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116화 : 굴레를 베어내는 검 2
굴레를 베어내는 검.
굳이 따지자면 그녀는 선협지 세상 출신이다.
무림과 무공이, 신선과 요괴가 존재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제일가는 검객인지라 끝까지 생존할 수 있던 실력파 성좌.
틀어박혀서 우연히 살아남은 나와 정 반대라고 볼 수 있지.
불사르는 폭군이 북대륙 제일의 성좌라고 불리지만
굴레를 베어내는검은 동대륙 최강의 성좌라고 불리는 것 또한 같은 이유다.
불사르는 폭군이 우주함대와 기갑병을 이끄는 사령관이라면
굴레를 베어내는 검은 달랑 칼 한자루 차고 그와 맞먹을 수 있는 성좌니까.
그 때문에 그녀가 한 말은 생각보다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화신이, 없다?"
말이 절로 더듬어질 정도로.
"그렇소. 이치를 논하고 검을 겨루는 데 계약이 무에 필요하겠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잘 만든 명검과 검을 휘두를 수 있는 상황이지, 요술로 만들어 낸 계약서 따위가 아니오."
굴레를 베어내는 검은 단 한 명의 화신도 거느리지 않고 있다.
화신들의 활동을 통해 얻는 포인트도,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는 권능도 없다.
다만 전생에서부터 단련해 온 검술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
그 것만으로도 그녀는 대륙 최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대륙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오. 이 아카데미만 해도 전생의 노파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와 내 제자가 되어달라 바짓가랑이를 붙잡겠지. 사내도 여인도 영혼이 찬란하게 느껴지는 재능을 지니고 있으니 인류의 미래가 참으로 밝게 느껴지오. 내 검술 외에는 까막눈에 가깝지만 그 쪽에도 재능 넘치는이들이 잔뜩 있을 것이고."
"그런데 치료 이야기는…?"
근데 그건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얼마나 대단한 성좌인지 설명하는거고.
그녀가 나를 찾아 온 목적은 하나 뿐인 제자의 치료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제자 하나를 드디어 얻었소."
말끔히 비운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어렵사리 말을 이어나간다.
그녀에게는 화신대신 제자들이 많았지만, 엄연히 따지자면 진짜 제자들이 아니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검술을 비롯해 다양한 무기술을 전수했다지만, 그건 그녀의 검이 아니었으니까.
그냥 아는 걸 가르친 사람들과, 자신의 기술을 가르친 제자의 차이일까?
무협지식 사고방식은 조금 이해하기 힘드네.
"참으로 찬란한 재능을 가진 아이였지. 그 때문에 내가 욕심을, 그래. 욕심을 조금 냈다네."
그녀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딱 한 단어로 줄일 수 있었다.
주화입마(走火入魔)
재능이 너무나 뛰어난 제자를 들였기에 욕심을 부린 굴레를 베어내는 검.
그녀는 제자가 자신과 같은 재능을 지녔다고 판단을 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건네주려 했다.
그 결과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제자가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다.
심상이 뒤틀리고 마음이 꺾여 광인이 되는 것이 주화입마.
어찌 보면 정신병이고, 어찌 보면 영혼의 질병이라 볼 수 있겠지.
"제자가 멋대로 굴다 심마가 들렸어도 스승인 내 잘못일지언데, 내 과욕 때문에 제자가 저리 되었으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하구료. 부탁하오, 고칠 수 있겠소?"
칼 한 자루 차고 세상을 호령하던 검객이던
대륙 제일이라 불리우며 명성이 날리던 성좌던
제자의 마음에 깃든 심마를 어찌 할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UFC 세계 챔피언이 핵펀치로 암세포를 때려 잡을 수 있겠는가.
"시도야 해 보겠지만…."
간절히비는 미녀의 모습에 알겠다고 장담하고 싶지만, 조금 생각해봐야 할 게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치료 한 것은 트라우마를 가진 환자들과 PTSD를 앓는 군인들.
비율로 따지자면 1:9를 넘어 5:95 수준으로 PTSD를 앓는 군인들이 대다수였다.
우리의 치료 방식은 악몽을 빼앗는 것.
정확히는 무의식의 영역에 박혀 있는 '두려움'을 삭제하는 일이다.
말만 들으면 쉽지만, 인간의 정신을 건드리는 일이니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간다.
예를 들어 전쟁터의 굉음과 폭음을 두려워하는 군인이 있다고 치자.
그러면 마력의장막으로 감싼 다음, 두려워하게 된 원인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는거다.
과장된 기억이 사라지며 치유받은 군인은 '별 거 아니었네' 하며 가볍게 넘길 수 있다.
별 것 아니지만 엄연히 따지자면 군인이나 화신의 기억을 왜곡하고 감정의 일부를 말살하는 작업.
재능 넘치는 김하은이 알아서 잘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만약의 사고로 약간이나마 삐끗하면 만화 속에서나 볼 법한 감정 없는 살인기계나
기억이 전부 사라져 백치가 된 전직 화신 같은 결과가 나와 버릴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화입마가 악몽이긴 한가?'
대충 들어보면 선협지 식으로 영혼을 수련하다 마가 끼어서 정신이 망가진건데.
악몽도 지성이 있는 존재가 꾸는 거지, 이미 정신이 박살나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백치가 되어 우리가 제거해야 할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가 하는 건 두려움을 제거하는거지, 망가진 영혼을 완벽하게 되돌리는 작업이 아니다.
"그래도, 부탁하네. 이제 이 방법밖에 없어."
곧이어 휠체어에 탄 여인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특이하게도 손과 발이 공포영화에서 봤던 구속복으로 묶여 있는 상황.
거기에 휠체어를 미는 세 사람도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운동장에서 느꼈던 감각이 또 다시 느껴진다.
'이게 살기?'
고작해야 손목만 묶인 수준이 아니다.
손등, 손목, 하완, 팔꿈치, 상완을 죄이는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 고리.
마찬가지로 목과 가슴 아래, 배와 허리, 다리와 허벅지와 무릎까지 꽁꽁 묶인 상황.
스승인 굴레를 베어내는 검과 다르게 가슴이 커다란지라 조금 음탕하게 보였지만-
'숨막혀….'
산발이 된 머리와 피눈물이 흐르는 눈, 재갈을 짓씹는 까득거리는 소리까지 섞이니
음탕한 생각은 커녕 이번에도 테이블 아래로 몸을 날릴 뻔 했다.
굴레를 베어내는 검은 제 실수를 알아차리고 곧바로 자신의 기운을 줄였지만
주화입마에 걸려 구속구에 꽁꽁 묶인 사람에게 그런 배려를 바랄 수는 없겠지.
"아, 이런…, 같은 실수를 반복할 뻔 했군."
작게 중얼거린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커다란 소매를 휘적이며 내 앞을 막아서기까지 고작 몇 초.
이번에도 눈이 따끔거리고 밀크티의 단 맛 대신 입 안에서는 비릿한 피내음이 느껴진다.
이하린도 육체파가 아닌지라 후들거리는 다리로 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선다.
확인을 하려면 나보다 김하은이 더 잘 하겠지.
의자 등받이에 올려진 이하린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니 창백한 안색의 그녀가 나를 내려다본다.
나야 시궁창을 구른 경험이 있지만 이하린은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
아니, 온실 속 화초라고 말하기에는 가족이 겪은 다사다난한 일이 좀 많긴 하지만….
"무슨 일이십니까?"
날 것 그대로인 살기에 노출되어서 그런지 평소의 빠릿한 눈치도 없어진 것 처럼 보인다.
"하은이에게 이리로 오도록 연락을 해 주겠니?"
하필 스마트폰 달라고 요청하러 가는 길에 만난 상황이니까.
마력의 실을 길게길게 늘리다 보면 성역이 아닌 곳에서도 메시지를 보낼 수 있지만
과학의 결정체인 스마트폰이 내가 사용하는 엉성한 메시지 마법보다는 빠르다.
대륙 제일의 성좌가 직접 강림한 상황인데 김하은이 눈치를 못 챌 리는 없다.
환자와 사용인들 사이에 파묻혀 있으니 사람이가장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라 볼 수 있으니까.
문자 한 통에 곧바로 호다닥 달려온 김하은이 휠체어에 묶여 있는 여인을 바라본다.
"어, 이거…. 조금은 힘들겠는데요."
마력의 장막을 마치 방탄조끼처럼, 아니 보호복처럼 온 몸에 감싼 김하은과
마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짐승처럼 재갈을 딱딱 씹어대는 여제자.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모습에 나는 약간의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감은 나보다 조금 더 날카로운 것 같았다.
"힘들다는 말은, 그래도 방도가 있다는 뜻 아니오?"
"예, 가능은 할 것 같습니다. 좀 오래 걸리고, 위험성도있긴 하지만요."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난 그녀가 어느새 김하은의 양손을 꼬옥 붙잡는다.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가까이 오자개장수 앞 누렁이마냥 얌전해진 여제자의 모습은 둘째 치고.
주화입마까지 치료를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김하은이 나를 슬그머니 쳐다본다.
이 타이밍에, 나를?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니?"
"예, 평범한 트라우마가 아닌것 같습니다. 다른 환자들처럼 가볍게 마력으로 짓눌러 꺼내버릴 수는 없고, 직접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마력의 양도 질도 나보다 우월한 김하은이지만,
반 몽마화신과 몽마 성좌의 커다란 차이점은 여전히 존재한다.
마력의 섬세한 컨트롤과 꿈 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
주화입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김하은이 아니라 내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걸까.
"제가 밖에서 마력으로 저 화신분의 몸을 제어하는 동안, 성좌님께서 직접 꿈을 다뤄 원흉을 제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저 여제자가 화신이 아니라는 걸 설명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이번에는 바람처럼 테이블을 뛰어넘어 내 곁으로 달려왔다.
그러더니 잘 정리된 흑단같은 머릿결이 흩날릴 정도로 머리를 콱 숙인다.
"부디! 부탁드리오! 이래뵈도 대륙 제일이라는 허명을 지닌 몸! 구명의 은혜를 입힌다 생각하시고 번거롭더라도 직접 손을 써 주실 순 없겠소? 나의 제자가 화신도 아닌 몸이라지만 검에 대한 재능 하나는 진짜라 자부하오. 이대로 떠나 보낼 수는 없소."
"고개를 드세요."
"부탁드리오!"
"""부탁드립니다!"""
어째, 몽마가 아니라 성자가 되어가는 것 같지만,
이대로 놔 두면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라 오체투지라도 할 것 같은 기세다.
휠체어를 밀고 온 세 사람도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제자였는지 이미 무릎을 꿇어 앉은 상황이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손 써보도록 할 테니 고개를 드세요."
그래도 대륙 제일의 성좌에게 인정 받은 화신이다.
그녀의 악몽을 내가 삼킬 수 있다면,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