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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화 〉111화 : 엘프의 일 3 (111/169)



〈 111화 〉111화 : 엘프의 일 3

동물 귀나 날개를 가진 수인족, 마법을 부리는 마녀와 마법사들,
귀가 뾰족하고 아름다운 엘프와 꿈을 다루는 몽마.
거기에 두 발로 걷는 늑대 인간이나 사람의 흔적은 찾아  수 없는 안드로이드나 기갑 병사까지.

그러한 것들을 잔뜩 보면서도 일상의 평온에 젖어 들어 있다 보면,
이 세상이 판타지 세상이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는 한다.

지금처럼.

“왓?! 뭐야?”

침실로  여유도 없이 거실에서 시작된 뜨거운 열락의 시간.
이불 한  없이 마룻바닥에 누워 나른함을 즐기고 있으니 갑자기 얼굴에 차가운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달콤한 냄새 때문인지 더욱 찐득하던 내 몸이 상쾌해 지는 것은 덤.

“어때, 시원하고 좋지?”

갑작스럽게 얼굴에 물이 뿌려졌지만 불쾌함은 없었다.
슥슥,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천장을 쳐다보니
길게 늘어난 나무 덩굴이 고무 호스처럼 물을 똑똑 뿌리고 있는 상황.

엘프는 자연 친화적이면 전부 좋은건가?

얼굴에  좀 끼얹어 졌다고 온 몸이 상쾌해지는 이상한 상황이지만,
냉수가 흘러나오는 나무 덩굴이나 엘프와 몽마는 뭐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던가.

그러려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몸으로 땀에 젖은 채로 누워 있었다 보니
쯔억- 하고 달라 붙은 피부가 떨어져 나오지만, 이 또한 불쾌하지 않았다.
바닥도 친환경적인 나무 바닥이여서 그런 걸까.

그래,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서로 알몸인 상태.

새하얀 피부의 금발 엘프 소녀가 나무 덩굴을 한 손에 쥐고
물방울을 손가락 끝으로 이리저리 튕기는 아름다운 광경에 넋을 놓을  했다.
그리고 엘프의 나신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고.

“그, 가릴  가져다 줄까?”

“왜, 실컷 봤으면서.”

“그거랑 이거랑 상황이 틀리지...?”

얼굴이 붉게 변한 그녀가 무안함을 떨쳐내려는 것처럼 차가운 물방울을 내게 보낸다.
체액으로 더렵혀진 알몸 위에 남이 멋대로 뿌린 냉수가 후두둑 끼얹어 지지만 불쾌감은 전혀 없었다.

다만 식물에서 흘러 나온 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차가워서, 아래쪽이 절로 쪼그라들었을 뿐.

“아, 작아졌...!”

몽마족 답게 거사를 치루고 나서도 우뚝 솟아 있던 물건이 힘을 잃고 고개를 푹 숙이는 광경이 신기했을까.
시들지 않는 거목이 쪼그라드는  물건을 구경하다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린다.

몽마의 육체도 엘프의 육체도, 냉수를 직접 끼얹어 버리면 시들기는 하는구나.
아직은 무패의 전적을 올린 내 아랫도리에 인간미를 느낄 있는 반응이었다.
나중에 서큐버스 성좌 같은 걸 만나지 않는다면 아마 무한에 가까운 정력은 시들지 않겠지.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새하얀 천이 툭 던져진다.
지난 번 농부들과제사를 지낼 때 입었던 엘프들의 전통 복장.
기다란 천을 어깨 위에 올리자 슬그머니 다가온 시들지 않는 거목이  뒤에서 나를 휘감아준다.

이게 튜닉인지 토가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쪽 어깨만 살짝 드러난 복장이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이불보다 커다란 천을 이토록 쉽게 휙휙 휘감아 버리다니.

세계수에서 애들 보면서 지내다 보니 누구 챙겨주는 거 하나는 참 잘하는구나.

그녀가 옷 입는 나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음흉한 생각을 하며 슬쩍 뒤 돌아 보았더니 이미 옷을 차려입은 빼어난 자태가 눈에 가득 담긴다.
천을 감아주며 슬그머니 허리춤이라도 껴안으려 했는데 이미 옷을 다 입고 멋들어지게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다니.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그녀를 쳐다보고 있으니, 뭔가 다르게 오해를 한 걸까.
눈치가  없는 편인 그녀가 슬그머니 다가와  손에 나무 덩굴을 쥐어준다.

녹색보다는 푸른색에 가까운 청록색 나무 줄기.
냉수가 콸콸 나오는 나무 덩굴 답게  끝으로 만진 덩굴과 이파리도 차갑다.


마치 냉장고 대신 냉동실에 잘못 넣어버린 야채가 떠오르는데.

“어때, 신기하지? 여름철 햇빛 아래에서도 차가움을 유지하는 얼음 덩굴이야.”

거 이름 참 직관적이네.

생각해보면 엘프들의 식물 작명법은 직관적이다 못해 적나라하다.

꿀  나는 수액이라 벌꿀 수액,
얼음물처럼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나오는 덩굴이니 얼음 덩굴 같은 식으로 이름을 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손 안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을 만끽하다 내 공간으로 돌아왔다.
수다도 충분히 떨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을 했으며,남자와 여자가 즐길 것 또한 실컷 즐겼으니까.

그래도 미뤄 둔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들지 않는 거목의 성역에서 떠나, 나는 충성스러운 송곳니에게로 향했다.
사실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

내 성역, 임시 성역, 시들지 않는 거목과 충성스러운 송곳니의 성역, 그리고 한예지의 집.

이유는 당연히 지난 번 구현했던 꿈 속의 존재 끄집어 내기.

운동으로 근육을 자극하면 근육이 자라듯이, 마력 또한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늘어난다.
내가 화신들의 꿈에 들어가서 야한 짓만 하면서 놀고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행동을 반복할수록 내가 다룰 수 있는 마력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치와와 3분 소환밖에 못 하던 내가 이제는 중형 트럭만한 괴물을 꺼낼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게 그...?”

“엉, 맞아.”

때문에 두통으로 고통받는 후유증이 며칠을 가더라도,
결국 마력의 심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지난 번처럼 기절해서 픽 쓰러지는  없이 유지되는 마력의 심장과
그 위에 덧씌워진 새하얀 늑대 인간의 껍데기.

술잔을 내려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충성스러운 송곳니와 새하얀 늑대 인간의 눈이 마주치더니,
천막을 걷어 올리고는 저 넓은 초원 어딘가로 휙 뛰어나갔다.

“이게, 무슨?!”

늑대 인간끼리는 통하는 것이라도 있던 걸까.
복날 개처럼 혀가 밖으로 삐죽 튀어나오는 것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입을  벌리고 있던 충성스러운 송곳니도 우다닥 밖으로뛰쳐 나갔다.


 새하얀 여성 늑대 인간은 충성스러운 송곳니의 꿈 속에서 꺼낸 존재.

그러니까 저 갑작스러운 달리기도, 충성스러운 송곳니가 무의식 속에서 꿈 꿔온 행위 아니겠는가.
저 멀리서 하얀 늑대와 회색 늑대가 보름달을 조명 삼아 초원을 마음껏 달리는 것이 보이다가,
이내 점처럼 작게 보일 정도로 멀어진다.

그리고 흐트러진 천막 너머로 보이는 것은 나를 노려 보는 샛노란 짐승의 눈동자들.

“음, 착하지? 멈춰?”

정확히는 내 무릎 위를 노리는 동물 권속들의 강렬한 시선이었다.

충성스러운 송곳니의 성역에내가 찾아  때 마다 고기 안주와 술, 음료를 준비해 준다.
때문에 내 앞에는 고기가 잔뜩 올려진 식탁이 있는 상태인데-

“어, 멈춰? 앉아? 손?”

어림잡아도 서른 마리는 넘어가는  같은 다양한 짐승들이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명백한 사냥 자세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몽마의 능력이라면 몰라도, 엘프의 능력은 조절할  모르는 상황.

불길한 예감이 노도처럼 몰려와 술병 하나와 고기 그릇 하나를 손에 들고 만세 자세를 취했다.

그 직후 몰려드는 각양각색의 털 뭉치들.

덩치를 이용해 양반다리 위에 턱 하니 턱을 걸치고 앉는 사모예드부터 그걸 머리로 밀어버리는 골든 리트레버.
 외에도 작은 덩치의 이점을 살려 덩치  대형견 밑에 깔리더라도 틈바구니로 파고 들어오는 녀석들이나,
하악질을 하며 냥냥편치로 인성질을 하는 고양이도 있었다.

털북숭이들의 난리통 덕에 무릎은 따듯하다 못해 더워지고,
손에  고기 안주는 내려 놓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천막을 밀치고 충성스러운 송곳니가 돌아왔다.

“야! 얘들  치워봐!”

그러자 이 빌어먹을 늑대 인간은 바닥에서 짓밟히고 있는 육전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내가 한 손으로 들고 있는 접시에서 고기만 몇 개 날름 주워 먹더니 후다닥 밖으로 달려 나간다.

“이 개새끼가 진짜!”

“엘프의 몸을 가졌으면서 왜 나한테 따지냐?”

펄럭이는 천막 너머로 놈의 외침이 들려온다.
대체 달밤 아래의 초원을 달리며 뭘 즐기려고 하길래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
손에 든 고기 그릇이 가벼워져 대충 방 구석에 내려놓자 10초도 지나지 않아 시야 너머로 사라진다.

‘원반처럼 보이나?’

나무 그릇이라 깨질 일은 없지만,
둥그런게 원반처럼 생겼는지 고기 냄새에 취했는지 이리저리 채이고 깨물리고 있었으니까.
그 털날리는 난장판 속에서 나는 눈을 꾸욱 감고 마력을 끌어 올렸다.

엘프의 향이 진득하게 묻어나는 몽마의 마력.

연보라색 실타래가 허공을 헤엄치니 시끌벅적한 소음이 싸악 가라앉는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격렬한 감정의 파동.
화신들을 비롯한 인간들의 감정이 속삭임처럼 들려온다면,
동물들의 감정은 음량을 최대치로 올린 고장난 라디오의 잡음처럼 귓가에 울린다.

찡- 하는 이명과 함께 몰려오는 두통.

이마를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으니 그걸 눈치 챈 걸까?

고기 냄새 잔뜩 나는 까끌까끌한 혓바닥이 뺨을 핥아대는 게 느껴진다.

라디오 잡음과 이명으로 대화를 할  없듯,
동물들과 대화는 할 수는 없지만 감정을 이해하고 명령을 내릴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이 자그마한 동물에게 명령하는 것이 꿈 속 존재를 끄집어 내는 것 보다 어렵긴 하지만 말이지.

가슴 속 가득한 분노를 마력에 담았다.

충성스러운 송곳니 이 새끼, 발정이 나서 나한테 지 권속 동물들을  떠넘기고 도망쳤다 이거지.
마치 젊은 부부가 아이에게 오락실 가라고 잔돈 쥐어주고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가서, 물어!”

손가락을  뻗고 소리를 치자 털뭉치들이 천막을 무너트릴 기세로 우르르 몰려나간다.

“이, 귀쟁이 새끼가아아아아-!”

꿈 속에서 분신 만드는 것, 성공.
엘프의 육체로 동물에게 명령하는 것, 성공.

나는 주저 없이 충성스러운 송곳니의 성역에서 도망쳐 나왔다.

등 뒤에서 구슬프게 들리는 한 쌍의 늑대 울음소리는 무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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