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97화 : 성좌, 자그마한 악몽 1
뭐든 시켜만 달라는 것처럼 기대는 한예지.
내가 뭐라도 하려 하면 대신 하려는 이하린.
효율 핑계를 대며 극단적으로 치솟는 김하은.
술기운으로 나를 덮친 것이 창피한지 잠시 연락이 안 되는 시들지 않는 거목까지.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내 정을 짜내고, 다시 입을 맞추고,
물이 흘러나오는 덩굴 샤워기로 함께 씻기까지 하더니 그제야 취기가 가셨을까.
시들지 않는 거목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내게 뭐라 말하려 하기에 입을 입술로 막아버린 뒤 돌아왔으니까.
적어도 일주일은 줘야 그녀가 마음을 추스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었다.
아름다운 처녀를 넷이나 취하고 그들에게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봉사까지 받으니
육체의 쾌락이나 정신적 만족감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하지만 앉으면 눕고 싶은게 간사한 사람 마음 아니던가.
전생에서는 마주치기도 힘든 미녀들도 좋지만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뒹굴고 싶었다.
“어으, 씨발. 시원하다.”
“술이 특이하군. 처음 맡아보는 나무 냄새가 나.”
그래도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퍼질러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주말에 캔 맥주 하나 마시며 팬티 바람으로 침대에서 뒹굴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흐트러진 차림으로 대충 바닥에 주저앉아
육포 비슷한 음식을 집어 먹으며 술을 들이켜고 자유분방하게 있을 수 있는 곳.
“그만 야려, 안 싸울 거니까.”
바로 충성스러운 송곳니의 성역이었다.
“술값 대신 대련 한 번, 어떤가?”
“그냥 포인트를 주고 말지.”
한 번 진득하게 싸우며 욕구를 해소하더니
싫다는 놈에게 덤벼들지는 않는 충성스러운 송곳니가 내 거절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신다.
내가 싸움이 뭐 그리 좋냐고 물어보자 너는 섹스를 왜 하고 다니냐고 받아쳐서 딱히 뭐라 하기도 힘들고.
내가 몽마가 되어 여성을 유혹하는 수동적인 모습에 재미를 느낀다는데,
저놈이 늑대 인간이라 싸움이 좋다고 말하는 걸 무슨 수로 반박하겠는가.
새하얀 유목 민족의 술 대신 브랜디인지 코냑인지 모를 양주를 마시며 살롱의 이야기를 안줏거리 삼았다.
“크핫, 나였으면 5분도 못 버티고 도망쳤을 거야. 몽마라는 거 참 피곤한 족속이구만. 교미 한 번 하려고 치렁치렁한 장신구로 몸을 감싸고 내숭 떠는 걸 감내해?”
“너도 한 번 싸워보겠다고 별 지랄 다 하면서.”
남녀 역전 세계에 맞춰 이상적인 남성성을 연기하는 나와,
그딴 거 뒤져도 못 한다며 성좌의 공간에 처박혀 스스로 고립됨을 자처하는 충성스러운 송곳니.
이쪽 세상 ‘수컷’ 취급당하는 게 싫어서 인간을 화신 삼는 대신
동물을 전령 삼아 포인트를 벌고 있다니 대단하다고 봐야 하나.
그런 놈도 외로움과 성욕은 이기지 못했지만.
녀석의 천막에 드러눕듯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고기와 고기로 가득한 안주를 질겅질겅 씹는다.
말린 고기, 구운 고기, 삶은 고기, 데친 고기, 뼈 째로 구운 고기까지.
늑대는 육식 동물이라고 주장하는 안주를 마음 가는 대로 대충 집어서 먹는다.
손가락과 털이 소스에 더럽혀지고,
테이블 아래로 음식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둥 식사 예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난장판.
그러나 녀석도 나도 딱히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대신 흥미를 보인 것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살롱의 이야기.
그중에서도 녀석이 흥미를 느낀 것은 살롱에서 시중을 들던 메이드와 집사들이었다.
아무리 봐도 차를 타는 권능과 옷을 갈아 입히는 권능처럼 보이는 마력의 발현.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로 툭탁틱탁 싸우게 된다.
“아니, 그딴 재능...은 있을지 몰라도 그 하나로 화신 삼나, 보통?”
“니가 그 저택이 보이지도 않는 거대 정원을 봤어야 해. 아마 벌어들이는 포인트의 절반 이상은 사치에 쓰고 있을걸? 그 정도면 화신을 그렇게 고용할 수도 있겠지.”
술자리에서의 사내새끼들이 으레 그러하듯, 우리는 별 쓸데없는 것을 진지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고용 비용 10만 포인트짜리 화신 메이드와 하인들은 월급을 포인트로 받을까 현금으로 받을까 같은 것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와중, 품 안에 보드랍고 따끈따끈한 것이 뛰어들었다.
“악, 씨! 뭐야?”
“아, 네 화신에게 보내 줄 나의 전령들이다. 지난번 봤던 그 새하얀 털이 마음에 들어서 힘 좀 썼다고.”
내 품 안에 있는 것은 사모예드를 닮은 것 같은 긴 털의 강아지.
생각해보면 이렇게 살아 있는 동물을 가까이에서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 먹을 식량도 없어 노인을 버리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아포칼립스에서 애완동물 키우는 놈이 어디 있겠는가.
보이는 동물이라곤 부상 당한 사람도 덮치는 흉포한 쥐 떼와
끈질기게 살아남은 바퀴벌레밖에 없었으니까.
갑작스럽게 품 안에 안겨 턱 밑을 핥아오는 흰 강아지에 화들짝 놀라니
주둥이 밑 털을 술로 잔뜩 적신 놈이 낄낄거리며 나를 비웃는다.
“그나저나, 그 쬐깐한 몸은 어찌 된 거냐? 몽마라는 건 흄 닮은 건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 모습으로 변하니까 애들이 달려드는 거지.”
두툼한 늑대의 손이 천막을 들추자 주변을 맴도는 다양한 동물들이 보인다.
사냥을 하려는 게 아니라 처음 보는 장난감을 둘러싼 개나 고양이처럼 천막을,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동물들. 엘프는 식물 말고 동물이랑도 친하던가.
“나도 잘 몰라.”
중형견이라 부르기에는 쬐끔 더 커다란 개가 품 안에서 팍팍팍팍 꼬리를 흔든다.
뭐가 그리 좋은지 촉촉한 코가 내 가슴팍을 이리저리 찌르는 상태로.
육체가 작아진 상태다 보니 품 안이 털 뭉치로 꽉 찬 기분.
그래, 시들지 않는 거목과의 첫날 밤을 보낸 이후 내 분신과 육체의 기본 모습은 엘프 소년의 몸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자각몽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주변에 다른 사람이나 성좌가 있어도 육체가 변하지 않게 고정된 것이다.
그 덕에 요 싸움에 미친 충성스러운 송곳니도 다짜고짜 내게 달려들지 않는다.
저 녀석의 꿈속으로 들어간다면 대번에 3대 900은 칠 것 같은 거대 근육맨으로 변하겠지만,
누구 좋으라고 그런 피 튀기는 싸움을 하겠는가.
드넓은 초원을 배경으로 슬금슬금 몰려드는 다양한 털북숭이들을 피해
나는 충성스러운 송곳니의 공간에서 벗어났다.
※
나의 육체가 자그맣게 변한 이후, 화신들의 반응이 조금 많이 바뀌었다.
조금 다행스럽게도 어려진 육체에 성욕보다 보호와 숭배에 관한 감정이 훅 치솟았다는 점 정도?
생각해보니 살롱에서 끈적하게 바라보던 그 두 새끼는 뭐지.
조혼이 존재하던 세상에서 왔나?
성좌라는 존재기 때문에 육체의 나이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건지,
아니면 어린 남자를 좋아하는 건지 모를 두 성좌는 제쳐 두고.
“모시겠습니다.”
“...내 발로 걸어갈 테니 내려놓으렴.”
조금, 호들갑이 심한 것 같았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새하얗고 몰캉몰캉한 피부에
엘프 특유의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다고는 하지만 반응이 좀 심한 거 아닌가.
하기야 키 180cm짜리 건장한 사내가 홀로 걸어 다니는 것과
키 150cm짜리 소년이 두리번거리는 것이 좀 다르게 와닿기는 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아카데미의 임시 성역에서 환자들이 있는 공간까지 나를 안고 간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다.
“아... 혹여나 다리가 아프시지 않을까,”
“이 정도는 걸을 수 있단다.”
말투 정도야 부드럽게 써 줄 수 있지.
그렇다고 해서 여자애한테 안겨서 인형처럼 대롱대롱 돌아다니는 것까지 참는다는 소리가 아니다.
심지어 업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정말 커다란 인형을 드는 것처럼 앞으로 껴안고 가겠다는 걸 누가 받아들여.
불안정한 자세임에도 마력으로 보정된 근육이 나를 가볍게 들어 올린 건 둘째 치고,
얘는 이게 성좌가 받아야 할 존중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나를 만나기 시작하니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포근하긴 했던 이하린의 품을 벗어나 아카데미를 돌아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이 몰려든다.
귀엽게 생긴 소년의 육체에는 이하린만 반응하는 게 아니라는 것처럼 곧바로 모이는 시선.
한예지와 김하은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대번에 달라진다.
훤칠하고 잘생긴 미남에게 몰리는 시선과 아담하고 귀여운 소년에게 몰리는 시선이 다를 수밖에 없긴 하지.
아카데미 교관과 지나다니는 생도들, 그리고 환자들의 보호인들의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든다.
다행스럽게도 성욕의 비율이 극단적으로 낮은 감정의 파도.
‘생각보다 효율적인데.’
마케팅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3요소가 미녀, 아이, 동물이라 했던가.
여기서는 미남과 아이로 바뀌어 있겠지.
그 때문인지 보호 욕구를 비롯해 온갖 욕구가 휘몰아치며 나를 자극하는 게 느껴진다.
이렇게 돌아다니면 평소의 1.5배 정도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네.
사람들의 욕망과 무의식을 자극하는 것이 몽마니까.
한예지의 사무실에 커피 싸 들고 돌아다니며 인터넷에 인증 글 올라갈 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마력의 격류.
“여기 계셨군요.”
그렇게 마력과 시선을 만끽하며 아카데미의 매점을 향해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으니 저 멀리서 김하은이 다가온다.
내 주변에 있는 마력의 격류를 순식간에 개울가 물장난으로 만들어버리는 폭력적인 마력의 장막과 함께.
“음, 오늘도 무슨 특별한 손님이 왔니?”
그녀가 내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마치 거대한 극장의 장막처럼 펼쳐져 있던 짙은 보라색의 마력장이 조금씩 사그라든다.
암막 커튼처럼 흔들거리는 마력의 장막 너머에
꿈틀거리는 끔찍한 무언가가 보였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바로 시선을 김하은에게 돌렸다.
판타지 속 괴물들이랑 싸우는 화신들이다 보니, 악몽의 스케일이 다르네.
“예, 지난번 환자로 왔던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의 기사들입니다.”
“내 발로 걷는다니까.”
김하은 또한 이하린처럼 자연스럽게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무릎 뒤에 팔을 휘감아 들어 올리려 하기에 이마를 톡 건드려 밀어냈다.
이 대륙 사람들에겐 신장 150cm의 소년을 들고 다니는 취향이라도 존재하는 건가?
아무리 분신이 아니라 해도 마력을 다룰 수 있는 몸이다.
적어도 어지간한 성인 남, 아니 성인 여성보다 튼튼하고 체력도 좋을 것이다.
보폭이 작아져 조금 더 많이 걷는다 해도 고작 아카데미 내부를 돌아다니지 못할 수준은 아니라는 거지.
저 멀리, 역시나 제복을 입고 가검을 맨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나를 기다리는 기사들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