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91화 : 엘프 눈나 3
명백하게 당황한 얼굴, 새빨갛게 달아 오른 뺨, 그리고 허둥지둥 말을 돌리는 모습까지.
말싸움에서 지고 나서 이불에 누우면 그제야 논리적인 문장이 생각 나는 경우처럼,
분신을 해제하고 내 공간으로 돌아오니 이제야 시들지 않는 거목의 이상한 행동이 떠올랐다.
그렇다 해서 그녀가 왜 그런 모습을 보였는지 내가 알아낼 방법은 없지만.
마력의 맛을 보지 못 하는데 어쩌겠는가.
정말 너무 써서 깜짝 놀랐다던가,
핥았더니 향이 코를 찔러서 놀랐다던가,
아니면 향수 맛이 아니라 역겨운 오물 맛이었는데 내가 상처 입을까 걱정해 급히 말을 바꿨다던가.
경우의 수가 너무 많으니 내 마음대로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새하얀 조형을 다시 한번 만들어 보았다.
마력의 실타래로 만드는 새하얀 늑대 수인.
그 모습을 보더니 꼬리에서 선풍기 소리가 날 정도로 붕붕 휘두르는 충성스러운 송곳니가 크게 외쳤다.
“좋구만!”
“아니, 자세하게 말을 하라고 말을.”
“음? 내가 내 반려될 사람을 털 한 오라기까지 전부 설정한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저 정도만 된다면 난 만족이야.”
“그래놓고 나중에 불평하면 뒤져, 진짜.”
꼬리로 땅을 탕탕 친 녀석이 술잔을 들어 올린다.
그에 맞춰 나 또한 투박한 나무 잔을 들어 올렸다.
150cm의 쬐깐한 육체는 마음이 평온하고 심상이 조화롭지만,
역시 술을 즐기고 마음 편하게 뒹굴기엔 이 거대한 육체가 더 편한 것 같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불평 따위를 할 리 있나?”
녀석이 마력으로 만들어진 허상을 향해 그 두툼한 손을 휘휘 젓는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늑대라 그런지 그 커다란 손에 두꺼운 육구가 있는 게 보인다.
물론 애완동물의 부드러워 보이는 젤리와 달리,
단단한 잿빛 콘크리트처럼 보여 저걸로 머리를 맞으면 골통이 부서질 것 같이 생기긴 했다.
“아니, 그, 몽마라 그런지 너무 개방적이군.”
“뭔 소리야.”
새하얀 늑대의 분신에 디테일을 더하고 있으니 갑자기 헛기침하던 놈이 한소리를 한다.
손바닥에 분홍 육구를 더하고, 새하얀 털북숭이 얼굴에 촉촉한 개 코를 달고 있는데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지.
잠시 머리를 굴리니 그제야 이해가 갔다.
러브돌 가슴에 분홍색 점 찍는 거로 보였다는 거 아니야, 지금.
“야, 이 씨발. 너희 종족의 성적 페티쉬는 알 바 아니라고.”
“그래도 몽마인데, 다 알아두면 좋지 않나?”
“털북숭이한텐 안 박아.”
술을 한 잔 벌컥 들이켠 놈이 킬킬대며 농지거리를 던진다.
어째 성좌는 놈도 년도 다 외로울 수밖에 없나.
실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여차하면 눈깔이 뒤집혀서 싸우자고 달려드는 놈이지만 미워하기는 힘들었다.
예의를 차리거나 연기 할 필요 없이 새끼 저 새끼 드잡이질 마음 편히 할 수 있는 대화 상대였으니까.
인간 틈바구니에 떨어진 늑대 인간은 나보다 더 외로웠겠지.
술을 마시고 음담패설을 지껄이고 주먹다짐을 할 상대가 없으니까.
수컷끼리 주먹으로 대화한다는 놈이 남녀 역전 세계에 떨어졌으니 얼마나 복장이 뒤집혔겠는가.
인터넷에서 보니까 이 녀석의 남성성을 짐승 계열 성좌라 그렇다고 이해하고 있던데.
결국, 저 터프한 두발짐승도 나처럼 아가씨 대접을 받았었다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좀 웃겼다.
꼬리가 잘리고 이가 깨지고 피부가 찢어질 때까지 주먹다짐으로 인사를 하는
2m짜리 늑대 인간을 계집애 취급하듯 설설 기는 여자들...
머릿속 상상력이 저 덩치에 드레스까지 입히니 입에서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좀 기분 나쁘게 웃는데... 뭘 생각하는 거지?”
“아무튼, 저걸 베이스로 만들어질 거야. 네 무의식이 뒤섞여서 외모는 좀 변할 것 같고.”
“뭐, 그거야 만들어 주는 사람 마음이지.”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슬금슬금 덤벼들려는 것 같아 녀석의 무의식에서 빠져 나왔다.
저 새끼랑 싸우면 마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 시들지 않는 거목과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말 통하는 친구가 있으면 좋지만, 그 친구 때문에 엘프녀랑 지내는 시간이 줄어드는 걸 감수할 수는 없지.
결국, 저 새끼도 나도 수컷이라 여자에 대한 성욕을 주제로 친해진 거 아니겠는가.
※
그렇게 190cm에 3대 700은 칠 것 같은 근육 덩어리에서 150cm 쬐깐한 꼬맹이가 되니 육체의 위화감이 장난 아니다.
가끔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발을 헛디뎌 휘청일 정도.
이런 급격한 변화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괜찮아?”
“응, 고마워.”
오늘은 좌탁에 앉아 있지 않고 정원에 열매를 맺은 나무들을 보기 위해 걷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불과 10분 전에는 신장 190cm의 헤라클레스 뺨치는 육체였는데,
지금은 150cm의 소녀보다 가냘픈 소년이 되어 정원에서 넘어질 뻔했다.
바로 옆에서 걷던 시들지 않는 거목이 나를 부축해준다.
본래의 육체였다면 그녀의 아담한 신체가 내 겨드랑이 아래에 폭 끼워질 정도로 차이가 났겠지만,
키가 비슷하게 줄어들다 보니 내가 그녀의 어깨에 기대는 모양새가 되었다.
향긋한 풀 내음과 함께 느껴지는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
내가 휘청이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잡아주었는데, 뺨과 뺨이 마주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리라 생각은 못 한 것 같았다.
명백하게 당황하고 동요하는 모습에 슬며시 몸에서 힘을 빼고 그녀에게 기댄다.
그 말랑말랑하고 자그마한 육체가 굳건하게 나를 받쳐주는 느낌이 조금 기묘하다.
겉으로 보기엔 명백히 작고 가녀린 소녀지만 그녀는 백 수십 년 동안 세계수를 가꿔온 마지막 관리자.
마력과 정령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지.
“저기...”
“응, 고마워.”
조금씩 빨라지는 두근거리는 소리와 피부로부터 느껴지는 달짝지근한 당황을 충분히 맛보다 두 발로 대지에 섰다.
카멜레온처럼 주변 인물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 몽마의 능력인지,
어째 식물이 가득한 정원에 오니 기분이 명백하게 들뜨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다른 성좌들과 있을 때도 그랬지.’
불사르는 폭군 앞에서는 압도적인 격의 차이 때문에 무기력하고 혼란스러웠다.
내가 잡아먹은 몽마놈의 곁에서는 가슴에 화병이 난 것처럼 분노가 치솟아 대화를 시도하지도 않고 칼부터 박아 넣었다.
그리고 충성스러운 송곳니 앞에서는 고대 그리스 권투 선수처럼 피하도 않고 야만적인 주먹을 휘둘렀으니.
‘제대로 제어 못 하면 좀 귀찮겠네.’
다른 성좌와 만나게 될 일을 잠시 걱정했지만, 중요한 것은 눈앞에서 뺨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는 엘프 소녀였다.
아무렇지 않게 나를 어린애 취급하여 내 유혹을 흘려 넘기려 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겠는가.
못난 얼굴도 아니고, 이미 자신의 무의식 속에 잠든 이상형처럼 변한 사람을 상대로?
‘그게 되면 전생에 첫사랑, 이별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없었겠지.’
말없이 정원을 걷는 그녀의 뒤를 졸래졸래 쫓아간다.
시들지 않는 거목의 정원이니 아무 생각 없이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슬그머니 뒤를 돌아본 그녀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진다.
얌전히 뒤따라 오는 게 은근 취향에 맞았던 걸까.
퍼즐을 푸는 것처럼 그녀의 취향과 생각을 하나하나 짜 맞춰 본다.
이 퍼즐의 보상은 무엇보다 달콤하겠지.
다시 앞을 바라본 그녀가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래서, 이 나무가 벌꿀 나무야. 그 황금색 음료수.”
“어, 나무치고는 되게 독특하게 생겼네.”
“그치? 나도 실물을 처음 봤을 땐 많이 놀랐어.”
정원의 끝자락에 있는 샛노란 나무 앞에서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벌꿀 나무라더니 벌집 나무라 불러도 될 것 같이 생긴 나무가 있었으니까.
육각형 블록을 나무 모양처럼 Y자로 쌓으면 저리될까 싶은 생김새.
“여기 가운데를 찌르면 수액이 나와.”
“이 송곳이 수액 채취 도구야?”
오늘따라 방심을 많이 하는 모양새에 냉큼 걸음을 옮겨 그녀의 옆으로 향했다.
수액 도구는 하나, 그렇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있지.
등 뒤에서 껴안는 자세로 도구 잡은 손에 손을 겹치려 했지만 내 덩치가 너무 쪼끄마하다.
그냥 바싹 붙는 수밖에.
“아, 응. 세계수의 가호를 받은 쇠붙이는 나무의 상처를 곧바로 아물게 하거든.”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가 설명을 이어나간다.
어깨가 마주 닿은 거리에서 그녀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진다.
뺨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을 무시하고 그대로 손과 손을 겹쳐 송곳으로 샛노란 나무 블록의 정 중앙을 찔렀다.
투박한 송곳을 타고 황금색 액체가 방울방울 떨어지자 내게 잡힌 반대쪽 손으로 나뭇잎 그릇을 가져다 댄다.
마디로 나눠진 나무에서 수액이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나는 송곳을 잡은 그녀의 손을 놔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거야. 수액이 너무 많으면 껍질을 뚫고 흘러나와 벌레가 꼬이거든. 그러면 이 선명한 마디가 갉아 먹힐 수 있어서 꽉 차기 전에 늘 수액을 빼 줘야 해.”
설명을 다 듣고 나서야 손을 떼자, 그녀도 송곳을 회수한다.
세계수의 가호 받은 송곳이라는 게 엘프식 농담은 아니었는지 나무에 뚫렸던 동그란 구멍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정말 순식간에 아무네. 그러면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도끼로 나무를 베면 다시 자라나나?”
“엑?”
중요한 건 그녀의 손이지 나무와 송곳 따위가 아니었기에 떠오른 말을 아무렇게나 던졌더니
그녀가 새총 맞은 비둘기처럼 나를 바라본다.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건가?
“그, 나무들도 정령이 깃들고 엘프들과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수액을 뽑아내는 송곳 구멍 정도야 수혈이나 헌혈이라고 볼 수 있지만,
나무를 베어내고 재생시키는 건 사람에 비유하면 수술에 쓸 팔다리나 내장을 뽑아내고 재생시키자는 소리랑 같은 건가?
아무리 회복 마법이 있는 세상이라도 발상이 좀 사이코패스 같기는 하네
아직도 어색한 이세계 판타지 감성을 곱씹으며, 우리는 수액이 가득 찬 그릇을 들고 저택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