.
"그, 죄송하지만 읽어내지를 못 하겠습니다."
"그런가요?"
"네, 졸리니까 안전한 곳으로 돌아 가고 싶어하는 것 말고는…."
내가 생각하는 심리학 전문가들은
행동과 말투, 상담을 통해 사람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성좌와 화신과 마법과 초능력이 존재하는 세상.
아카데미에 초청 받을 정도로 저명한 심리학자라면 화신이라는거다.
행동 교정? 말투 분석? 심리 상담?
그런 건 권능이 해결하는 거지.
"그보다, 엄청나게 두려워 하는 존재가 있는 것 같은데…, 그건 괜찮으신거 맞습니까?"
"아, 그건 괜찮아요."
잠재우는 오르골의 화신이라 소개 한 중년의 남성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마력이 어지럽게 퍼져 나가지만 아무런 소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력이고갈 될 때 까지 들이 붓기를 벌써 몇 번.
성좌 둘 앞에서 실패를 계속 반복하니 기절할 것 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꺽꺽거리는 게 당장이라도 변기통을 붙잡고 토를 할 것 같은 상황.
기억과 감정과 심리를 읽고 상담을 해 주는 서대륙 제일의 상담가였지만
주화입마에 걸린 여제자와 낡은 죽도를 파악하지 못 한 것이다.
이 분야의 화신 중 최고 권위자라더니.
"정확히 말하자면, 읽지 못 하는 게 아니라 읽을 게 없습니다."
"읽을 게 없다?"
"네. 제 권능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쉽게 말하자면 요리를 맛 보는 거라 할까요? 요리사가 요리를 맛 보고 무슨 재료가 들어갔는지 맞추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단 입에 요리가 들어와 그걸 먹어 봐야지 맛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 환자분의 상태는 요리가 없어서 맛을 못 보는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조금 횡설수설하는 모습이었다.
마력은 고갈 직전까지 다 사용했지, 굴레를 베어내는 검은 노려봐
아카데미의 초청을 받고 박사 학위 자랑하며 왔는데 성과는 하나도 없어.
그 와중에 안 된다, 못 한다는 말만 계속 하다보니 말이 꼬이는 것 같은데.
하지만 좀 이상한데.
"그러니까, 기억과 감정을 읽으려 하는데 마력이 접근도 못 한다 이거죠?"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데 점점 더 흥건해지기만 하는 이마가 안쓰러울 지경.
하지만 어쩌겠는가? 박사 딱지 들고 와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떨리는 게, 긴장감이나 마나 탈진으로 금방이라도 기절 할 것 같아 보인다.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눈총을 받던 심리학 박사 화신이 부축을 받아 돌아가고
하던 대로 노력만 해 달라며 고개를 넙죽 숙인 굴레를 베어내는 검도 돌아갔다.
자신은 없지만 결국 내가 머리를 굴려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저 고양이가 힌트를 준 것 같기는 한데.'
리트리버가 갑자기 물고 온 낡은 죽도.
고양이가 갑자기 간섭해 변형한 내 아바타.
기억을 왜곡하고 저택에 혼자 남은 여제자.
여제자의 기억 속에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 김하은.
그리고 '기억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라며 손사래를 친 심리학 화신까지.
'기억에 접근이 불가능하다, 왜?'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닐 것이다.
여기가 전생의 지구도 아니고, 가짜 박사 같은 게 있겠는가.
성좌가 선택하고 아카데미가 검증한 사람인데.
머리를 굴리니 당이 떨어지는 것 같아
달달한 탄산 음료를 마구잡이로 꺼내 계속 마시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덩치가 커지니 밥통도 늘어났는지 세 캔을 벌컥벌컥 마셔도 속이 더부룩하질 않네.
그렇게 머리를 굴리다 보니 가설 하나가 톡 튀어나왔다.
물론 이 가설이란 게 모든 걸 설명하지는 않고 끼워 맞췄을 뿐이지만 그게 어딘가.
리트리버가 물고 온 죽도나 고양이가 바꿔버린 내 생김새는 일단 제쳐두고.
심층 의식과 표층 의식이라는 단어가 있다.
아까 잠재우는 오르골의 화신이 설명할 때 잠시 언급했던 단어였지.
말 그대로 마음의 겉과 안의 뭐시기인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마음에도 깊이가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게 무의식이 아니라 겉핥기였다면?'
주화입마에 걸린 여제자의 의식은 저 깊은 곳으로 가라 앉아 있고
나는 마력을 통해 여제자의 의식 코 앞까지 도착한 상태고
잠재우는 오르골의 화신은 근처에도 도착 못 한 거라면?
같은 날이 반복 되는 이유는 온전한 꿈이 아니라서.
수박 겉 핥기처럼 표면, 그것도 표면의 파편만 경험하고 있다면?
다른 의문은 해결되지 않지만 충분히 시도 해 볼 법한 가설이었다.
곧바로 소파 뒤에 숨어 웅크려 있는 여제자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이제 익숙하다 못해 신물이 나는 동양풍의 저택.
아무것도 못 하고 멍하니 구경만 하면 흰 젖가슴 덜렁이는 것도 눈에 뵈질 않더라.
한 번 겪을 때 마다 3일씩 흘러가는 세상에 벌써 7번째 입장하는거다.
…이게 실패하면 총 21일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멍때리게 되는 거지.
툇마루에서 벌떡 일어나 넓은 마당으로 향했다.
밀짚 허수아비와 통나무와 목각인형을 상대로 목검을 휘두르는 여제자에게.
땀 때문에 벗어 던진 웃옷을 지나 그녀의 앞에 섰다.
후웅- 살벌한 소리 내는 목검이 나를 통과해 지나간다.
땀방울이 또르르 흐르는 아담한 가슴으로 뻗은 내 손도 그녀를 통과해 지나갔다.
저택의 가구들은 마음대로 만지는데, 오직 여제자만을 만질 수 없는 상황.
'역시, 이게 답인가?'
손 끝에 마력을 모아 여제자의 어깨를 잡았다.
이번에 떠올리는 것은 출구가 아니라 입구.
누군가 머리끄덩이를 잡아채는 것처럼 어디론가 끌려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시야가 트이기도 전에 들려오는 두 개의 목소리.
"하아아앗!"
"느려!"
"악!"
훙훙거리는 살벌한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자
여제자의 목검에 개처럼 맞으며 바닥을 뒹구는 김하은이 보였다.
…이게 무슨 상황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