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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화 〉105화 : 몽마의 일 3 (105/169)



〈 105화 〉105화 : 몽마의 일 3

재능 없는 나도 천천히 성장하는데, 재능 있는 화신들이야 당연히 성장하겠지.
김하은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한예지와 이하린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사격과 저격에 재능을 지닌 한예지는 그 성장세를 직장에서 보여준다.
특수 제작된 마취총 한 자루에 특성을 고려한 뭉툭한 바늘 다트만 있으면 어지간한 범죄자를 전부 제압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제사 마법에 재능이 극단적으로 쏠려 버린 이하린은-

“그러니까, 다른 제사를 올려도 된대도?”

“하지만 허락을 받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임시 성역에서 오늘도 내게 넙죽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임시 성역에 내려오게 되니 생각하지도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부작용이라 하면 조금 과하고, 맹점? 정도로 표현할 수 있으려나.

이쪽 세상의 제사는 본디 인간들의 세상에서 성좌들의 성역에 역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마법.
성좌들은 포인트 소모 없이 인간 세상을 내려보며 메시지를 보낸다.
반대로 인간이 성좌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면 전에 봤던 것처럼
순금 덩이에 번제용 제물 등 어마어마한 것을 지불해야 하고.


그런데 나는 지금 인간 세상에 아예 강림해 버렸다.


그러니까 이하린이 내게 제사를 올릴 이유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내게 선물을 보낸다면 전령이나 화신을 보내 직접 건네주면 되지,
이하린에게 연락해 제사를 올릴 이유가 뭐 있겠는가.

운동해야 근육이 느는 것처럼, 마력도 마법 실력도 사용해야 늘어난다.

제사 마법의 실력을 올리려면 제사를 올려야 하는데,
공물을 받을 내가 이하린 숙소 옆에 떡하니 강림한 상황.


“하지만...”


“오늘 하지만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세어 볼래?”


내게 도움이 되려면 다른 성좌에게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모순적인 상황.


한예지라면 시키셨으니 한다고 대답할 거고,
김하은이라면 효율적으로 장사 할 방법을 찾겠다고 나서겠지만
상대는 이하린이다.



그러면 다른 성좌에게 제사를 올려야 하는데
광기에 가까운 충성심으로 정신무장을 한 이하린이쉽사리 받아들일 리 있나.
제사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내게 보고를 하러 와서 넙죽 고개를 박는다.


솔직히 말해서 절이라는 거, 받는 입장이 되니 생각보다 부담스러웠다.

 오십 넘긴 대학생이 누구에게 절을 받겠는가.
살려달라고 발목 붙잡고 비는 사람은 있어도 정중하게 올리는 절을 받아 볼 일이  있겠냐고.
몸까지 섞고 정이  또래의 여자가 고개를 박는 모습을 즐기기는 힘들었다.

권력 지향적이고 좀 오만한 사람이면 이런 모습을 좋아하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이하린을 어르고 달래 보냈다.
다른 성좌를 위한 제사는 전에도 몇 번이고 했던 일인데 지금까지 허락을 받으려 들다니.
 모습이 이하린답다면 답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아무리 허락을 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가보다.

그렇게  허락을 받은 이하린이 제사를 올리러 가고,
김하은은 환자들의 악몽을 빼앗기 위해 가니 시간이 조금 빈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김하은을 따라 환자들의 악몽을 수집하러 가야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엘프 특유의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타박타박 걷다 보니 어느새 건물 뒤의 자그마한 숲.
숲이라 부르기보단 정돈되지 않은 부지라 불러야 하려나.

나무와 수풀이건물과 운동장에서의 시선을 가려 주는 곳이라 학생들이 밀회의 장소로 삼는 곳으로 왔다.

‘내가 여길 왜 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잡생각을 하다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나무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엘프의 몸이라서 그럴까, 숲이라 부르기엔 작고 공원이라 부르기엔 정돈되지 않은 야트막한 언덕이
마치 임시 성역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진다.

가꾸지는 않아도 사람들이 지나다니기는하는지 자연스럽게 난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허벅지까지 자란 수풀이 있고, 햇빛을 가려  나무도 있다.
이름 모를 야생화와 빨갛고 검은 나무 열매들까지.

자그마한 언덕임에도 이토록 분위기가 좋으니 눈이 맞은 청춘 남녀들이 이쪽으로 오는 것이겠지.


내 말이 맞는다는 것처럼,  앞에서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학생들이라면 한창 수업을 들어야 할 시간인데 이런 시간에도 밀회를 하다니, 참 대단하다고 봐야 할까.
나 말고 다른 성좌들도 이 아카데미를 구경 하고 있을 텐데 용감하기도 해라.

“아이, 참, 너무 급한  아니야 누나?”

간드러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발소리를 죽였다.
아양을 떠는 남자의 목소리가 기분 나쁘지만, 원초적인 호기심이 결국 승리하고야 만 상황.
나뭇가지를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빼지 말고, 누나 급해...”

키가 꽤 작은 남자와 어깨가 떡 벌어진 여자.
둘 다 예쁘고 잘 생기긴 했다는 생각과 함께 조금 역겹다는 생각이 든다.
남녀 역전 세계에서 ‘남자다운’ 남자를 하루 이틀  것도 아닌데  이런 기분이 들까.


가슴 한편이 아려오는 것 같은 생리적인 혐오감.


이해할 수 없는 감정적인 반응에 천천히 숨을 내쉬며 기척을 숨겼다.

“아으, 정마알~ 한 시간밖에 없긴 한데...”


간드러진 콧소리를 내며 몸을 비트는 남자와 조금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 몸을 더듬는 여자.
이쪽 세상에서는 평범한 상황이겠지만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불쾌감이 느껴진다.

마치 지하 터널에서 산란 중인 크리쳐를 발견한 기분.


‘뭔가 있나?’

마법과 이능이 존재하는 세상이니, 갑작스러운 이상 반응에도 무언가 초자연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능이 이끄는 대로 마치 엿보기 범처럼 근처에 있는 나무에 몸을 숨기고  남녀의 애정행각을 훔쳐보았다.

“누나, 손이 너무 야한 거 아니야?”

“너 때문인데.”

‘내가 뭘 위해 이런  보고 있나...’


빵뎅이를 씰룩거리며 아양을 떠는 남자의모습을 보면
아무리 미남이라 해도 역겨운 건 어쩔 수 없는지라 자괴감이 살짝 밀려오지만,
본능은 계속 숨어 있으라 말하는 상황.


여자의 손이 슬금슬금 남자의 바지춤으로 향하는  보다 문득 깨달았다.
뭔가 마법이나 초능력 같은 게 엮였다면, 마력으로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아직도 적응이 덜 되었다는 생각과 동시에 눈에 마력을 집중한다.
허공에 연보라색 실오라기가 바람 따라 흩날리는 거미줄처럼 느릿하게 퍼져나간다.


그와 동시에 보이는 것은 숲속을 가득 채운 검은 연기.

“누나, 좀만 천천히, 응?”

남자의 혓바닥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매연이었다.






작은 언덕을 가득 채울 정도로 넓게 펴진 검은 연기.


그게 무엇인지, 그 남자가 누구인지는 밝혀내지 못하고 임시 성역으로 돌아왔다.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즐겁게 지내는 커플한테 들이닥쳐 ‘너 누구야? 이건 뭐고?’라며 따질 수는 없으니까.

풀숲에 누워 아마조네스 자세로 여자에게 쿵쿵 내리 찍히는 상황에 튀어 나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남자 엉덩이가 그렇게 적나라하게 보이는 자세를 계속 보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곧바로 임시 성역으로 돌아온 상황.

솔직히 말해서,  남자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다.

굳이 잘못을 따지자면 수업을 땡땡이치고 애인과 시간을 보낸 점?
그거야 아카데미 교관들이 벌점으로 알아서 처리할 일이고.

생리적으로 혐오감이 든다던가 역겨워서 조금 화가 나는 일 같은 건 내 개인적인 감정 아닌가.


이게 남자 알궁둥이를 봐서 역겨운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예전 세상처럼 수틀리고 기분 나쁘다고 등허리를 쑤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검은 안개는 성좌가 못 보게 만드는 마력 장막인가?’


더군다나 검은 안개라 하니 화신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성좌의 관찰을 방해하는 기술이 떠오르지 않나.
성좌들에게 보이지 않고 애인과의 밀회를 즐기기 위해 권능을 발휘한 거라면 내가 더 할 말이 없지.

그 권능도 결국 성좌가 화신에게 선물하는 건데, 성좌가 자기 화신에게 준 권능을 내가 뭐라고 따질 수 있을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혐오감과 역겨움은 뭐지?
머릿속에 있는 불사르는 폭군의 지식에도 딱히 정보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몽마와 관련된 게 아니라 엘프와 관련된 일이거나, 아예 이쪽 세상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 같은데.

답을 알 수 없지만, 마음 한구석을 찝찝하게 만드는 문제.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 때문에 소파에 추욱 늘어져 있는 모습이 신경 쓰였을까?
일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하린이 자연스럽게   뒤에 선다.
목덜미를 어루만져오는 부드러운 손아귀가 기분 좋게 근육을 꾹꾹 눌러온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어째 마사지 실력이 날이 갈수록 늘어난단 말이지.


“걱정 해 주는 거니? 조금 신경 쓰이는  있어서 그렇단다. 혹시 검은 안개처럼 보이는 마력을 아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하린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조금 곤란하다는 것처럼 어렵게 말을 하는 그녀.


“알긴 아는데, 안개와 닮은 마력 패턴은 너무 흔해서 전부 말씀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은신 같은 계열부터 수 속성 은총이나 치유까지 안개는 아주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요.”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  너무 많아서 전부 말해줄 수 없다는 게 이하린답다고 생각되니 기분이 좀 풀렸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에, 귓가에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고운 목소리까지.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성좌와 화신의 권능을 취향 삼아 공부하는 이하린이다 보니,
좋아하는 주제가 나왔다고 곧바로 입에 시동이 걸린다.


말솜씨가 나쁘지 않은 그녀다 보니 화신의 권능을 설명하고
관련된 일화까지 설명하는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니까.


뒤늦게 일과를 끝마치고 슬그머니 다가온 김하은도 이하린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김하은이 챙겨온 시원한 마실 것과 씹을 거리, 멈추지 않고 어깨를 주물러주는 탄탄한 손.
성좌와 화신이  대륙에서 벌인 재밌는 이야기까지.

나른하고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내가 느꼈던 생리적인 혐오감과 불쾌함은 물에 녹아내린 솜사탕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카데미에서 시체 한 구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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