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94화 : 살롱 2
수 십 명의 사람들이 숨 가쁘게 오간다.
느긋한 것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성좌들과 등 뒤에 기립해 있는 집사들뿐.
나와 시들지 않는 거목을 제외하면 이런 대접이 익숙한지 전부 태연하게 시중을 받고 있었다.
“젠틀맨, 불편하신 점이라도?”
“아뇨, 없어요.”
양복을 입고 집사들의 시중을 받는 것이 어색해 몸을 슬그머니 비트니 귀신같이 등 뒤의 집사가 내게 묻는다.
괜찮다고 말하는데도 그 새 배려 있는 시선이 나를 향한다.
여자 넷, 남자 두 명이 앉아 있는 커다란 테이블인데 시선은 딱 두 명에게 쏠려 있었다.
나와 갈색 곱슬머리 남자.
내가 유혹하기로 마음먹은 것이 시들지 않는 거목이라 그런지
분신은 계속 자그마한 엘프 소년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시선이 더 집중되는 것 같기도 하고.
무뚝뚝하게 차를 즐기는 청년보단, 유약한 인상의 소년이 더 만만해 보이기 때문인가?
‘남녀 역전 세계, 이렇게 겪으니까 좀 좆같네.’
테이블에 앉을 때 나를 위해 의자를 빼 주거나, 인사를 하며 손등에 입을 맞추려 하는 둥
닭살 돋는 허례허식이 지나가고 나서야 서로 소개를 시작했다.
진짜 아가씨 다루듯 나를 대하는 모습이 버터를 덕지덕지 바른 것처럼 느끼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오페라 배우 같은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가 낫다고 생각될 정도.
단정한 수녀복 차림의 ‘인류 최후의 찬송가’
푸른색 두루마기 차림의 ‘멸망을 담은 화폭’
검은색에 황금 수실 달린 제복 차림의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
마지막으로 흰 셔츠에 잿빛 양복 차림인 ‘시들지 않는 꽃’
인류 최후의 찬송가는 성당에서 아이들을 보호하다 우연히 성좌가 된 수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퓨전 사극에서 볼 법한 두루마기를 입은 여인은 요괴 무리에게 성도가 짓밟히는 걸 보며
그림 한 점을 남기고 삶을 마감한 도사라고 소개하였고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는 마왕의 목을 베기 위해 출격한 기사단장이라 소개했다.
그 뒤 자신을 멸망한 왕국의 왕자라 소개한 ‘시들지 않는 꽃’과
세계수 관리인이라고 짧게 소개하고 어색하게 시선을 돌린 ‘시들지 않는 거목’의 소개를 들으니
아직 인사를 하지 않은 내게 사심 가득한 시선들이 날아온다.
그 진득한 시선에 이제야 남녀 역전 세계라는 것이 느껴진다.
화신들이 나를 바라볼 땐, 남자가 아닌 성좌를 먼저 떠올리고 인식하니까.
내가 받는 대접과 그녀들이 내게 보이는 태도는 남성 이전에 성좌를 대하는 정중한 태도였다고 볼 수 있지.
그러니 같은 성좌들이 나를 이쪽 세상의 ‘남자’ 취급을 하는 게 당연하리라.
그 때문에 같은 성좌들이 보내오는 끈적한 시선이 조금 놀랍기까지 하다.
‘이 새끼들은 몽마가 뭔지 대충 아나 본데...’
그래, 저 두 성좌는 몽마를 정말 대충 알고 있었다.
뭐 야한 꿈이라던지 성적으로 방탕하다던가 내가 여자를 꺼리지 않는다는 점 정도.
분신으로 여자들에게 사근사근 대한다는 소문과 판타지 세상에 있는 인큐버스에 대한 상식으로 나를 그리 판단했겠지.
그 호기심과 성욕이 질퍽하게 감정이 내게 적나라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모르고.
“세계가 인간끼리의 다툼으로 자멸했다는 말입니까?”
지하 쉘터에서 빌빌대다 끌려왔어요~ 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분위기라 적당히 포장해서 말을 지어냈다.
우리 세계에 사악한 드래곤이 나타나 세계 멸망 브레스를 갈긴 것도 아니고, 인류가 병신처럼 자멸한 것은 맞으니까.
“허어, 어찌 그런 일이.”
마왕, 요괴, 사악한 드래곤과 이계의 침략자에게 맞서 싸우다 패배한 성좌들이 내 말에 화들짝 놀란다.
인류가 인류를 멸망시켰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꽤 놀라운 일인가 보다.
잠시나마 내게 날아오던 성욕 뒤섞인 찐득한 시선이 사라질 정도로.
그 뒤의 이야기는 화창한 화원에서 듣기엔 좀 이상한 이야기들이었다.
도성을 불태운 야만적인 악마족의 학살,
아이를 잡아먹는 요괴 무리의 행진,
기마 부대를 이끌고 나가 악마의 척후병을 추격한 무용담까지.
피 튀기는 전쟁터에서 오랜 기간 지내온 성좌들이라 그런지
어째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살벌한 이야기를 하하 호호 웃으며 나눈다.
그 와중에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와 시들지 않는 꽃이 이야기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나와 시들지 않는 거목을 잘 챙겨 준다.
차 끓이는 재능도 있는지 하인이 대접하는 차는
시들지 않는 거목이 준비한 차와 대등할 정도로 맛있었으며 달짝지근한 디저트들도 질리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 은은하게 연주 되는 은은한 음악과, 차 대신 나온 달짝지근한 와인까지.
피 튀기는 살벌한 내용과 술을 마시고 나서 은근슬쩍 내 고간을 노려보는 두 여성 성좌들의 시선만 아니었다면
동화책에서나 나올 것 같은 사교 파티였다.
거기에 가장 큰 이득은-
“그럼,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 즐거운 시간 보내셨기를 바랍니다.”
역시나 과장된 배웅을 받으며 내 손을 잡아끄는 시들지 않는 거목의 모습이었다.
※
한결같이 과장된 모습을 보이며 기사의 낭만과 충절을 떠드는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와 달리,
수녀와 도사라는 두 여성 성좌는 제 표정 관리를 잘하지 못했다.
감정을 읽는 내가 아니라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엘프조차 그 음탕한 시선을 알아차릴 정도로.
거기에 도수가 꽤 높은 와인이 한 두잔 곁들어졌기 때문인지
귀까지 벌게진 시들지 않는 거목이 내 손을 힘주어 잡고 이끈다.
세계수 가지를 지나 정원과 거실을 지나 자신의 안방까지.
모습만 보면 용감한 상여자가 남자를 리드하고 있지만,
와인을 연거푸 들이킨 그녀에게서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이 폴폴 피어나고 있었다.
질투와 분노, 그리고 불안함.
시들지 않는 꽃은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만 치는 조용한 인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와인 한 두 잔에 달뜬 분위기와 관심이 대부분 내게 쏠렸다.
예술가들을 후원한다는 인류 최후의 찬송가와 멸망을 담은 화폭이
내게 잘 보이기라도 하려는 듯 계속 말을 걸어댔으니까.
그 노골적인 추파 때문일까, 아니면 알코올이 없던 용기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아무런 말 없이 그녀가 나를 이끈다.
나 또한 약간의 취기와 함께 그녀가 발휘한 미약한 용기를 즐겁게 바라보고 있었다.
붙잡고 있는 손이 불안감으로 미세하게 떨린다.
혹여나 내가 이 손을 뿌리치고 돌아가 버릴까 걱정하는 것이겠지.
반나절 넘게 유지할 수 있는 분신에, 살롱에서 있던 시간은 세 시간 정도.
아직 10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구나.
걱정하지 말라는 것처럼 손을 살짝 쥐니 덜덜 떨리던 그녀의 손이 다시 한번 내 손을 꼬옥 잡아 온다.
달칵, 방문이 열리고 전에 봤던 그 침대가 우리를 맞이한다.
침대 앞에 서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길래, 지난번과 똑같이 내가 먼저 침대 위에 앉았다.
이제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네.
내가 다른 성좌들의 화신 계약 방법이 궁금해 수다를 떠는 동안 와인을 몇 잔 더 마신 걸까, 아니면 술에 약한 걸까.
고작 와인 몇 잔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술 내음이 그녀로부터 훅 풍겨온다.
부끄러워할 때 보다 새빨갛게 익어 있는 하얀 얼굴.
귀와 뺨, 목덜미만 붉게 물든 게 아니라
얼굴 전체를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꼼꼼하게 빨갛게 변한 얼굴이 귀엽기 그지없었다.
마치 술을 처음 먹어보는 소녀 같아서.
‘생각해 보면 술이 처음, 맞을지도?’
맨날 잎 우린 차, 아니면 과일 주스나 달콤한 수액을 대접하는 그녀였다.
나처럼 캔 맥주를 마시는 것도 아닐 테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부드러운 손길이 나를 툭 밀친다.
어깨를 미는 연약한 손길에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름.”
“응?”
“이름, 알려줘.”
한여름, 땀 한 방울 닦지 못하고 지나가는 미풍처럼 귀에 잘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그녀가 속삭인다.
그 귀엽고 풋풋한 말에 나는 웃으며 입을 열려고 했다.
아포칼립스 시대에 거의 10년은 사용하지 않은 내 이름을-
“...?”
“...”
그러다, 서로서로 마주 보고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어쩐지 살롱에서 꽤 친해 보이던 사이여도 성좌 이름으로 부르더니 예의를 차리는 게 아니었나.
전생의 이름을 버리는 것 또한 롤 플레잉이라는 건가?
이 평평한 대륙의 창조주는 얼마나 깐깐하고 미친놈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놈이 아니라 년일지도 모르고.
세상을 창조한 놈이 막아둔 것이니, 말이 아니라 글로 써서 전할 수도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니 뭔가 결심했다는 듯, 그녀가 침대 위에 올라온다.
아직도 입고 있던 드레스를 스륵 흘러내리게 만들며.
“괜찮아,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자그맣게 속삭인 그녀가 새하얀 속옷 차림으로 내 옆에 걸터앉는다.
그러더니 재킷을 치우고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여전히 덜덜 떨리는 새하얀 손가락으로.
고작해야 팔짱이나 끼며 얼굴 붉히던 소녀가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을까.
가슴 한구석이 간질간질 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
“버, 벗길게.”
수줍은 척,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추 두어 개 풀고 멈췄던 그녀가 심호흡한다.
여기서 단추를 더 풀면 셔츠가 양옆으로 밀려나고 가슴이 보이겠지.
여리여리한 몸매에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는 매끈한 소년의 피부를 보고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인다.
그녀의 가슴 속에서 불안함이 안도감으로 바뀌어 질투와 분노를 사그라트린다.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셔츠 단추가 전부 풀린다.
아직도 입고 있던 재킷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온다.
술기운이 불러온 용기가 아직 덜 사라졌는지 다시 한번 손을 뻗어오는 그녀.
치렁치렁한 양복 차림이 불편해 그녀의 손길에 의지한 상태로 웃옷을 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