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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화 〉90화 : 엘프 눈나 2 (90/169)



〈 90화 〉90화 : 엘프 눈나 2

보라색 마력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켜 새하얀 조형을 만들어낸다.

나와 시들지 않는 거목과 충성스러운 송곳니의 기억을 전부 읽어서 만든 가장 아름다운 늑대.
풍만한 몸매에 새하얗고 아름다운 털을 가졌지만, 당연히 꼴리지는 않았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퍼리 취향은 없었으니까.

우선 목표가 시들지 않는 거목을 유혹하는 것이지만,
충성스러운 송곳니가 보상으로 제시한 펫이 생각보다 성능이 좋았기 때문에 분신을 만들어 보고 있었다
거기에 화신별 맞춤 펫을 제공하니 빈 시간마다 조금씩 분신을 깎아보고 있었다.


 분신이 아닌 타인의 망상을 소환하자 간만에 두통이 찾아왔지만 어쩌겠는가.


충성스러운 송곳니의 기억으로 두 발로 걷는 늑대의 인체 비율을 조형하고,
시들지 않는 거목의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성스럽게 생겼던 늑대의 외형을 베껴온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새하얀 털의 늑대가 눈앞에 나타난다.

나야 늑대가 이쁜지 아닌지 잘 모르니 수인족을 알고 있는 시들지 않는 거목의 시선으로 판단을 한다.
이걸 핑계로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공간으로 향하니 이득이지.

슬슬 분신의 지속 시간이 반나절을 넘어갔지만,
마력으로 늑대 인간을 만들다 보면 분신의 지속 시간이 줄어들어 그리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와, 털이 복슬복슬하긴 하네. 그런데 윤기 있는 털이 좋은지, 폭신폭신한 털이 좋은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털을 되게 중요시하던데.”

“하긴, 나중에 들리면 물어봐야겠네.”

어제는 황금색이더니, 오늘은 새하얀 음료가 좌탁 위에 준비된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마주 보고 앉아 내가 만들어내는 새하얀 늑대 모형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그나저나 감은 좀 잡히니? 영구적으로 홀로 움직이는 분신이라... 말만 들으면 현자의 돌이 필요한 호문클루스랑 다를 게 없네.”

“조금 어려울 것 같기는 해. 다음  포인트로 도움 될 만한 거 구매해야지.”

아니면 선물로 온 번제용 재물 같은 것들을 아카데미에 제공했으니 몽마와 관련된 걸 요구해볼까.
 분신 제작 연습은 단순히 땡칠이 성욕 해소로 끝나는  아니다.

지속 시간의 제약이 있는 나의 악몽 소환과 달리,
영구적으로 소환되며 자체적으로 움직인다면 나만의 군대를 차근차근 만들  있다는 뜻이니까.

화신은 계속 늘리면  명 한 명 관리하기 힘들 것 같아
소수 정예로 갈 생각이니 분신으로 물량을 채워두면 어디에든 써먹을 수 있겠지.


“마력 다루는  어때?”

“생각보다는 잘 되는 것 같아. 머리가  아프지만 조금씩 늘어나는 게 느껴지고.”


“마력을 다루는 데 머리가 아파? 그러면 조금 빈도를 줄이는 게 좋을 거야. 고통은 언제나 우리에게 경고하는 중이거든.”


서늘한 손가락이 앞머리를 스륵 쓸어 넘기더니 부드러운 손바닥이 이마를 꾸욱 누른다.
부드러운 눈매가 걱정을 가득 담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좌탁에 나란히 앉았는데 그녀가 나를 내려 본다고?

‘뭐 어디까지 작아져야 하는 거지.’

마력을 다루며 정신이 약간 몽롱해졌는데, 그사이를 못 참고 육체가 줄어들었다.
마력을 잘 다루게 될수록 타인이 원하는 대로 육체가 들쑥날쑥 변하니 적응하기가 좀 힘드네.
예전에는 화신들이 원하는 대로 눈매나 인상이 바뀌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신장이 30cm씩 오락가락한다.


그에 맞춰 팔다리도 호리호리해지고 몸도 얇아지니 잔을 잡기 위에 손을 뻗다 위화감이 느껴질 지경.
학생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지만 입맛까지 어려진 건 아닌지,
여전히 달게 느껴지는 음료 때문에 씁쓰름한 과자를 한 입 베어 문다.

“그러고 보니까  모습, 이상하지 않아?”

“어디가?”


“계속 변하잖아.”

“변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

생각해보니 그녀의 세상은 수인족을 비롯해 다양한 종족들이 있었구나.
꿈속 주민인 몽마도 알고는 있는 걸 보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네.


놀러  땐 180cm 넘는 거한이 의자에 앉으면 150cm 언저리의 소년으로 변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접  주고.

내 이마를 쓰다듬는 손 위에 내 손에 마력을 담고 살짝 올린다.
어제 남겨 두었던 입술 모양 마력의 모양이 그대로 느껴진다.
수다를 떨다 까먹었던  사실을 이제야 떠올렸는지 그녀의 하얀 얼굴이 벌게지는 것이 보인다.

“나는 이렇게 자꾸 변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데.”

“하긴, 원래는 인간이었다 했지? 성좌가 되면서 종족까지 바뀌다니, 신기한걸?”

성좌가 되며 종족이 바뀐  아니라, 마력 사용법을 몰라서 나 스스로 종족을 바꾼 거지만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몸이 변한 게 어색하다는 것처럼 내 이마 위에 있던 그녀의 손을 계속 만지작거릴 뿐.

조금 서늘한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물 주는 것도 식물 가꾸는 것도  권능과 정령으로 하기 때문일까?
그 기다란 손가락은 농사꾼의 것이 아니라 피아니스트 같은 예술가의 손가락 같았다.

반 몽마가 된 김하은은 야했다.
새하얀 피부나 쫀득한 피부, 호리병 같은 몸매 같은 미사여구 붙일 필요 없이
그냥 천부적으로 남자를 홀리게 하는 몸이라 볼 수 있었다.


반대로 시들지 않는 거목은 아름다웠다.

김하은이 아름답지 않다는 소리가 아니라,
엘프의 외모가 마치 예술 조각상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새하얀 석고상을 보고 성욕보다는 감탄이 먼저 나오는 것처럼 엘프의 외모는 예술적으로 아름다웠다.

몽마의 마력을 받아들이고 조금씩 외모가 피어나는 김하은과 이하린도 분명한 미녀지만,
성좌이자 엘프인 시들지 않는 거목과 비교하기는 조금 미안할 지경.
굳이 따지자면 화신들은 대학이나 길거리에서 뒤돌아보게 하는 미녀고,
시들지 않는 거목은 TV 속에 나오는 여배우 같은 미녀라 해야 하나?


 이딴 비교를 하고 있나 싶지만, 남자의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성욕보다 감탄을 먼저 부르는 외모.

모순적이게도 그 때문에 나는 그녀를 유혹하고 싶었다.
저 무지한 순백의 육체가 붉게 달아올라서 나를 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에.
이것이 악몽의 편린을 먹고 불살라진 욕망이라도 상관없었다.

미녀를 보고 욕정에 시달리는 게 건강한 남성 아니겠는가.


우리는, 적어도 나는 자그마한 내기를 하는 것이다.
나는 유혹하고 그녀는 견뎌내는 작은 놀이.
그녀가 나를 건드리지 않고 돌려보내면 그녀의 승리, 반대로 나를 건드리게 되면 나의 승리.

합의한 적도 없고  멋대로 시작한 놀이지만 그녀도 은근하게 받아주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 시간  되었다며 꼬옥 껴안아서 배웅해 준 것만 봐도,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
화신을 제쳐두면 성좌와 성좌로 동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니까 호감이 쌓일 수밖에.

그리 생각하며 좌탁 위에 올라온 하얀 손을 괜히 잡아 보았다.

손가락도 곱고, 팔목도 가늘다.
새하얀 피부에는 잡티 하나 없고 자그마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황금비율에 맞춰 곱게 놓여 있다.
군살은 없지만 홀쭉한 것도 아닌 뺨이 내 마력에 반응해서 연분홍빛으로 물든 순수한 모습이 되려 욕정을 부른다.


그러고 보니  이야기를 할 때, 마력의 맛을 느낀다고 했었지.

내가 마력을 느끼는 것은 촉각에 가깝다.
김하은은 마력의 장막을, 나는 마력의 실을 뽑아 재봉하고 조각하듯 꿈속의 존재를 불러오는 것.
당연히 마력을 맛보거나 향을 맡을 수 없다.

하지만 시들지 않는 거목은 기본 음식에서 ‘마력의 맛이 나’라며 불평을 했었지.


그러면 그녀는 내 마력도 맛을   있는 건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그러고 보면 마력의 맛을 느낀다고 했잖아.”

“어, 응? 아... 그렇지?”


내 손에 잡혀 밀가루 반죽처럼 조물딱 조물딱 주물러지는 손가락이 신경 쓰였는지 그녀의 대답이  박자 늦는다.
그 모습에 질문을 마저 이어나가기 위해 손을 놓고 손가락 끝에 마력을 뭉쳐 놓았다.


“아...”

“음?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미지 하는 것은 놀러 가서 먹었던 꿀타래.
마력의 실을 가볍게 뭉쳐 한입 크기의 꿀타래 모양으로 만들어 보았다.
연보라색 마력 실타래를 만들어 좌탁 위에 올리니,
이게 뭐냐고 말없이 묻는 것처럼 그녀의 둥그런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내가  작아지니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조금 어색한데...

살면서 누구를 내려  적은 많아도 올려  적은 거의 없었다.
하기야 그때는 얼굴이 곱상한 것도 아니라 누군가랑 이렇게 그윽하게 마주 본 적도 없었지.
미간에  팍 주고 겁주는 적은 많았는데.

“이게, 뭔데? 왜?”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그녀가 내게 질문한다.


“먹어 볼래? 내 마력은 무슨 맛인지 갑자기 궁금해서.”

“음? 아... 그렇구나.”

연보라색 반짝반짝 빛나는 마력의 실타래는 음식보다 잘 가꾼 보석처럼 보였지만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이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의 실타래를 그녀 쪽으로 스윽 밀었다.

“이걸, 맛을...”


그 와중에 마력 다루는 솜씨가 아직 미숙해서 그런지,
점점 풀려나가는 실타래를 손끝으로 집어 든 그녀가 분홍색 혀를 쏘옥 내민다.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혀를 빼꼼 내미는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으캭!”


여지없이 소녀보다는 소년, 골목대장 같은 외침이 오래간만에 들려온다.
혀를 데인 것처럼  밖으로  빼고 헥헥거리며 눈물까지 글썽이는 모습에
못된 짓을 한 기분이 들어 일단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괜찮아?”

“안니, 괜안햐.”

빼꼼 내민 혀를 집어넣지도 않고 웅얼웅얼 말하기에 잘 알아들을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급하게 새하얀 음료를 벌컥 마신 그녀가 몇 번이고 입을 오물거린다.
작은 입술이 역동적으로 꼬물거리는 걸 멍하니 보고 있으니 그걸 재촉으로 받아 들인 걸까?

“음, 향은 진짜 좋은데... 먹을 건  되는 것 같아.”

곧바로 그녀가 설명을 해 준다.

“몽마의 마력은 처음이긴 한데... 대부분은 향과 비슷한 맛이 나거든. 인간들이야 지내는 곳에 따라서  다르지만 드워프 들은 비옥한 흙의 맛이나 쇠 맛이 나고, 엘프들은 자기가 가꾸고 담당하는 식물의 향과 맛을 품고 있어.”

“그러면 나는?”

“너는, 그, 악몽을 다루는 몽마지?”


보라색이니 포도  아닐까?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력의 맛을 말해주는 게 미안하다는 것처럼 그녀가 우물쭈물 말을 이어나간다.


“그거 때문인지 향은 엄청 달짝지근한데 맛은 엄청나게 써. 그러니까... 향수? 그래, 향수를 핥은 기분이야.”


“오, 그렇구나.”


하기야 남을 매혹하는 성질의 마력이니 향수라 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고작 그걸 이야기하는 데 저렇게 창피해하는 걸까.

연분홍색을 지나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뺨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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