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108화 : 성좌의 일 3
일을 미루다 보면 언젠가 후회한다는 걸 알면서도 언제나 미루게 되지.
천성이 계획적이거나 근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으른 덕에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성좌로서의 두 번째 삶을 얻게 되었지만 아무튼.
범인이 아카데미를 떠났다는 걸 확인하고 휭 날아가 버린 불사르는 폭군의 함대를 본 뒤,
임시 성역을 떠나 내 성좌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그래, 몇 개 먹을래?”
나를 반기는 것은 나무 테이블 위에서 반짝거리는 악몽의 편린‘들’.
손바닥만 한 조각들이 백 개 넘게 쌓여 있으니 위압감이 상당하다.
성역 내부의 세계수의 가지가 몇 개 휘감아서 가져가도록 해도 바구니 하나를 꽉 채울 정도로 많다.
‘이걸 일일이 다 씹어 먹어야 하나...?’
김하은은 악몽의 편린을 끄집어낼 수 있지만, 소화 시킬 수 없다.
나는 악몽의 편린을 소화 시킬 수 있지만, 대량으로 다룰 수 없다.
언젠가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더 올라서, 입으로 직접 씹지 않아도 되면 먹으려고 모아 뒀는데.
환자 하나당 악몽의 편린 하나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악몽의 수준 차이도 전부 다르다 보니 하루에 몇 개 나온다고 딱 말하기 어려우니까.
그래도, 벌써 백 개 넘게 쌓일 줄은 몰랐는데.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편리 하나를 가져와 씹었다.
입안에서 느껴지는 청량한 마력의 흐름.
문제가 있다면 손바닥만 한 조각을 백 수십 개 삼켜야 한다는 거지.
‘매일 꼬박꼬박 먹을걸...’
어째서 방학 숙제를 미뤘다가 마지막 날 고통받았던 어린 날의 추억이 떠오르는 걸까.
밀린 과제를 하는 기분으로 스크린을 보며 하나씩 입으로 가져와 씹었다.
차라리 달거나 시거나 하는 맛이 있었으면 좋았으려나.
마치 박하처럼 입안을 시원하게 하는 감촉만 남기고 사라지기 때문에,
계속해서 치약을 씹는 기분이 든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면 편하겠지만
마치 살얼음이나 유리 조각처럼 단단하여서 몇 번 씹어야 하는 것도 있고.
‘턱 아파...’
분신이 아니라 본체로 씹어 먹다 보니 턱이 얼얼하다.
인간보다는 건강한 엘프의 몸이라지만 편린을 천 번 정도 씹다 보니 턱관절이 욱신거린다.
그래도 편린을 삼킨 보람이 있는지 마력의 흐름이 명백하게 빨라졌다.
정확히는 악몽 속에서 사물을 끄집어내는 속도가.
그러니까 성좌로서의 인지도와 포인트는 마력 다루기의 경험치를 올려주고,
악몽의 편린은몽마로서의 경험치를 올려주는 것 같네.
꼴랑 열 몇 개 먹을 때는 몰랐지만 백 개 넘게 삼키다 보니 명확해졌다.
그렇게 얼얼한 턱을 손가락으로 살살 풀어 주고 있자니,
세계수의 가지가 살그머니 내 눈앞으로 내려온다.
그러더니 가지의 끝자락에서 푸른 정령 하나가 튀어나오는 게 아니던가?
마치 시들지 않는 거목을 인형으로 만든 것 같은 자그마한 정령이었다.
“안녕, 내 목소리 들려?”
“응, 잘 들려.”
지난번에는 유지도 못 하고 사라지더니, 이번에는 대화가 가능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정령을 바라보았다.
정령의 눈을 바라보니 작은 유리구슬을 보는 것 같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우물쭈물 정령이 말을 걸어온다.
“저기, 괜찮아?”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나풀나풀 허공을 날아 다가오는 정령이 내 이마를 살며시 쓰다듬는다.
불편하던 속마음이 그토록 티가 나는 걸까, 아니면 그녀가 눈치가 좋은 걸까.
왜 그러냐고 모른 척도 못 할 것 같았다.
“아니, 좀 걱정되긴 하네.”
성역 바로 옆에서 살인 사건이일어났는데 걱정을 안 할 수 있나.
성좌를 노린 범죄라면, 그래서 나를 노리는 것이라면 걱정할 이유도 없지.
명백히 화신을노리는 범죄가 일어나니 가슴이 불쾌할 정도로 두근거린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이제 막 2년 차가 되어가는 내 화신들이 걱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괴물과의 전쟁에 나서는 게 무서웠던 여고생 한예지.
부모님과 함께 살며 누구보다 평범한 삶을 살던 이하린.
부모님을 잃기 전에는 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김하은.
마취총을 잘 쏜다, 제사 마법에 능숙하다, 몽마의 마력을 잘 다룬다.
이런 것들은 상관없이 사람은 쉽게 죽는다.
콘크리트 조각이나 철근 조각, 아니면 여성의 가느다란 손가락으로도 죽을 수 있는 게 사람인데.
“우리 애들은 좀 안전한 곳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태하다.
그리고 안일하다.
평화와 여자에 푹 젖어서 헬렐레 팔렐레 돌아다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강해질 방법이 눈앞에 있어도 고작해야 씹는 게 귀찮다는 이유로 미루고 있었으니까.
좆 같은 세상에서 고생한 건 맞지만, 쉬겠다고 너무 풀어졌다는 생각이 가슴 한구석을 콕콕 찌른다.
우울한 생각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 애 중에서는 다친 사람이 없으니까 상관없겠지.
파고들자면 끝없이 반복될 자기 혐오의 굴레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애써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 앞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정령에게.
“그래서, 무슨 일로 왔어?”
슬그머니 화면을 보니 벌써 해가 지려고 한다.
정신을 놓고 멍하니 편린을 씹고 마력을 점검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구나.
※
옅은 숲 향기 나는 나무 탁자. 달콤한 향 폴폴 나는 따스한 차.
그리고 고소하면서도 쌉싸래한 맛이 나는 다양한 다과들.
언제 찾아와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 같은 공간에
식물들도 잔뜩 있다 보니 엘프의 육체가 곧바로 나른하게 풀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아니, 그 전에 뺨에 와 닿는 감촉이 너무나 보드랍다.
“괜찮아, 다 괜찮아.”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녹일 듯 살살 나를 얼러주며, 동시에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얼떨결에 허벅지를 베고 누워 뺨과 머리를 쓰다듬어지고 있으니까.
악몽의 편린도 전부 섭취했겠다,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단련하겠다는 생각이 사르르 녹아서 사라진다.
‘이게 몽마식 단련 아닐까?’
충성스러운 송곳니를 위한 분신 제작을 시도하려 했던 것 같은데, 지금 그딴 게 중요할 리 있나.
테이블 위의 차가 식던지 말든지 내 목 언저리를 살며시 눌러
제 허벅지를 베게 해 주는데 이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생각된다.
“누구나 처음에는 미숙한 법이야. 그리고 대부분의 성좌도 처음에는 안락함에 젖어 푹 쉬거든. 너만 그러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까지 위로를 받을 일은 아니다.
부모님께 효도하기도 전 세상이 멸망했을 때부터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던가.
세상에 하나 남은 친구가 크리쳐에게 물려갈 때 구하지 못한 일,
사소한 다툼으로 살인이 일어나 생존자 무리가 와해된 일,
처음으로 살인을 하고 크리쳐를 죽이고 아는 사람이 죽어 나가고-
그래도 나는 살아 있었다.
험상궂은 외모와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는 터프한 멘탈을 지녔기 때문일까?
고립된 공간에서 메말라 죽어가는 이들이 겪는 정신병이 내게는 딱히 찾아오지는 않았으니까.
정신적으로 조금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었어도 환각을 보고 크리쳐를 숭배하며 자해와 식인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이 너무 나른해서 시들지 않는 거목의 걱정을 덜어 줄 수가 없었다.
그녀 또한 어린 소년 소녀들과 세상에 남겨진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듣고 싶은 말만 쏙쏙 골라서 나긋나긋하게 얼러주니 어리광부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첫 경험 때, 눈도 제대로 못 맞추길래 어색함이 몇 주는 지속할 줄 알았는데.
어찌 알았는지 이렇게 후다닥 달려와서 나를 챙겨주다니.
‘아니구나, 아카데미에서 그 지랄이 나면 누구나 알겠지.’
지켜보고 있던 성좌가 몇 명이고,
태양을 가리며 아카데미로 향하던 우주 전함을 목격한 시민이 몇 명이겠는가.
당연히 농부들과 드루이드의 성좌인 시들지 않는 거목도 알 수 있겠지.
아카데미에 강림한 성좌는 나 하나뿐이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내 성역 근처에서, 화신 하나가 죽었어.”
그래도 일이 터지고 하루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녀도 정확한 이야기는 모르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려 할 때마다 손가락이 부드럽게 이마를 눌러오기에
포기하고 그대로 누워 설명을 시작했다.
“정말? 그런 이유로 화신을 죽였다고?”
“그래, 솔직히 믿기지는 않았는데 어쩌겠어. 그거 때문에 불사르는 폭군이 직접 아카데미까지 온 거야.”
“전령을 보낸 게 아니라 직접 온 거야?”
“그렇다던데? 아카데미에 온 함선이 기함이라고 들었어. 전령 대신 친위대들이 득실득실한 것도 봤고. 왜 그렇게 크게 움직이나 했더니 피해자가 친위대의 가족인 것 같더라.”
죽음에 익숙한 나와 달리, 시들지 않는 거목은 죽은 사람으로 수다를 떨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눈을 살며시 감고 나를 토닥이는 손길이 조금 느려지는 모습에 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여기서 내가 말할 ‘지난번’이라 함은, 나와 그녀의 첫 경험밖에 없다는 걸 바로 눈치챘기 때문일까?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내 눈꺼풀을 가려버린다.
“저기?”
“그런 거, 말하지 마아...”
지금 눈을 떠서 감정을 읽을 수 있다면, 아마 그 색은 분명히 연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으리라.
힘을 줘서 치워낸다면 손을 치울 수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삐져버릴 것 같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정말, 내가 누난데 놀리기만 하고.”
눈이 가려진 상태에서, 다른 한 손이 살그머니 아래로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달콤하고 뜨거운 한숨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