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98화 : 성좌, 자그마한 악몽 2
가검을 뽑아 들고 내가 지나갈 통로를 만드는 기사들 앞에 서자,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명예를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
가장 앞에 선, 내가 치료했던 화신이 선창하자 뒤에 사열한 기사들이 우렁차게 따라 외친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다.
기사여서 그런지, 남자에게 꿀리지 않는 떡대들이 모여서 시끄럽게 구는데 어찌 시선이 안모일까.
부담스러운 통로를 지나야 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통로 너머에 이하린과 환자였던 화신 하나가 보여 걸음을 내디뎠다.
나와 내 뒤를 따르는 김하은이 지나가면 기사들이 검을 내린다.
“이게 무슨 일이야?”
“오셨습니까, 성좌님.”
마법진을 점검하고 있어야 할 이하린과 환자들의 악몽을 처리하고 있어야 할 김하은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취미 이상의 집착을 보여주는 이하린과 마력 모으는 것에 눈이 뒤집힌 김하은이 보여줄 만한 모습은 아닌데.
왜 이 시간에 여기 모여 있을까.
뭔가 큰일이라도 벌어진 걸까?
그리 생각하다 내 등 뒤로 정렬하는 기사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하긴, 이 정도로 화신이 모여 있으면 그게 큰일이지.
“성좌님을 뵙습니다.”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여성이 구불구불한 금발 머리를 뒤로 슥 넘기더니, 자연스럽게 내 앞에 무릎 꿇는다.
그 모습에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며 손등을 내미니 스치듯 말 듯 가볍게 입을 맞추는 그녀.
살면서 무릎을 꿇은 여성에게 손등 키스를 받는 일도 생기는구나.
“당신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갚기 위해,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눈에 마력을 집중했다.
저 뒤에 정렬해 있는 기사들이 은은한 연보라색 마력에 휩싸여 있는 게 보인다.
저 기사들도 전부 우리가 치료해 준 환자였다는 뜻인가.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의 화신답게, 뭔가 미사여구를 장황하게 붙여 이야기를 시작하는 여성의 말을 들어보았다.
“하해와 같은 자비심 덕분에, 눈을 가리고 귀를 막던 더러운 미혹이 사라졌습니다. 한낱 기사에 불과한 제가 당신께 바칠 수 있는 것은 전장의 영광뿐. 저희가 감히 자색 깃을 올리고 전장을 누벼도 되겠습니까?”
물론, 듣는다고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정중하게 내게 질문하는 화신과 그 뒤에서 가검을 들고 경례를 할 준비를 하는 기사들.
이 와중에 그게 뭔 소리냐고 되물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좀 맞춰 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게 무슨소린지 아니?’
마력을 담아 내 화신들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래도 몽마의 격이 올라가니 상점에서 판매하는 기술을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어 다행이다.
기대했던 대로 이하린이 냉큼 대답한다.
‘성좌와 서약을 맺은 기사 중 특별한 존재들은 전쟁에 나서 공적을 올릴 때, 영광을 바친다는 명목으로 추가 포인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마 치료비로 그 추가 포인트를 성좌님께 바친다는 것 같은데요.’
소곤소곤, 그녀 역시 마력을 담아 내 귓가에 속삭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기다리는 사람 앞에서 보일 행동은 아니지만 어쩌겠는가.
뭔 소린지 알아들어야 허락을 하든 거부를 하든 반응을 보일 수 있는데.
아무튼, 치료비를 명목으로 포인트를 지불 하겠다는 거 아닌가?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알겠노라 고개를 살짝 끄덕이니 다시 손등에 부드럽게 입술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전에 들었던 따닥, 구둣발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20명은 되어 보이던 기사들이 전부.
‘그러고 보니 저 메이드나 집사에 대해 물어볼 걸 그랬나.’
한 명도 아니고 기사단을 통째로 들고 옮기는 메이드라니.
뒤늦게 호기심이 고개를 치켜들지만 이미 기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오늘의 손님맞이는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찾아온 손님이 몇 분 더 있습니다.”
발걸음을 돌리려는 내게 들려오는 이하린의 목소리.
오늘이 무슨 날인가 싶어 두 화신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아카데미 건물 내부에 있는 응접실로.
김하은이 문을 열고 이하린이 내가 먼저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선다.
“...?”
열린 응접실 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강철의 대가리.
그러니까, 앉아 있어도 올려 봐야 할 정도로 커다란 금속 슈트가 하나.
“이건 또 뭐...?”
취이익 소리를 내는 거대한 기갑 병사는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신장 2.5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기갑 병사.
취이익 소리를 내는 엔진음과 함께 거대한 강철의 손아귀가 내게 무언가를 내민다.
금속 장갑판에서 화약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게, 저 갑옷 자체가 강력한 무장으로 보인다.
머리 한 구석의 지식이 외친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친위대가 왜 여기에 있냐고.
불사르는 폭군의 기억 속에서, 황제가 잠든 냉동 캡슐 곁에서 수명이 다할 때까지 호위를 서던 갑옷이다.
1년 365일 중 갑옷이 고장나지 않으면 저 투구를 벗지 않는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괴물.
“제가 받아보겠습니다.”
그 괴물과 같은 화신이 서신을 내미느라 거대한 주먹이 내 앞에 내밀어진다.
그 행동을 보고 등 뒤에 서 있던 김하은이 냉큼 나서서 나 대신 받는다.
내 머리는 물론 우리 셋의 머리를 한 번에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은 강철의 손.
그리고 그 커다란 강철의 손에 맞먹는 커다란 두루마리.
김하은이 두루마리를 위아래로 쫘악 펼치자 익숙한 마력이 느껴진다.
마력의 잔향임에도 불구하고 쿵쿵, 미쳐 날뛰는 심장 소리나
폭탄의 폭발음처럼 두근거리는 모양새가 제 주인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불사르는 폭군, 께서... 보내온 서신입니다.”
가장 오래된 성좌이자 가장 강력한 성좌로 손꼽히는 것이 불사르는 폭군.
그런 거물의 서신은 이하린과 김하은도 예상하지 못했는지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반대로 서신을 들고 온 거대한 기갑 병사는 서신을 건네주고선 미동도 없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불사르는 폭군께서...”
말을 이어나가던 김하은의 목소리가 뚝 끊긴다.
두루마리에서 시작된 마력의 폭풍 때문에.
눈이 아플 정도로 붉은 마력광이 휘몰아치자 뒤에 서 있던 이하린이 급히 나를 껴안는다.
번쩍거리는 마력의 폭풍에서 오직 나와 저 기갑 병사만이 침착하다.
- 제대로 전달이 되고있겠지. 흠, 내가 꽤나 총애하는 아이가 고작 서신 하나 못 전할까.
왜냐하면, 마력광이 몰아치기 직전부터 폭군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리기 시작했으니까.
※
고래 앞에서 맨몸으로 던져진 인간의 기분이 그러할까.
흔적만으로 두 화신과 성좌 하나를 짓누르는 강력한 마력의 폭풍.
이 와중에 김하은은 뭔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치료를 때려치우고 수련실로 달려간다.
그리고 나 또한, 복잡한머리를 정리하기 위해 임시 성역으로 돌아왔다.
‘왜 나한테 잘 대해 주는 거지?’
폭군이 내게 보낸 두루마리는 평범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마력 파장을 통해 뇌에 강제로 주입되는 지식과 정보.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드림 워커’라불리는 미래 몽마들의 지식을 알게 된 것처럼, 이번에도 정보를 보내온 것이다.
마력을 다루는 법, 꿈을 만드는 법, 그리고 꿈속에 있는 걸 끄집어내 현실로 구현하는 법.
하나같이 포인트로 구매할 수 없는 중요한 정보들.
은혜를 갚는다는 명목도 아니고, 여성이 내게 반해 구애하는 것도 아니다.
설마 아내가 죽고 미쳐버린 남자가 남색에 눈을 떴다고 생각하기는 힘들고.
지고지순한 순애 때문에 오히려 미쳐버린 남자.
그리하여 그 광기로 백 수십 개의 행성을 불태운 인류의 황제.
그런 남자가 아내가 죽은 슬픔으로 동성애에 눈을 떠서 내게 치근덕거린다?
삼류 야설도 그렇게 쓰면 5700자의 편지지로 우편함이 가득 차리라.
아닌가? 전생에 봤던 웹 소설 중 막장은 더 심했던가?
‘일단 주니까 받는데...’
그래도 황제는 황제였다는 걸까, 주어진 선물이 딱 심리적 저항선 턱 밑까지 올라와 있었다.
향수나 손수건, 보석 목걸이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귀하지만
왜 이걸 내게 주냐며 겁을 먹고 거절할 정도는 아닌 선물이니까.
기억을 더듬으며 허공에 마력을 뭉친다.
이 세상의 ‘남성성’ 답게, 몽마인 내 특기는 섬세한 마력 운용에 가깝다.
한예지처럼 육체를 보조하여 사격 솜씨를 올리는 것도,
이하린처럼 기억력을 강화하여 마법진을 복사기처럼 찍어 내는 것도,
김하은처럼 압도적인 마력의 출력을 보이며 남을 흉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타인의 악몽을 고대로 베껴오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불사르는 폭군이 내게 준 지식은, 악몽이 아닌 것을 베껴올 수 있도록 나를 돕는다.
연보라색 마력의 실이 실타래처럼 동그랗게 뭉친다.
만들어 내는 것은 하트 모양으로 귀엽게 변한 심장.
만화에서 심장을 하트 모양으로 대충 그려둔 것처럼 두근거리는 하트를 조각한다.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 마력이 들어오고 나갈 곳을 만들면서.
심장 위에 덧입히는 것은 혈액 대신 마력이 흐르는 혈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두근두근 심장 박동에 맞춰 꿈틀대는 보라색 혈관은 참으로 징그럽게 보인다.
색상이 곱상해서 피가 아니라 보석처럼 보인다- 이런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잠시 등장하는 악몽과 달리, 이것은 영구적으로 살아갈 늑대 인간의 혈관이니까.
마치 인체 해부도를 머리한 구석에 펼친 것처럼
모세혈관조차 하나하나 표현된 혈관 덩어리 위에 뼈와 근육, 새하얀 털가죽이 덧입혀진다.
“아...”
새하얀 털의 늑대 인간이 풍만한 몸매와 부풀어 오른 털을 부르르 떨며 몸을 털어낸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가 물방울을 털어내는 것처럼 털을 가다듬은 늑대 인간이 내게 한 걸음 걸어온다.
“그으, 으윽.”
성대가 없나? 아니면 목소리도 정해 줘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가 만들어 낸 늑대 인간을 구경했다.
나를 주인이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뭘 물어보려고 하는 건지.
크지만 투박하지는 않은 새하얀 털북숭이 손이 내게 향한다.
발톱을 숨긴 채 내 얼굴로.
그 새하얀 털이 최고급 손수건처럼 내 인중을 살며시 스치고 지나간다.
“피?”
그 부드러운 감촉이 지나고 나서야 저 털을 더럽힌 것이 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피가 내 코에서 흐르고 있다는 것 또한.
입술을 지나 턱 끝에 맺혀 바닥에 뚝뚝 떨어질 정도로 흐르는 뜨거운 피.
“아, 이 씨발...”
그제야 내 마음대로 움직이는 마력에 취했던 머리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서, 성좌님?!”
불사르는 폭군이 준 것은 지식이지, 마력이 아니라고.
마력의 총량은 그대로인데 고급 기술을 배웠다고 그걸 바로 난사하면-
“이건 또 뭐야?!”
귓가에 들리는 이하린의 목소리에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시야가 어둡게 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