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93화 : 살롱 1
발목까지 오는 새카만 드레스와 목깃과 소매, 가슴팍 등에 장식된 새하얀 프릴.
메이드 복을 정장으로 바꾼 것 같은 옷차림의 여인이 갑작스럽게 내 앞에 등장했다.
걸음걸음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는 게, 마치 만화에서 나오는 깐깐한 여자 기숙사 사감을 과장해 표현한 것 같다.
“모시러 왔습니다, 성좌님.”
꼿꼿이 서 있던 허리를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데 귀가 말끔하게 드러난 단발머리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멋들어지게 고개를 숙이는 자세부터 금색 줄로 이어진 단안경까지.
찰그랑거리는 단안경의 금줄을 보니 그제야 이 상황을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녀 역전 세계의 집사 같은 거 아닌가?
아마 메이드와 버틀러가 뒤바뀐 것이리라.
“아니, 여긴 어떻게...?”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등장한 곳이 아카데미의 임시 성역이 아니라 내 공간이라는 점.
그리고 나는 아침 순찰을 마친 뒤 침대에 누워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는 점이다.
헐렁한 차림으로 침대에 대각선으로 뒹굴고 있는 모습을 직시하면서도 한 점 동요 없는 냉철한 얼굴.
내려다보는 그 시선에는 한 점의 감정도 담기지 않았고, 몽마의 감각도 그녀의 감정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포커페이스였다.
감정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미녀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괜히 내가 잘못한 기분이 든다.
눈매도 날카로운데 얼굴은 무표정,
감정은 읽어지지도 않는데 내 키는 아직도 150cm 정도로 줄어든 상태여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초대장 때문인가, 왜 아직도 자그마한 크기지?
“초대장을 찢으시고 참여 의사를 밝히셨기에,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명치 위, 목깃 아래에 정중하게 손을 올리고 뭔가 예식을 지킨 것 같은 인사를 정중하게 한 여인이 말을 이어나간다.
마중 나왔는데 누워서 듣기는 좀 그래서 침대 위에 앉자마자 곧바로 이불이 몸을 감싼다.
“몸단장에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허리를 살짝 숙여 침대 위에 있는 이불에 손을 올렸는데,
내가 내 엉덩이 밑에 있던 이불이 담요처럼 어깨를 감싸고 내 드러난 살결을 가린것이다.
살이 쓸리는감촉 하나 없이 이불을 빼내다니.
이게 메이드의 기술인지 고명한 무술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얼떨결에 고개를 잠시 끄덕이자-
“흠, 확실히. 주인님의 말씀대로 아름다우신 분이군요.”
내려간 고개가올라오기도 전에,
내 복장이 헐렁한 잠옷 차림에서 말끔한 연미복으로 변해 있었다.
‘뭐야, 옷을 갈아 입히는 권능?’
0.1초 만에 그녀의 손목을 타고 내려와 손바닥을 휘감고 나서 내 옷을 갈아입히고 세안을 도운 저것은 분명 마력이다.
옷 갈아입히기 마법 같은 건없을 것 같으니까, 아마 상점에서 판매하는 공용 권능이겠지.
그러니까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는, 자신의 메이드에게 집안일과 관련된 권능을 내려 준 건가?
아니면 그녀가 천부적으로 집안일에 재능이 있어 이런 걸 깨우친 건가?
어느 쪽이든 상상치도 못한 일이라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놀랐다.
눈 한 번 깜빡였더니 팬티까지 갈아 입혀져 있는데, 어떻게 안 놀라.
아무리 천재들의 영혼만 모아 놨다지만 옷 갈아 입히기와 시중의 천재가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칼질이나 마법, 활쟁이나 총잡이, 아니면 예술가들이나 작가, 요리사 같은 예체능 계열은 예상하긴 했는데.
“같이 갈 파트너가 있는데.”
“그분께 이 초대장을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개봉하시면 곧바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엉덩이에 뽀송뽀송한 속옷이 느껴져 조금 놀란 상태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그녀의 품 안에서 금박의 초대장과 편지 칼이 하나 더 나온다.
저걸 뜯고, 초대에 응한다고 말하면 저 메이드가 거기로 갈 수 있는 건가.
“음, 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편지지를 들고 세계수 가지 앞에 서자,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가 나를 배웅하듯 다시 가슴 위에 손을 올린다.
저쯤 되면 사람인지 로봇인지 궁금해질 지경인데.
손이 닿을 거리까지 왔는데 감정을 하나도 읽을 수 없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세계수 가지에 손을 올리고 시들지 않는 거목의 공간으로 향한다.
“어라,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옷 자랑하러 온 거야? 잘 어울린다.”
내 분신이 도착하는 걸 본 시들지 않는 거목이 후다닥 달려와 나를 껴안으려다,
옷차림을 보고 눈이 동그랗게 변해 호들갑을 떤다.
너무 편안해서 몰랐는데 슬쩍 내려다보니 완벽하게 정장 차림이 되어 있었다.
“너한테도 초대장이 왔어. 이걸 열고, 참가하겠다고 말하면 된다는 데?”
그녀가 놀라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 설명 없이 금박 초대장을 내밀었다.
“어제 네가 했던 것처럼? 나도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일단 초대장부터 뜯어 봐.”
내 손에서 초대장과 편지 칼을 받으면서도 내 옷차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그녀.
하긴 나도 바지, 조끼, 숏 재킷까지 전부 까만색으로 통일된 모습은 낯설다.
면접 갈 때 입었던 양복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니까.
여기에 지팡이와 중절모만 있으면 만화에 나올 법한 영국 신사가 되겠는데.
자연스럽게 줄어든 키를 생각하면 ‘꼬마’ 신사겠지만.
천 하나로 허리부터 어깨까지 감아올린 튜닉 차림의 엘프와 반팔에 체육복 바지나 입고 다니던 나.
서로 들러붙어서 피부를 맞대는 것에 거추장스러운 옷이 필요할 리 있나.
그러다 보니 이렇게 팔다리 전부 가리고 구두까지 챙겨 신은 모습이 조금 낯설기는 하다.
...아니, 눈치도 못 챘는데 진짜 구두가 신겨져 있네.
비싼 구두는 운동화보다 편한 건가, 아니면 이 또한 그 메이드의 권능인가.
호기심이 불쑥불쑥 치솟아 시들지 않는 거목에게 슬그머니 눈치를 준다.
“알겠어, 이걸로 뜯으면 되는 거지?”
편지 칼로 밀랍을 긁어내고 향수 한 방울 뿌린 편지지를 길게 펼친 그녀가 내용을 빠르게 읽는다.
각종 미사여구가 또 쓰여 있는지 소리 죽여 웃더니, 참여하겠다고 작게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뺨이 빨개져서는 나를 쳐다본다.
“근데, 음... 편지지에 말하는 거 맞아? 좀 이상한데.”
“네, 맞습니다.”
“꺅!”
그리고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라, 또 허공에서 또각또각 걸어 나온 메이드였다.
화들짝 놀란 시들지 않는 거목이 간만에 소녀다운 목소리를 내며 편지를 떨어트리자,
자연스럽게 손을 휘저어 편지를 붙잡으며 등장했으니까.
“누, 누구세요?!”
시들지 않는 거목이 후다닥 내 앞으로 달려온다.
음, 이거 나를 지켜주려는 건가? 그 모습에 저 무뚝뚝한 얼굴의 입꼬리가 살짝이나마 흔들리는 게 보인다.
160cm 언저리의 소녀가 자기보다 쬐깐한 소년을 지켜주겠다고 막아서는 모습에 흐뭇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뭔가, 손녀 재롱을 보는 노인네 같네...’
외모와 달리 노련한 기술도 그렇고, 생각보다 나이가 좀 많을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십니까, 성좌님. 저희 주인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셨기에 모시러 왔습니다. 혹시 몸단장에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한 시들지 않는 거목 대신,
내가 그녀의 등 뒤에서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부탁드려요.”
“단장, 뭘? 악!”
제 공간에 멋대로 들어온 침입자라고 생각하는지, 아직 경계심을 거두지 않는 시들지 않는 거목.
그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 성큼 다가오는 메이드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내 앞에서 팔을 쭉 펼쳐 나를 물러서게 한다.
“흐음, 두 분께서 함께하시니 복장 또한 맞춰 드렸습니다.”
물론, 시들지 않는 거목이 손을 전부 뻗기도 전에 이 유능한 메이드는 그녀의 튜닉을 아름다운 드레스로 바꿔버렸다.
나와는 달리 여자라고 몸을 가려주지는 않네.
뭐, 속옷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갈아 입히기는 했지만.
“복장, 에?”
맨 팔을 드러내고 있다 팔꿈치를 건드리는 천의 감촉에 화들짝 놀랐는지 자기 몸을 내려다보는 그녀.
무릎 아래와 맨 팔을 드러낸 흰 튜닉 차림에서,
손목만 드러낸 녹색 드레스 차림이 되어 있는 걸 알아차리고 다시 한번 눈이 댕그랗게 변한다.
전부 까만색 복장인 나와 달리 허리와 어깨, 손목과 목깃 부분에 노란색 프릴이 달려
그녀의 새하얀 피부와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그럼, 준비는 다 되셨는지요?”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이,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그녀가 손을 뒤로 보내 뒷짐을 진다.
따닥, 마력이라도 사용하는지 구둣발이 흙바닥 위에서 명쾌한 소리를 내며 울렸다.
그리고 다시 허공에 등장하는 검은 문.
한 손은 뒷짐을 유지하고, 다른 손으로 문을 밀자 허공이 일렁이며 향긋한 꽃향기가 풍겨온다.
시들지 않는 거목의 정원이 청량한 풀밭이라면, 저 공간 너머는 화사한 화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역시 엘프라는 걸까, 꽃향기를 맡으니 곧바로 표정이 풀린 시들지 않는 거목이 내게 손을 내민다.
“에스코트 해 줄게.”
다시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메이드와 달리 조금 엉성한 자세였지만 무슨 상관일까.
내게 내민 새하얀 손을 붙잡고 그녀와 함께 발을 내디뎠다.
허공을 밟고 일렁이는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전망대의 유리 계단을 밟는 것처럼.
흘러나온 꽃향기가 거짓이 아니었다는 걸 주장하듯 눈앞에는 다양한 색의 꽃들이 펼쳐져 있었다.
잔디밭 위에 놓인 여러 개의 티 테이블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 있고,
연미복을 입은 남자들이 바쁘게 오가며 찻주전자와 디저트를 옮기고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들이 성좌고, 시중 드는 게 화신인가?
“나의 살롱에 온 걸 환영 합니다. 모쪼록, 귀한 시간 내어주신 게 헛되지 않기를!”
나는 사람들을 구경 하고, 시들지 않는 거목은 정원에 피어난 꽃을 구경 하고 있으니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여성이 한 명 있었다.
순정 만화에서나 볼 법한 치렁치렁한 제복 차림의 금발 여인.
등허리까지 오는 구불구불한 금발 머리에 양팔을 벌리며
연극조로 외치는 우렁우렁한 목소리까지 더해지니 뮤지컬 배우처럼 보인다.
과장된 것 같은 환대에 나도 시들지 않는 거목도 함께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야 그럴게, 우리가 어디서 이런 사교 모임을 겪어 보았겠는가.
대한민국에서 대학 졸업하고 취직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핵 맞은 반 백수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계수 결계 안에서만 지낸 엘프인데.
“이런 자리가 어색하신가 보군. 걱정하지 마시고 그저 차와 꽃향기를 즐겨주시오. 대화 상대가 필요하다면 누구에게나 말을 걸어도 좋고, 그저 앉아 있어도 됩니다. 어쩌면 향기에 이끌린 나비들이 당신들에게 다가갈지도 모르니까요.”
활짝 벌렸던 양팔을 가슴 아래로 내리며, 연극 무대의 막을 내리듯 인사를 마친 그녀가
우리를 빈 테이블로 안내해 주더니 어디론가 휭 사라졌다.
테이블에 앉아 시들지 않는 거목과 눈을 마주치니
그녀도 이 상황이 당황스럽지만 재미있는지 살포시 눈웃음을 지어준다.
“뭔가, 대단한 사람이네.”
“그치? 대륙을 떠도는 음유 시인들이 저렇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눈과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그저 웃었다.
몽마와 엘프라는 조합에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들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