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92화 : 엘프 눈나 4 (92/169)



〈 92화 〉92화 : 엘프 눈나 4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시들지 않는 거목의 공간으로 놀러 간 지 벌써 며칠이 흘렀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졸며, 손과 손을 마주 잡고 순정 만화의 장면들을 흉내 내는 것이 몇 번이고 반복된 상황.


정원의 세계수 가지 아래로 이동하면 시간에 맞춰 식물을 관리하는 시들지 않는 거목이 나를 반겨준다.
정원의 다양한 식물들 사이에 있는 희고 늘씬한 소녀는 보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어서 와.”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르다.
식물을 가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수의 가지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가슴을 쭉 펴며 자신만만하게 나를 반긴다.
 모습이 귀엽긴 하지만 갑자기 왜 저러는지 이해를 하기 조금 힘든 상황.

인사를 해 오는 그녀에게 대답하는데,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도 강렬한 감정이 휘몰아치며 다가온다.

‘갑자기 웬 호승심?’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명백한 호승심.
정확히는 내기에 대해두근거리거나 누군가에게 작은 장난을 치고 기다리는 기대감 정도?
어제까지만 해도 이 가냘픈 소년의 몸에 두근거리더니 왜 갑자기 저런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를 못 하겠다.


그녀에게서 풀풀 뿜어져 나오는 감정을 먼저 맛보고 나서야 복장을 볼 수 있었다.
새하얀 천에 나뭇잎 브로치 하나 차고 있던 모습과 다르게,
옷에 문양도 새겨져 있고 장신구나 허리띠도  개  달린 상황.

아무것도 모르는 순결한 처녀에서 멋 부린 귀한 아가씨로 대번에 탈바꿈했지만,
어째 자신만만한 얼굴과 호승심을 맛보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어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짐작이 안 되지만 굳이 따지자면,

‘남녀 역전 세계라 그런가...? 아니 남자가 자기를 유혹하는 여자한테 호승심을 느끼진 않는데. 설마 내 유혹을 진짜 장난이나 내기로 받아들였나?’

반쯤 장난으로 생각하던 유혹 게임을, 그녀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고  수밖에.
여기서 쑥스러움이나 기대감 같은 풋풋한 감정이 아니라 호승심 같은  끌어올리는 걸 보면
여지없는 사춘기 소년의 반응이다.

외모가 받쳐주는 엘프가 저러니 파괴력이 강하다는 단어를 새삼 이해할 것 같았다.

스스럼없이 다가오니 어찌 반응해야 할까.
그녀가 먼저 팔짱을 껴 오면, 그다음에는?
여기서 갑자기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지면 그냥 미친놈이잖아.


“음, 이거? 내가 아끼던 녀석인데...”

아무런 장식 없는 흰 천을 몸에 감고 다녀도 아름답던 그녀다.
어울리지 않는 보석을 덕지덕지 치장했다면  풋풋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을 텐데.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튜닉 위에 늘어진 황금색 목걸이와 허리를 휘감은 나무 덩굴 모양 허리띠 등으로
한껏 치장해 뽐내고 있으니 다시 한번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다.

“어때, 어울리지?”


“응, 엄청나게 어울리네.”

“고마워!”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어 보인 그녀가  옆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확 잡아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팔짱을 끼고 정원을 걷고 있자니 가슴이 쿵쿵 뛰는  느껴진다.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나를 붙잡았다.


그녀 말고 내 가슴이 쿵쿵 뛴다.

내 심장 소리를 들었는지 팔짱을  상태로 옆을 돌아본 그녀가 한 방 먹였다는 것처럼 다시 씨익 웃는다.
이게 무슨 부끄럽게 하기 대결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해도 이 자그마한 엘프 소년의 육체는 쉽사리 달아올랐다.


“얼굴이 빨개, 괜찮아?”

“음, 어, 괜찮아.”


구릿빛 피부의 180cm 떡대일 때는 몰랐는데,
150cm의 새하얀 엘프가 되니 얼굴도 귀도 목덜미도 시뻘겋게 달아올랐나 보다.
아마 거울을 보면 지금 그녀가 만져주는 이마부터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겠지.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이야?”


거실의 좌탁에 도착하기까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술이라도 한잔 들이킨 것처럼 얼굴이 홧홧하게 뜨거워진 걸   있었다.
소심하고 느릿한 엘프의 육체가 되어서인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스킨십에도 얼굴이 금방 달아오르네.

아무튼, 오늘은 명확하게 질문할 게 있어서 온 거니까.

“다른 성좌들, 만나본 적 있어?”

“아니, 세계수를 기르느라 나는 여기서 벗어나 본 적이 없어.”

주머니 속에서 편지를 꺼내 들었다.


테두리를 금박으로 입힌 편지지는 새빨간 밀랍으로 밀봉되어 있었으며, 순은으로 만들어진 레터오프너,
그러니까 밀랍을 제거하는 편지 칼과 같이 내게 배송된 상태.
보기만 해도 고풍스러운 이 편지지는 어딘가의 귀족 나리가 쓴 것처럼
향수도 한 방울 뿌려둔 것처럼 달짝지근한 과일 향기가 나고 있었다.


“살롱 초대장?”

“음,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라는 성좌가 보내온 초대장이야.”


만년필로 휘갈겨  편지를 번역해보면 불필요한 미사여구와 내 외모, 마음씨 찬양이 절반을 넘어간다.
그 부분을 읽은 시들지 않는 거목이 씨익 웃으며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표현인 솔직하고 담백한 엘프로서 이런 느끼하고 휘황찬란한 미사여구가 신기하게 느껴지나 보다.

“그래서, 이걸 왜?”

“파트너랑 같이 와도 된다 해서, 같이 갈래?”

불필요한 잡설을 전부 치우면 결국 편지 뭉텅이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있었다.



성좌들간의 교류회가 있는 데 참석하시겠습니까?
이 한 문장을 저렇게 편지지 두 장에 꽉 채워 쓰는 것도 글솜씨가 좋으니까  수 있는 거겠지.
그런 실 없는 생각을 하며 기다리고 있으니 시들지 않는 거목이 생각보다 오랜 시간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나도 그녀도, 결국 외롭고 심심했으니까. 다른 성좌에 대한 호기심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갈게.”








사람 한 명 때문에 세상이 이토록 급격하게 바뀔 수 있을까.


‘오늘도 오려나?’

식물에 물을 주고, 고개 숙인 꽃잎들을 채취하고,
가득  벌꿀 나무 수액을 채집하고, 실내에서 기르는 식물 잎사귀에 쌓이는 먼지를 치워주고,
어린잎들을 수확해 말리는 일상. 정원과 화초를 가꾸는 것으로 가득한 시간표에 제멋대로 난입한 소년 한 명.

‘너무 단 건 싫어하던데... 그렇다고  건 싫어하고. 은근히 까탈스럽네.’


다과를 준비하고 열매와 찻잎을 우리는 시간이 즐거워진다.
반복적이던 작업에 정성이 들어가고 이걸 맛있게 먹어줄까? 같은 사소한 의문으로 가득 찬다.


정신을 차려보면 그 한 명 때문에 일상이 완전히 어그러졌다.
그에게 보여주기 위해 꽃잎 채취하는 시간을 미루고, 가득 차지 않은 벌꿀 나무 수액을 채취하고, 식물 잎사귀를 닦아내는 일을 미뤘으니까.


달콤한 마력의 향을 맡으면 어째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린다.
점심이 지난 약간 늦은 오후, 그가 오는 시간만 되면 정원에 있는 세계수 앞에서 괜스레 서성이게 된다.
엘프의 관념은 그를 못 본 지 고작 하루라고 말하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은 벌써 하루라고 비명을 지르니까.

짧은데도 기나긴 시간이 흐르면, 세계수의 가지 아래에서 보라색 안개와 함께 자그마한 소년이 등장한다.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른 육체와 함께.


내 앞에서만 달라져 있는 모습을 보면 괜히 가슴이 두근거린다.

“어서 와.”

“안녕, 잘 있었어?”

눈웃음과 함께하는 가벼운 인사.
그것만으로도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심장이 잠시 얌전해진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손과 팔을 휘감는 부드러운 감촉에 심장이 다시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재미있다는 듯 나를 살펴보며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부드러운 스킨쉽.


‘얘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남자아이가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스스럼없이 다가와 덥석 덥석 안겨대니 심장이 비명을 질러댄다.
늘 평온하게 지냈는데 요즈음에는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울고 있는  아닐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콩닥대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킬 즈음이면, 얼굴도 떨어지기 직전의 나무 열매처럼 잘 익어 있었다.

‘나는 얘를 좋아하는 걸까?’

겨우 진정된 가슴에 대고 물어도 명확한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좋아한다는  뭘까?
나는 세계수를 관리하는 어머니와 자상하신 아버지를 좋아하는데.
함께 밭을 일구던 동료들과 먼저 스러져버린 아이들도 좋아했는데.
정원에서 가꾸는 식물들도 좋고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난 세계수도 좋아한다.

남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풀리지도 않는 의문에 홀로 끙끙거리고 있으면
좌탁에 앉아 자그마한 과자도 한입에 먹지 못하는 귀여운 모습으로 그가 배시시 웃는다.
내가 자기 때문에 이리 고민하는 것도 모르고.


‘왜 나만?’


‘조금 불공평해.’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천히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차라리 처음 봤을 때처럼 커다란 몸이면 꿀밤이라도 한 대 먹여줄 텐데.
나보다 자그마해진 소년의 새하얀 이마에 흠집이라도 날까 가벼운 손찌검도 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나도 똑같이 구는 수밖에 없다.

오늘도 세계수 가지 아래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소년을 보며, 사랑을 모르는 엘프 소녀는 그리 마음먹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