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122화 : 자존감 2
경비원들의 시선을 뚫고 들어온리트리버.
리트리버 특유의 그 연하디 연한 황갈색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그리고 녀석의 발치에 있는 죽도 한 자루.
갈라진 부분도 있고 떼 탄 부분도 있는 꼬질꼬질한 죽도.
어떻게 생각해도 성좌의 성역과 어울리는 물건이 아니다.
"뭐야, 죽도가 왜 여기에?"
두 화신이 고개를 숙이고 죽도로 손을 뻗기도 전에
얌전히 따라오던 여제자가 두 사람의 사이로 파고든다.
어깨로 밀치고 비집고들어오는 게 아닌, 무술의 보법을 사용한 듯 한 움직임.
손목의 밧줄도 무시하고 두 사람의 비좁은 틈새에 걸리지도 않은 채
우리들의 옷자락만 펄럭이도록 파고 든 여제자의 모습에
두 화신이 화들짝 놀라 마력을 운용하기 시작하지만-
"어?!"
"뭐, 뭔데!"
묶인 팔로 죽도를 소중히 껴안은 여제자는
그대로 소파 옆 구석진 공간에 파고들어 웅크렸다.
"유아퇴행이 아니라…."
작게 중얼거리던 김하은이 입을 꾹 다문다.
짐승 같다거나 동물 같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일단 환자니까 말을 조심하는 것이겠지.
낡은 죽도를 품에 안고 구석진 곳에 웅크린 여제자.
양탄자 위에 배를 깔고 앉은 리트리버.
그리고 어느새 몰래 들어온 고양이까지.
성좌 하나, 화신 둘, 주화입마에 걸린 검객과 두 동물.
여섯 명의 요상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일상의 루틴에 여제자가 추가 된 상황.
환자를 돌보고, 화신들의 무의식을 둘러보고, 여제자의 꿈 속에 들어가 마력을 퍼트린다.
아카데미가 저명한 심리 상담가를 초청하던 말던 일단 꿈 속에서 자유로워야 하니까.
몽마의 마력으로 조금씩 침식해 나가는 중이다.
의외인 것은 가장 얌전한 것이 주화입마에 걸린 여제자라는 점이었다.
본능적으로 이 곳에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오지 않는다는걸 안 걸까?
식사를 할 때 휠체어를 밀어 주던 두 명과 함께 떠나는 시간을 제외하면
방구석에서 통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겨울잠을 자는 곰이라도 된 것 처럼 구석에 얌전히 처박혀 있는 것이다.
'덕분에 꿈 속에 들어가기 편하긴 하지만.'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두루마리를 잔뜩 가져와 연구를 시작한 이하린.
소파 옆 구석진 빈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만 톡 튀어나온 여제자.
잠금 장치따위 무시하고 밖으로 뛰어 놀러 나가는 리트리버.
뭔가 판타지스러운 일상이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김하은과 고양이 때문에.
"좀 비켜주세요…."
뭔지 모를 서류업무를 처리하던 김하은이 애걸복걸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카데미쪽에 심리 상담가를 요청하며 덤으로 받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그 목소리에 호기심을 느껴 슬그머니 김하은 쪽으로 향했다.
환자와 관련된 업무인지, 아카데미가 요청한 서류인지
노트북으로 무언가 서류 작업을 하고 있던 김하은.
그리고 그 노트북을 복대처럼 제 배때지 지지는 데 사용하는 고양이.
고양이의 덩치가 크다 보니 노트북의 일부분도 보이지 않게 완벽히 가려졌다.
"웨-옹"
"아니, 왜 그러는데 대체?"
김하은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그저 앞발을 핥으며 딴청을 피울 뿐.
그래도 이유 없는 심술을 부리는 녀석은 아니다.
김하은도 그걸 알고 있는지 설명을 해달라고 애원을 할 뿐.
아니면 초고속 냥냥펀치가 무서워서 그럴 지도 모르고.
"음…?"
그렇게 책상 앞에서 나를 노려보는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니
갑자기 뒷목이 땡기더니 시야가 쑤욱 높아진다.
앞발을 휘적거리며 휘두르는 게 저 녀석이 한 짓인가?
'이 몸뚱이도 되게 오랬만이네.'
두꺼운 손마디와 우람한 근육.
시들지 않는 거목과 만나기 전 내 화신 셋이 만들어냈던 육체였다.
'그런데 왜?'
고양이가 아무리 변덕이 심한 동물이라지만
저 녀석은 성좌의 선택을 받아 사람에 준하는 지능을 가진 전령이다.
노트북이야 본능적으로 깔아뭉갠다 해도
내 몸을 아무 이유 없이 바꿔버릴 이유가 있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옷을 톡톡 잡아당긴다.
"어…?"
"뭐야?!"
순간적으로 이하린이 나를 부른다 생각했지만
이하린이라면 내 앞으로 와서 공손히 이야기를 하거나
목줄을 통해 텔레파시를 걸지 이렇게 옷을 당기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크응-"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제자 아니겠는가.
"괜찮으니까 마력 가라앉히렴."
화들짝 놀라 내 쪽으로 달려오는 두 화신들.
그러나 두 마리의 전령은 살기나 위협을 느끼지 못 했는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두 화신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꾸욱 꾹 내 옷자락을 잡아 당기는 여제자.
키가 훅 솟아올라서 그런지 내려다보는 시선이 생소하다.
이제는 또 엘프 소년의 몸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런가?
또, 자세히 살펴보면 예전의 몸과 조금 달랐다.
'손이 좀 더 두껍네, 근육도 많고.'
예전의 몸이 잔근육이 잘 발달된 조각상 같은 몸이라면
지금의 몸은 영화에서 나올 법 한 야만전사의 몸 같았다.
손가락도 두껍고 손아귀도 더 큰 걸 봐선 전체적으로 몸이 두꺼워진 것 같다.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제자는
내 커다랗게 변한 손이 마음이 드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달라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더니 개가 공을 물어오듯 제 죽도를 내 손에 쥐어주기까지 한다.
품 안에 애지중지 껴안고 있던 걸 갑자기 왜 나한테-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가 빙글 돌아간다.
'이젠 이 것도 익숙하네.'
성좌도 아니고 화신의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갈 거라 생각은 못 했지만.
귓가에 야옹- 하고 길게 울려퍼지는 소리를 들어보니
저 까만 고양이가 뭔가 한 것 같기도 하다.
"자, 자! 연습 시작해야지!"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동양풍 저택의 담벼락이 아니라 학교 강당으로 보이는 장소.
호루라기를 입에 문 남교사가 박수를 짝짝 치며 학생들에게 소리를 치고 있었다.
'생긴건 조금 달라도, 검도는 맞는 것 같은데…?'
어릴 적 해동검도에서 본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아무튼 얼굴을 가리고 검은 도복을 입은 채 죽도를 들어 올리는 자그마한 학생들.
키가 더 커져 190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중학생들이 더 작게 느껴진다.
여제자가 중학교 때 죽도를 잡은 걸 보고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바로 데려왔다 했었지, 아마?
그렇다면 이건 여제자의 예전 기억일 것이다.
"상호간에, 경레!"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생각했는데-
"하은아?"
얼굴 보호구를 벗어 던지자 나오는 것은 연보라색의 머리카락.
그러니까 내 화신, 김하은의 얼굴이었다.
심지어 몽마의 마력을 받아 변하기 전의 육체도 아니고
연보라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채 어려진 상태로 등장한 상황.
여제자에게,여제자의 죽도를 받아, 여제자와 접촉을 했는데
거기서 왜 여제자가 아니라 김하은이 등장하는 걸까?
꿈과 기억이란 게 이렇게 제 좆대로 섞이는 건가?
아무리 몽마의 삶에 익숙해 졌다 해도
내 실력을 객관적으로 보면 최하위권을 겨우 벗어난 하위권.
불사르는 폭군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제 걸음마는 뗀 상황인거다.
마력만 가지고 뚝딱-!
편리하게 상황을 완벽히 이해하고 파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관찰하는 것 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눈 앞의 광경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거구가 된 내 가슴팍에도 오지 못 할 자그마한 여학생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앙 다물고 죽도를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그 중 가장 활약하고 있는 것은 김하은.
저게 김하은이 맞는지 의심이 좀 가긴 하지만
몽마의 마력이 어느 정도 느껴지는 걸 보니 그녀가 맞는 것 같았다.
'여제자의 기억과 김하은의 무의식이 뒤섞인건가?'
내가 알기로 김하은은 이렇게 운동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부모님이 사고로 죽기 전 까지 오직 공부만 한 범생이니까.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동아리 활동 대신 학원들 다니며 공부를 한 걸로 아는데.
그러니까 이 상황은 여제자의 기억이지만
이 상황 속에 있는 인물들은 김하은의 무의식이다-
거기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추측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이상 내가 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이 곳에 감금당한 것은 아니다.
여제자의 기억 속 저택에서 탈출하듯
마력을 사용해 문을 만들면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호기심 해결이 안 되니 문제지.
이 상황이 여제자의 주화입마의 해결과 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김하은의 문제인지, 그 조차 아니면 그 검은 고양이의 장난질인지
무엇 하나 알지 못 한 상태로 후다닥 도망 칠 이유는 없다.
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또 몰라.
"야, 봤냐?"
"보긴 뭘 봐."
"아 씨, 내가 박혜림 이겼잖아. 니가 못 이길거라며."
"알았어, 음료수 하나 사면 되는 거 아냐?"
"그래 임마, 뭘 모르는 척이야."
교실에 따라 들어갈 때 정수리가 미닫이문에 닿을랑 말랑하면 190cm은 넘은 것 같은데.
내 눈에 보이는 손가락과 팔뚝만이 아니라 허벅지나 어깨도 엄청 굵어진 것 같고.
꽤 덩치가 좋아 보이는 체육 남선생도 나보다 머리 하나 반은 더 작은 상태다.
손에 도끼 한 자루 쥐면 바바리안이라 불러도 될 몸뚱어리.
140cm도 안 될법한 여중생과 그녀가 든 죽도에 두려움을 느낄 리 있나.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교내를 돌아다닌다.
학생들은 전부 검은 머리, 가끔 금발이 보이지만 교사에게 붙잡혀 끌려간다.
교사들도 전부 검은 머리에 노인들의 흰 머리만 보이는 상황.
명백히 이질적이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피부색, 눈동자 색, 머리 색에 딴지를 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