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120화 : 목줄 3
전생에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빗대는 숙어가 있었다.
복날 개 패듯 한다-
그런데 눈 앞의 광경을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복날 개도 저렇게 패지는 않겠다고.
아니, 복날에 개를 저렇게 패면 다진 고기는 커녕 핏자국만 남아서 먹을 것도 없겠다.
투명한 장막 때문에 볼 수 없는 담벼락 너머에서 뻐엉 뻥 공 차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만 듣다 보면 이게 사람이 얻어 맞는 소리라고 감히 상상도 못 할 격한 소음.
"키야, 키엥!"
"어허, 제자야. 아직도 이를 드러내느냐."
2m는 넘어보이는 돌담 위까지 흙먼지가 피어오르질 않나
담벼락 끄트머리에 피 묻은 손이 턱 올라왔다 질질 끌려 내려가기도 한다.
마치 공포 영화의 피해자가 어둠 속으로 질질 끌려가듯 단말마를 내지르면서.
"이토록 버틴 걸 보면 기초 단련은 참으로 잘 따라와 주었는데, 어째서…."
슬프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같이 들리는 사람 패는 소리가 살벌하다 보니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져서 무서울 지경이다.
노을을 배경으로 시작된 폭력은 달이 휘영청 떠오를 때 까지 계속되었다.
달이밝게 뜨고 앓는 소리를 배경 삼아 밤 하늘을 올려다 보니 어느새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 온 것이다.
"오늘은 어떻소?"
걱정스럽게 나를 내려다 보는 굴레를 베어내는 검과
내가 누워 있던 돗자리를 정리하는 김하은,
흙먼지를 털어주며 나를 부축하는이하린.
그리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처럼 얌전히 바닥에 묶여 있는 여제자.
'왜 저렇게 얌전한가 했더니….'
단아한 외모와 호리호리한 몸매, 나긋한 몸짓은 여전하지만
그 끔찍하리만치 압도적인 폭력을 보고 들은 뒤라 그런지 어째 위화감이 느껴진다.
"주화입마에 걸린 제자분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아직 정확한 원인은-"
이성을 잃은 제자를 폭력으로 조련하겠다는 생각도 그렇고
드라마에서나 들을 수 있는 사극풍 말투도 그렇고 꽤 고지식한 성좌구나.
그래도 그 고지식함이 제 멋대로 구는 꼰대스럽다는 건 아니니 다행인가.
개인의 무력이 우주함대와 맞먹는 사람이 꼰대가 되면 얼마나 끔찍할까.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슬쩍 굳어버린 내 표정을 다르게 오해했는지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뒤로 물러선다.
"크흠, 미안하오. 내 진전이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너무 격식없이 대하느라 무례를 범했군."
저 작은 몸으로 사람을 저렇게 팰 수 있다니.
굴레를 베어내는 검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그렇게 5일차가 지나가고, 다시 6일차.
지금 바닥에 쏟아부은 보석만 해도 어지간한 소규모 회사 재정을 갈아 넣지 않았을까.
편의점 알바생이 대기업 외손자 걱정하는 꼴이지만 어쩌겠는가.
내 눈 앞에서 운동장 바닥에 부어진 보석 가루가 벌써 100kg은 가볍게 넘은 것 같은데.
21세기 지구의 서민 감성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장면이다.
6일 내내 보석을 갈아 만든 마법진에 귀한 짐승을 제물로 바치다 보니
그걸 충당하기 위해 중간에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있었지만
제사 일정에 별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부디, 내 제자를 잘 부탁하오."
마법진 밖에서 크게 외치는 굴레를 베어내는 검과 이제는 익숙하게 제사를 진행하는 두 화신.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앞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담벼락과 투명 장벽으로 막혀 있는 저택이었다.
또 다시 헬기가 오고, 가고, 다시 오고, 가고, 또 돌아와서-
'그러고보니 이 것도 반복되는구나.'
벨트와 밧줄로 묶인 여제자가 담벼락 너머에서 개처럼 얻어 맞는다.
노을 질 때 돌아와서 달이 하늘 높게 떠오를 때 까지 사람을 패다니.
이즈음되면 폭력이 아니라 기술이나 기교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후우, 이를 어찌 해야 하나-"
그렇게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한탄과 함께 5일차에 보지 못했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6일차의 시작은 간단하면서도 임팩트가 있었다.
온 몸이 울긋불긋 멍이 든 제자의 목덜미를 쥔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정문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으니까.
눈두덩이부터 손 끝, 발 끝까지 전부 멍이 든 여제자의 꼴을 보면
검집으로 때린 게 아니라 페인트 붓을 휘두른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
검고 긴 생머리도 흙먼지에 엉켜 있다 보니 꽤나 예쁘장한 얼굴을 떠올리기도 힘들다.
"후우, 얌전히 있거라."
무슨 마대자루 던져놓듯 축 늘어진 제자를 툇마루에 적당히 던진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그대로 제자리에서 도약해 담벼락을, 지붕을 밟고 구름 저 편으로 사라진다.
아까 번제용 제물을 구하러 갈 때 보았던 허공답보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소매자락 펄럭이며 구름을 밟는 여인보다는
툇마루에 누워 미동도 없이 앓는 소리만 내는 여제자에게 시선이 향한다.
'주화입마에 걸린 상황이니, 여기서 살펴보면 되겠지.'
세상에서 제일가는 검객이 극찬을 한 몸뚱어리라 그런지
고작 몇 십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울긋불긋하던 멍이 다 빠졌다.
고통과 피로는 어디 가지 않았는지 옴짝달싹 못하는 건 여전하지만
흙먼지로 더럽혀진 옷자락 너머로 흰 피부가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살벌한 소리가 났는데 때리는 척 만 했을 리는 없겠지.
슬그머니 다가가 등 위에 손을 올렸다.
마력을 통해 감정을 읽고, 눈이 마주쳐 가벼운 생각을 읽는 것 처럼
이 곳에서 여제자를 매개체 삼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기 위해서.
마치 오래 전 보았던 영화의 명장면을 떠올리듯
단편적인 기억이 내 머리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여제자의 기억은 온통 굴레를 베어내는 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아이돌 지망생이 글로벌 스타를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
선망과 동경과 존경이 어지러울 정도로 뒤죽박죽 섞여 있는 상태.
'와, 저게 뭐야.'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굴레를 베어내는 검과 여제자의 첫 만남이었다.
중학교 체육관에서 죽도를 휘두르는 여제자와
그녀를 보기 위해 학교에 직접 강림한 굴레를 베어내는 검.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
죽도를 빼앗아들고 하늘에 휘둘러 구름을 조각하는 장면이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기억도 전부 잘 만든 영화 CG 같은 장면들 뿐.
'저게 검객이야 마법사야? 저러니까 사람들이 신앙심을 가지지….'
삼각파도에 배가 뒤집히기 직전 먹구름을 밟고 벼락을 타고 내려온 여인이 검을 휘두른다.
그러자 파도도 먹구름도 전부 갈라져 바다는 잠잠해지고 하늘은 맑게 개인다.
폭우 때문에 산사태가 일어나 톤 단위의 흙더미가 초등학교를 덮치기 직전,
소매자락 펄럭이던 여인이 양 손을 휘두르자 산등성이가 깊게 파여 나가며
충격파가 흘러 내려오던 흙더미를 초등학교 대신 사람 없는 야산 공터로 날려 보낸다.
인간의 몸으로 벌였다고 말할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상황.
어부들은 큰 절을 올리며 비싼 물고기라도 바치겠다며 술상을 올리고
초등학교에서는 교사의 인솔에 따라 나온 어린아이들이 삐뚤빼뚤하게 적은 감사 편지를 보낸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는 법.
기적이 반복 될 수록 여제자의 감정이 조금씩 변하는 게 느껴진다.
비유하자면 흙탕물 위에 떨어진 손수건…,
아니, 그 정도는 아니구나.
더운물로 샤워를 하는 화장실 안 휴지처럼
아주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젖어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게, 하지만 만져보면 확실하게 축축한 느낌이 들게.
시기심이나 질투는 아니였다.
느껴지는 것은 더부룩한 부담감.
이성을 잃고 키엑거리던 여제자가 조용히 입을 연다.
"저걸, 저걸 어떻게 따라가-"
"재능이 있다 있다 격려해 주시지만 정말 저게 된다고?"
"다른 사람들보다 잘 하는 건 맞아, 하지만…."
"진짜 내가 할 수 있을까?"
굴레를 베어내는 검은 대단했다.
대단해도 너무 대단해서 문제지.
검 한 자루로 태풍을 베고 해일을 베고 산사태를 베는 여자가
죽도 쥔 중학생한테 너도 할 수 있어! 라고 말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걸 믿겠냐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영혼이라 해도 결국 정신은 중, 고등학생 여자애.
힘들고 지칠 때 나약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질이 뛰어나서 주화입마도 강렬한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소심한지 그런 건 알 수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이거 그냥 자존감 문제 아닌가?'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칼질은 참 잘해도
애들 교육은 못 한다는 것.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검술이고 무공이고 비인부전이니 주화입마니 잘 모른다.
내가 겪은 세상은 칼 대신 펜을 들고 수험공부를 하던 평화로운 일상이니까.
물론 핵 전쟁 이전의 이야기.
하지만 운동선수던 예체능이던 연습생이나 훈련생을 키우는 것은 조금 안다.
애들 키울 때 컨디션 조절이나 자신감을 위해 이길 수 있는 상대와 붙인다는 것을.
내가 생각하기에 이 여제자의 심리 상태는
격투 게임 뉴비가 게임 시작하고 고인물들한테 10판 내내 처맞은 다음
자신을 후드려 팬 고수의 매드 무비를 보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내 경험담이기도 하지.
개처럼 얻어맞고 피 5%도 못 깎은 상태로
'너 재능이 있는데 연습하면 금방 랭킹 오르겠다?'
이딴 소리를 들으면 그걸 믿겠냐고.
뭔가 인터넷에서 찾은 콤보대로 버튼을 열심히 누르는데
전부 막히고 반격에 개처럼 처맞아 처참하게 패배했는데
'오, 콤보 좀 쓰네? 재능이 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게임에 정이 붙겠는가?
똑같은 0판 뉴비랑 붙어 한 두번 이긴다 해도
마음 속으로는 게임 좆 같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자신감이 생길 리 있나.
"힘들다…."
"진짜 내가 할 수 있을까?"
"검도는 취미였는데…."
"그냥 거절 할 걸 그랬나, 하지만 뭘 핑계로 대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여제자의 몸이
마치 모래로 변하는 것 처럼 바스스 흩어진다.
그 기괴한 장면에 잠시 놀라 몸이 움찔거렸지만
곧바로 이 공간이 꿈과 기억 사이의 어중간한 공간이라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저물던 달이 다시 떠올라 뒤로 물러나고
노을이 돌아와 밤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낮으로 시간이 감긴다.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온 여제자.
마당에서 검을 휘두르고 마보자세를 취하며 단련에 힘쓴다.
아무도 없으니 땀에 젖은 윗옷을 벗고 가슴을 출렁거리며 운동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러나 저택에 굴레를 베어내는 검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