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115화 : 굴레를 베어내는 검 1
불사르는 폭군의 전함이 아카데미 상공을 침범하여 제멋대로 헤집고 다닌 사건도 시간의 흐름 속에 묻혀버렸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게 아니라, 아카데미에 시선을 잡아끄는 두 명물이 생겼으니까.
이하린과 아침 운동을 함께 하는 리트리버와 양손으로 간식을 바치면 받아주는 거대한 고양이.
이하린과 김하은이 아카데미에서 놀고먹는 것도 아니다 보니,
그 두 마리의 전령은 제 마음대로 아카데미를 돌아다닌다.
옆 동의 생도가 정오의 햇볕 아래 운동장을 열심히 달리는 리트리버가 혀를 쭉 빼문 게 안쓰러워
시원한 냉수를 나눠 주었더니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추억의 물건을 물어 오더라.
어느 날 남자에게 차인 교관 하나가 장난삼아 커다란 고양이에게 공손하게 간식을 바쳤더니
다음 날 남자가 마음을 바꿔 고백을 받아주더라.
저 두 동물은 평범한 동물이 아니라 성좌님이 특별히 여기는 전령들이니 공손히 대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신념과 정의를 위해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훈련을 받는다 해도 피 끓는 청춘들.
성좌들의 관음과 교관들의 감시를 피해 사랑을 나누는 커플도 계속 적발되는데,
이러한 뜬소문에 관심이 없겠는가.
그 결과가 저 모양이었다.
“여기를 봐 주세요!”
“서대륙에서 공수해 온 귀한 햄입니다!”
“남대륙 화신들이 손수 만든 육포가 있어요!”
시원한 나무 그늘에 웅크리고 있는 커다란 고양이.
그리고 그 앞에 얇게 썬 고기나 육포, 소시지를 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
심지어 생도가 아닌 교관이나 교수들까지 그 인파에 뒤섞여 있었다.
무언가를 쫓아내는 고양이.
불행을 쫓아내는 고양이.
아카데미의 명물이 되어버린 녀석이 소시지 하나를 물더니,
벌떡 일어나 소시지를 준 여자의 어깨를 밟고 뛰어 어디론가 사라진다.
눈 좋은 몇몇이 그 검은 궤적을 따라가려 하지만 실패.
낙담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소시지를 빼앗긴 여성 생도만이 싱글벙글 어깨를 턴다.
‘지랄 났네, 진짜.’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자신을 스스로 집사니 하인이니 낮춰 부르는 걸 전생부터 알았다지만,
이 정도 되면 거의 아이돌 팬 사인회처럼 보인다.
하기야 불행을 사라지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행운을 불러오는 고양이라면 아이돌보다 대단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며 산책을 끝마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지난번 이하린의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확인하기도 귀찮았으니,
아카데미 쪽에 내 명의의 스마트폰을 요구할 생각이었으니까.
아카데미는 나름 대륙 연합인데 강림시킨 성좌한테 신분증과 스마트폰 정도는 쥐여줄 수 있겠지.
'지금까지 양보한 제물이 얼마인-'
한 걸음, 발바닥을 땅에 닿게 하면 안 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등골에 오싹함이 흐른다.
성좌가 되고 나서 느끼기 힘들었던 감각, 그러나 전생의 지구에서는 늘 함께하던 기분.
‘죽는다?’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 마력을 다리에 집중해 운동장을 향해 앞으로 뛰었다, 아니 굴렀다.
분신이 아닌 본체라느니, 성좌는 특별한 수단 없이는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는 지식은 상관없었다.
나름대로 단련된 직감이 좆되기 싫으면 뛰라고 사정없이 울부짖었으니까.
“어, 음, 미안하오?”
자세가 흐트러지고 과도하게 힘을 주어 흙바닥을 몇 바퀴나 뒹굴었다.
웅성거리는 생도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자욱하게 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내 등 뒤에 있었던 사람을 노려보았다.
소매가 커다란 동양식 전통 복장에,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길쭉한 칼.
“몽마라 하여 뒤를 잡았건만, 생각이 짧았던 것 같소.”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당황하는 미녀.
그녀는 한 손으로 고양이의 목덜미를 쥐고 있었다.
그 성질 사나운 놈이 꼬리를 말고 바닥을 향해 눈을 내려 깐 채로 얌전하게 예오오옹~ 하고 가느다랗게 운다.
평소의 묵직한 울음소리와는 너무나 대비되는 상황.
“사내의 몸으로 몸에 밴 살기를 눈치챌 줄이야.”
폭탄이 터진 것처럼 갑작스레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등골이 오싹하고 겨드랑이와 손에는 땀이 찼다.
몇 초 만에 입술이 바싹 마르고 불안한 감정에 눈도 깜빡이지 못하는 상황.
“음, 이 정도면 괜찮으신지?”
이해할 수 없던 공포가 사라지고, 주변 생도들의 중얼거림이 귀에 들어온다.
“어, 저거, 저 칼…?”
“아 미친, 가서 태림이좀 불러 봐라.”
“걔는 왜, 아니, 계약 성좌님이셔?”
“굴레를-”
멋쩍게 웃어 보인 여인이 양손을 활짝 펼친 상태로 들어 올린다.
덕분에 풀려난 고양이가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캬옹! 하며 도망친다.
그 검은 궤적을 아쉽다는 듯 쳐다보던 그녀가 내게 말을 건다.
“듣다시피, 나 또한 성좌요. 동대륙의 전선 일부를 담당하는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라 불리지. 초면에 실례를 저질렀군.”
지난달에는 불사르는 폭군이더니, 오늘은 굴레를 베어내는 검인가.
하기야 아카데미 중심부에서 화신들을 치료하고 있으니까.
이러다가 서대륙의 꺼지지 않는 등불과 남대륙의 표류하는 희망까지 만나겠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으니,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면 눈앞의 성좌는 불사르는 폭군처럼 대륙 제일이라 불리는 상황.
그런 성좌가 아카데미에 오면 당연히 생도고 교관이고 보러 오지 않겠는가.
“음,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겠소?”
“…그러죠.”
몰려드는 인파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처럼 보여 나는 그녀의 말대로 자리를 옮겼다.
‘내 성역으로 데려가야 하나?’
처음에는 적당히 식당이나 카페에 가면 되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운동장에서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우리를 따라 우르르 움직이는 생도들을 보니 마음을 바꿔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선을 지킨다지만 이 정도 주목을 받는다면, 카페나 식당은 갈 수 없어 보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수 백 명의 주목을 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임시 성역이 있는 건물을 향한다.
내 구역에 잘 모르는 타인이 발을 내디딘다는 것이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좌로서의 본능인지 몽마로서의 본능인지 모른다.
그래도 해가 없는 것은 사실이니까.
‘죽이려면 진작에 죽었을 테니까 뭐, 어쩔 수 없지.’
불사르는 폭군과는 다르게, 굴레를 베어내는 검은 개인의 무력으로 대륙의 최강이 된 존재.
나를 죽이고자 했다면 아까 내가 운동장을 뒹굴며 흙먼지를 뒤집어쓸 때 수 십 번은 죽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대단한 성좌가 나를 찾아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따라오던 사람들이 내가 임시 성역으로 향하자 뿔뿔이 흩어진다.
건물 안으로 들어와 내 거처의 문을 여니 이하린이 고개를 숙이며 우리를 맞이한다.
지금 이 시각이라면 그 늙은 교관과 한창 연구를 하고 있지 않나?
“차와, 커피. 어느 쪽을 선호하십니까?”
“그, 호흡을 먼저 가다듬으시오. 심장이 터질까 걱정되는군.”
달뜬 목소리로 묻는 이하린에게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허허 웃으며 농지거리를 던진다.
그제야 거칠어진 숨결이나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가 보인다.
얘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건물에서 여기까지 달려왔구나.
태연한 척을 하다 들통난 이하린이 발간 얼굴을 식히고 호흡을 가다듬는 동안,
나와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앉은 테이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렇게 대단한 성좌가 찾아오는 이유는 아마 누군가를 치료해 달라는 게 아닐까.
‘근데 다짜고짜 누가 아파요? 이렇게 물어보긴 좀 애매하지 않나?’
침묵은 테이블 위에 달달한 밀크티와 잘 우려낸 녹차가 올라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고 몇 번이고 머뭇거리는 걸 봤으니까.
이야기를 꺼내기 그리 어려운가 싶어 기다리는 김에 그녀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았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를 지닌 동양인 미녀.
피부에 잡티 하나 없고 몸매는 호리호리해서 칼잡이처럼 보이지 않는 수준.
전체적인 외모만 놓고 보자면 한창때의 여배우처럼 보인다.
“기별 없이 찾아와 다짜고짜 부탁하기에는 조금 무례해 보이나,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소.”
어렵사리 말을 꺼내는 모습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셨다.
익숙한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니 절로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기분이 든다.
옷자락에 흙먼지 좀 묻은 게 대수일까.
“그대와 그대의 화신은 악몽을 뽑아내어 정신을 치료한다고 들었소.”
“치료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녹차를 꼴깍 삼킨 굴레를 베어내는 검이 힘겹게 말을 이어나간다.
“내, 제자를 치료하고 싶소.”
“흐엑.”
등 뒤에서 시중을 들던 이하린이 그 말을 듣고 딸꾹질을 시작한다.
나와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시선이 그녀를 향하자,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입을 가리고 히끅히끅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허나 하나뿐인 제자를 스승 된 자로서 어찌 내칠 수 있겠소?”
…아마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제자는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나 본데.
어느 순간부터 나 대신 이하린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