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117화 : 굴레를 베어내는 검 3
힘들지만 시도는 가능할 것 같다.
고작해야 그 말 한 마디에 무릎을 꿇고 절까지 하려는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모습은 광기까지 느껴진다.
대체 저 여제자가 얼마나 찬란한 재능을 지녔기에 대륙 제일 성좌가 이렇게 저자세로 설설 기는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돈다발이나 재물을 싸들고 와서 고쳐! 한 마디만 해도 고쳐주긴 할 텐데.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잡아 죽인 괴물이 몇 마리며
그녀가 지금까지 대륙을 위해 괴물을 죽이며 구한 사람이 몇 명이겠는가.
그녀의 지위와 그녀가 대륙을 위해 해 왔던 헌신을 생각한다면
예약되어 있는 환자들을 무시하고 자기 제자를 우선 치료해 달라 땡깡을 부려도 들어줄 것이다.
아마 잡일을 도와주는 아카데미의 직원들도 그렇게 생각할테지.
'생각보다 소탈하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대륙 제일이라는 성좌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제자들이 무릎을 꿇는다.
이 모습에 이하린도 김하은도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
김하은이야 그렇다 치고, 이하린은 광적인 성좌의 신봉자.
성좌가 화신 앞에서 애원하는 모습에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른다.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무려 대륙 제일의 성좌가 직접 강림한 상황인데 아카데미가 꾸물댈 이유가 있겠는가?
일반적인 환자였다면 그저 김하은이 마력의 장막으로 감싸 안기만 해도 되겠지.
하지만 상대는 일반적인 환자가 아니다.
"번제는 뭘로 할까요?"
"금색 털, 흰 뿔을 지닌 숫양과 알을 낳은 적 없는 검은 암탉을 세 마리 가져와 주세요."
"14번 창고에서 흑요석 단검 가져왔습니다!"
내 강림을 위해 제사를 지냈던 날 처럼 사람들이 바삐 움직인다.
가끔은 창고에 없는 물건이 필요한지 난처한 기색으로 아카데미의 직원들이 다가오지만
바람처럼 휘잉 사라졌다 물건을 들고 오는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해결해주고 있었다.
화신이 한 명도 없고 포인트도 부족한 성좌라지만
대륙 최강이라는 이름이 우습게 볼 건 아닌지 이름만 들어도 귀해 보이는 물건이 툭툭 등장한다.
'어째 나 때보다 더 난리가 난 것 같은데.'
하긴 2년도 안된 초짜 성좌랑
대륙 최강에게 재능을 인정 받고 십 수년간 수련을 한 사람이 같을 리 없지.
오히려 저 난리가 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마법진을 사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이 적다면
제사 마법이 비주류에서 멈춰 있을 리 없겠지.
능력 밖의 일을 행하게 도와주는 대신 비효율적으로 많은 재물이 소모되는 것.
그게 지금의 마법진과 제사 마법이니까.
그래도 나의 강림제와 다른 점은 많았다.
제사를 돕는 사람들도 없고, 마법진 가운데에는 구속구를 벗고 깨끗히 씻은 여제자가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구속구를 풀면 날뛰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구속구를 벗기고 같이 온 일행이 씻기는 동안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마치 호랑이한테 핥아지는 강아지처럼
여제자는 주화입마에 빠져 미쳐버린 상태에서도 공포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피눈물 질질 흘리며 재갈을 짓씹던 귀신같은 형태는 온데간데 없이
물에 축 젖은 긴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동안 쭈구려 있는 모습이 불쌍할 지경이었지.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침을 꼴깍 삼킨 이하린이 새카만 단검을 들어올려 반짝이는 황금색 양털을 베어가른다.
붉은색이 아닌 황금색의 피가 기괴하리만치 높히 치솟아 오르자 검은 닭들이 불꽃에 휩쌓여 사라진다.
동시에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빛나고 김하은의 보라색 머리카락이 바람 한 점 없이 휘날린다.
그와 동시에 등장한 보라색 장막, 아니 장막으로 만들어진 아치형 문.
본능적으로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시야가 일렁인다.
게임 속 특수효과에 시달리는 모니터처럼 세상이 일렁거린다.
시야각이 멋대로 줄어들었다가, 늘어났다가 하는 기묘한 감각.
오목거울과 볼록거울을 제 멋대로 눈 앞에서 흔드는 기분은 언제 느껴도 익숙해지기 힘들다.
머리를 몇 번 휘휘 젓자 보이는 것은 동양풍의 대 저택.
동대륙처럼 아시아 국가를 대충 섞어둔 것 같은 풍경이다.
비전공자인 내가 나라를 특정하기는 힘들지만 사극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대 저택인건 확실한 상황.
"스승님, 기침하셨습니까?"
드르륵 소리와 함께 미닫이 문이 열린다.
방 안, 이불에 누워 있는 것은 굴레를 베어내는 검.
그렇다면 복도에 정좌를 하고 얌전히 기다리는 저 여자는 그녀의 제자겠지.
주화입마에 걸리기 전의 모습인가?
비녀로 단정하게 정리한 머리와 곱게 차려입은 도복을 보면
피눈물 흘리며 재갈을 잘근잘근 씹던 광인의 모습을 떠올릴 수 조차 없다.
여제자의 기억이라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나를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다.
이전, 불사르는 폭군의 기억 속에서 그가 말을 걸어와 얼마나 놀랐던가.
"오늘은 무엇을 할까요?"
"잠시 검을 나누고, 시장에 나가보자꾸나."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이게 악몽이 맞나? 하고 실수로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기억에 들어왔다는 의심이 들 정도.
스승과 제자가 정갈하게 밥상을 차리고, 운동을 하고, 검술을 배우며, 가끔 도시에 나가 장을 본다.
악몽은 커녕 두려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티클도 보이지 않는 상황.
가끔 성역으로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돌아가면 여제자가 무언가를 고민하지만
그렇게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평화롭기만 하구만.'
그런 내 감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작스럽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이제 슬슬 너도 진검을 휘둘러 볼 때가 되었지."
식사를 마친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그녀의 제자에게 말을 건다.
그릇을 치우던 여제자의 손이 잠시 멈춘다.
"정말이십니까, 스승님?"
"그래, 검을 배워 인명을 지키고자 하는 여장부가 어찌 손에 피 묻히는 일을 두려워 할까."
툇마루에 걸터 앉아 평온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구경한다 싶었더니 분위기가 확 바뀐다.
산골에 있던 전통 저택 앞에 어울리지도 않는 수송 헬기 같은게 날아오기 시작했으니까.
헬기에서 내리는 군복 차림의 군인들.
어디 전쟁터에서 직통으로 왔는지 화약냄새 풀풀 나는 총을 차고 있었다.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헬기에 올라타니 정원을 어지럽히며 헬기가 떠오른다.
꿈 속이니 나도 날아서 따라가면 되겠지, 싶어 발을 한 걸음 내디뎠지만.
'뭐야, 이건?'
퉁,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에 가로막혔다.
기억의 주인은 제 성좌와 함께 헬기를 타고 저 멀리 날아가고 있는데
나는 이 산골짜기 저택에 갇혀버린 것이다.
"아이 씨, 뭔데?"
주먹으로 허공을 쿵쿵 두드려 보고,
마력을 얇고 길게 뽑아 자물쇠 따듯 장벽을 쑤셔 보기도 했다.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상상해 타고 나가려도 해 보았고
굴삭기나 전동 드릴로 잠벼락을 허물어 보려고 해 보았지만 전부 실패.
모두가 떠나 텅 빈 저택에 홀로 남게 되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허탈함에 허공을 올려다보자, 그제야 검게 깨진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한 번으로는 안된다, 이건가?"
다시 시야가 빙글 돈다.
눈 앞에 보이는것은 범퍼가 박살난 자동차와 앞바퀴가 터진 오토바이,
날이 망가진 전동 드릴과 삽 부분이 사라진 굴삭기가 아니다.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 보고 있는 세 여인.
김하은과 이하린, 그리고 굴레를 베어내는 검.
"성좌님, 괜찮으십-"
"어, 어떻소?!"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이하린의 걱정 어린 목소리를 묻어버리고, 김하은의 막 벌어지던 입을 꽉 다물리게 하는 커다란 고함.
몸매도 호리호리하고 인상도 단아해 얌전해보이는 여배우의 상인데
어째 벌어진 입에서는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기분이다.
이 정도면 얘 성좌명에 '우레를 삼킨'을 붙여줘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
"미, 미안하오. 내 마음이 급해 또 실례를 저질렀소."
김하은의 앓는 소리를 들었는지 화들짝 놀란 굴레를 베어내느 검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외모도 덩치도 가냘픈 여인처럼 보이지만 몸에 새겨진 살기와 무의식중에 새어나오는 기운 때문인지
내가 호랑이 앞의 병아리가 된 기분이다.
그녀가 나를 살짝만 건드려도 몽마에서 몽마였던 것으로 변형되지 않을까.
그녀의 심신이 안정되지 않으면 나는 성좌가 아니라 시체(진)이라 봐도 무방하다.
"기억을 읽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면목이 없다는 것 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이야기를 좀 천천히 진행해야지, 안 그러면 흥분해서 또 고함을 지를 것 같아서.
말을 느릿하게, 몸짓도 나긋나긋하게 조금 섞어서 설명을 하니 다행스럽게도 조용히 듣는다.
'진짜 맹수 조련사가 된 기분이구만.'
기억 속으로는 성공적으로 들어 갔다.
다른 환자들과 다르게 전체적으로 양호해 보이는 상황이다.
하지만 주화입마의 원흉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여제자의 심상 세계에서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때문에 여러 번 시도해야 할 것이다.
제사 한 번으로 태운 제물들이 얼마인데 여러 번 시도해야 한다니.
솔직히 말하면서 조금 미안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군가의 연봉은 커녕 그 사람의 집까지 태운 것 같은데.
황금양이나 검은 불꽃닭처럼 내가 이름도 모르는 진귀한 동물도 그렇고
마법진을 그릴 때 갈아버리는 보석의 금액도 무시 못 할 테니까.
"그 정도야 당연하지! 세상 어떤 명의가 침 하나로 병을 낫게 하겠소. 희망이 있다는 걸 확정지어 준 것만으로 이-"
말을 이어나가다 말고 턱 막혀버리는 굴레를 베어내는 검.
아마도 이 김 뭐시기, 하며 자기 이름을 말하려다 막혔나보다.
검 한 자루로 세상을 호령하는 성좌라 해도 이름은 말 못하는 건가.
지난번 시들지 않는 거목과 대화를 나눌때 저렇게 말문이 막혔지.
"이, 한낱 칼잡이가 당신을 위해 검을 들 수 있소."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다시 말을 이어나가자 또 다시 히엑, 하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해보니 지금 나, 마법진 위에 누워 있구나.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세 개의 손이 내게 내밀어진다.
그래도 성좌인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손을 잡는게 맞겠지.
두 화신 중 한 명의 손을 잡으면 다른 한 명이 많이 무안할테니까.
단아한 인상과 호리호리한 몸매와는 다르게
그녀의 손바닥은 마치 대리석 조각과 같았다.
매끈하지만 나를 일으키기 위해 힘을 주니 세상 무엇보다 단단하게 느껴졌으니까.
"내 검을 걸고 맹세하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굴레를 베어내는 검은 손을 놓지 않고 말을 이어나간다.
"당신이 내 제자의 주화입마를 완벽히 몰아내 준다면-"
이하린 말고 김하은도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말을 듣고 놀랐는지
등 뒤에서 딸국질 소리가 두 개로 갈라져 이중주를 이룬다.
"당신의 적 하나를, 내 직접 베어드리리다."
정작 나는, 잘 이해를 하지 못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