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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화 〉89화 : 엘프 눈나 1 (89/169)



〈 89화 〉89화 : 엘프 눈나 1

분신인 나는  번이고 말끔하게 변하지만, 털이 뽑히고 피투성이가 된 송곳니를 보면  오래 싸웠구나 싶었다.

만신창이가 된 늑대의 얼굴을 보니 날카로운 이빨이  개 빠져
피가 줄줄 흐르던 잇몸이 천천히 아물어가고 뜯겨나간 피부도 아무는  눈에 보인다.


저게 늑대 인간이야, 트롤이야?

“후, 속이 다 풀리는구만. 한잔하겠나?”

그래도 귀도 반쯤 잘리고, 송곳니도 두   깨졌으며
온몸의 털이 피로 젖은 저 땡칠이가 꼬리를 슬쩍 내리깐 걸 보니 속이 다 시원하구나- 싶었다.
자세히 보니 꼬리도 좀 짧아져 있는데 얼마나 깨문 거야.

무의식의 세상이라도 감각은 선명할 텐데, 만신창이의 몸으로 후련하게 웃는 꼴을 보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서 싸움이란 식량을 뺏고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는데, 저 늑대 인간에게는 취미 생활에 가까운 것이었나보다.

피와 이빨 조각으로 점칠 된 풀밭에 털썩 주저앉아 아까 마셨던 술을 만들어냈다.
역시나 호쾌하게 벌컥벌컥 들이마시던 그가 어렵사리 입을 연다.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날리고 나를 바닥에 처박기 위해 제 꼬리 끝자락을 자른 놈이  저리 어렵게 말을 꺼내는지.

“그래서, 부탁이 하나 있는데.”

“싸우자는 게 부탁 아니었어?”

내 질문에 그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는 늑대 인간이 머쓱하게 웃는다.

“음? 수컷끼리 다투는 게 왜 부탁이 되겠나.”

“씨발놈이,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 욕지거리를 내뱉으니 곱상한 말투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며 낄낄 웃는 모습에 복장이 뒤집힌다.
그렇다고 여기서 한 대 후려치면 또 이성을 잃고 싸우겠지.


술을 마시며  몸을 흘긋 내려다보니 가슴팍도 팔뚝도 허벅지도 어마어마하게 두꺼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여자들이 원하는 대로 몸이 조금씩 바뀌더니,
여기서는 저 늑대 인간이 바란 대로 강인한 전사의 몸을 가지게  걸까.
과장 없이 팔뚝이나 허벅지가 김하은 허리보다 두꺼운 것 같네.
고대 그리스의 챔피언처럼 변한 근육질의 몸을 보며 술을 한 잔 마시니 놈이 드디어 입을 연다.

“그러니까, 부탁이... 후우, 씨발. 아무튼, 부탁이 있네.”


“뭔데?”

“여자가, 필요하네.”

“뭔  좆 같은 소리야.”

뜬금없는 소리에 어처구니가 좀 없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설명으로 인해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딘가의 열혈 소년 만화처럼 주먹으로 대화를 나누고 술잔을 나누다가 하는 게 여자와 성욕 처리 이야기라니.

“그래서, 눈에 차는 사람이 없다고?”

“그래, 포인트 상점이 성노예를 파는 것도 아니고.”

눈앞에 있는 충성스러운 송곳니는 두 발로 걷는 늑대 인간이다.
사람한테 짐승 귀 달아둔  아니라 진짜 이족 보행을 하는 길쭉한 늑대.

당연하지만 그가 원하는 여자도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늑대였다.

“성좌 중 수인족이 있다 해서 슬쩍 알아보면 흄 계집애한테 귀만 달려 있지를 않나. 아무튼, 이 세상에는  반려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거야.”


“반려 이 지랄 하고 있네. 아까는 성욕 때문이라면서.”


“흄이 우리들의 발정기를 이해할 리 없지.”


콧바람을 흥 불어 재낀 그가 술을 연거푸 들이마신다.
나도 이쪽 세상 왔는데 여자가 한 명도 없었으면 분신으로 여자부터 만들지 않았을까.
나야 인간도 엘프도, 그리고 이 녀석이 말한 사람 얼굴에 동물 귀만 달린 수인족도 귀엽고 예쁘면 가능하긴 하지만.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수컷의 성욕은 자연스러운 것. 포인트 상점을 이용해 억누르곤 있지만, 육체를 좀먹는 게 느껴져. 이딴 기물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기 싫다. 내 알기로 꿈을 다루는 주술사들은 타인의 꿈속에 있는 존재를 끄집어낼 수 있다던데.”


쉽게 말해서, 땡칠이의 땅콩이 위험하다는 소리였다.


술기운 때문에 실실 웃고 있으니 녀석이 버럭 목청을 높인다.
녀석도 싸움과 술에 취했는지 말이 조금 지리멸렬하게 늘어졌지만, 수컷이면 좀 공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약물로 계속 억누르다 보니 이러다 성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닐까 두렵다면서.


“흄의 외모를 흉측하게 생각하는  아니야! 하지만 털 없는 암컷을 보면 피부병에 걸려 털이 빠지기라도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이건 어쩔  없어.”

매끈한 피부를 보면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생각돼서 있던 성욕도 싹 사라진다니 어쩌겠는가.

동정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충성스러운 송곳니가 원하는 것은 영구적으로 유지되는 꿈으로 만든 분신체.
당연히 자위용 섹스 돌처럼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생각하고 말하며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존재를 원하는 것이다.

포인트 상점이 자위 기구를 파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살아 있는 생명체는 확실하게 안 파니까.

그걸 만드는 것은 내 능력 발달에도 도움이 되니 요청을 받아들였다.
남녀 역전 세계에 떨어진 처지로서 동질감도 좀 들고,
다짜고짜 죽탱이 날리는 것 빼면 호쾌하고 호탕하니 성격도 마음에 드니까.

‘좀만 일찍 말하지, 불쌍한 놈.’


자신을 도와준다면  화신들을 도와줄 수 있는 짐승들을 보내준다니 이익은 확실하다.
120만 포인트를 체력 버프용 펜던트에 처박기 전에 요청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내가 김하은처럼 세기의 천재도 아니니 다음 달 포인트 획득까지 3주는 기다려야 할 거다.

그렇다고 해서 3주 동안 손 놓고 있기는 좀 그러니까-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이야?”

곧바로 세계수의 가지를 타고 시들지 않는 거목의 공간으로 향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특이 케이스인 불사르는 폭군을 제외하면 내가 처음으로 교류를 맺은 성좌가 그녀였기 때문에.
 번째로 만나 본 성좌 이야기를 하며 수다나 떨고 싶었으니까.


식물들에 물을 주고 있었는지 새파란 물방울을 어깨 어림에 동실동실 띄운 그녀가 내게 다가와 반갑게 맞이해준다.


코끝을 맴도는 청량한 숲의 향.
지난번에 한 번 당한 것도 있고 조금 짓궂은 생각이 들어
한 걸음 내디뎌서 바싹 붙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낸다.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나 하러 왔지.”

“아? 다른 성좌들과 만났구나. 하긴 밖에서 돌아다니는 몽마는 보기 힘드니까.”


“얼마나 보기 힘든데?”


머리 한 구석에 있는 불사르는 폭군의 지식을 잠시 더듬어 보았다.
행성 단위의 식민지를 거느린 미래 SF 제국에서도 드림 워커라 불리는 몽마들은 태양계에 몇백 명 있는 수준이던데.
자연스럽게 거실 한구석의 커다란 잎사귀 방석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으음, 나는 이야기만 들었고, 우리 어머니 세대의 순찰자들도 세상을 방랑하면서 한두 번 만난 정도? 몽마들은 거의 현실에 나오지 않거든. 마왕군이 침략했는데도 그저 꿈속에서 안락하게 잠드는 걸 선택했다고 들었어.”


사근사근 웃으며 말하지만, 내용은 조금 어처구니가 없었다.
현실이 고달프니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죽어버린다니.
이러니까 성좌로 활동하는 몽마가 없구나.

생각해보면 나처럼 성좌가 된 김에 종족부터 바꾸는 사람도 없을  같고.


좌탁 위에 잎사귀를 말아 만든 잔이 올라온다.
꿀 방울을 음료로 만든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황금색 액체.
주저 없이 한입에 털어 넣자 혀끝부터 정수리를 관통하는 감각이 벼락처럼 머리를 뒤흔든다.


“으, 그렇게 마시면 엄청 달 텐데... 괜찮아?”

“아니, 안 괜찮은 것 같아.”

꿀통에 주둥이를 박고 국밥 퍼먹듯 꿀을 퍼먹어도 이보다 입이 달지는 않을 것 같은데.
좌탁 앞에 곱게 앉아 아주 천천히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 새삼 억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김도 안 올라오고 차가워 보이기에 벌컥 마셨더니 이게  꼴이래.


숨만 쉬어도 콧구멍까지 벌꿀에 절여지는 기분이라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헥헥 숨을 쉬었다.
호로록 천천히 음료를 마시던 그녀가 내 모습을 보고 배시시 웃는다.


살풋 웃는 모습이 참 귀여웠지만 어째 골탕을 먹었다는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벌꿀 나무 수액은 너무 달아서 조금 씁쓰름한 다과랑 같이 먹는 거야.”

새하얀 손가락이 좌탁 위를 톡톡 두드리자 갈색 나무 열매 같은 녀석이 접시에 담겨 튀어나온다.
벌꿀 나무 수액을 교훈 삼아 도토리 닮은 과자를 앞니로 살짝 베어 무니 고소하면서도 씁쓰름한 맛이 혀끝을 감싼다.


‘뭔 과자에서 아메리카노 맛이 나지?’

저렴한 입맛으로 비유하자면 도토리 모양 과자는 아메리카노 맛이고, 벌꿀 나무 수액은 커피시럽 같았다.
입이 씁쓰름할 무렵 차를 한 입, 입이 달달해질 무렵 다과를  입.
단맛과 씁쓰름한 맛이 번갈아 혀를 자극하니 그 끔찍한 꿀물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입맛에 꽤 맞았나 봐?”

“응, 다과랑 먹으니까 맛있네.”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배시시 웃으며 탁자 위에 주섬주섬 물건을 늘어놓는 그녀.

그 모습을 보니 문득 떠올랐다.

‘이거, 뭔가 휘둘리는 기분인데.’

원래는 충성스러운 송곳니 이야기를 하다가, 성욕에 관련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갈 생각이었다.



사랑에 대해 잘 모르고 성교육도 대충 받은  같은 소녀에게
수인족의 발정기 이야기를 하며 말로 살금살금 희롱할 생각이었는데.
혓바닥을 찐득하게 녹여버리는 단맛의 충격 때문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가 준비한 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더욱 분한 것은, 그 와중에 입맛에 잘 맞아서 말을 돌리기 어렵다는 것.

나 주겠다고 정원에서 딴 열매로 직접 준비한 과자들이라는데 이걸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인간에게는 풀 맛이 너무 강한  같다는 말을 하자 귀가 축 늘어지고,
새콤달콤한 스콘은 입에  맞았다니까 곧바로 위로 쑤욱 올라가는 귀를 보고 있으니
그냥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 유도당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감정을 숨길 생각도 없이 방긋 웃는 모습을 보니 엄한 생각도 사라지고 만다.


“그러고 보니 화분들은  받았어? 우리 애 중 가까운 애들한테 부탁해서 아카데미로 보냈는데.”

“응, 잘 받았지. 환자들이 있는 공간에 전부 놔뒀어.”


간식 이야기에서 정원의 식물 이야기, 거기에서 선물로 준 화분 이야기까지.
노래하는 듯한 박자는 어느새 사라졌지만, 듣기 좋은 음색으로 조곤조곤 말하는 그녀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었다.
편지를 서로 쓰는 것보다 대화를 나누는 게 훨씬 즐거울 정도로.

이대로 가면 아마 엘프의 시간관념대로 느긋하게 서로를 알아가게 되겠지만-

‘하지만 몽마는 이길 수 없을걸?’

몽마에게는 몽마의 방법이 있었으니까.


“아, 이제 또 시간이  된건가?”


“그래, 갈 시간이  것 같네.”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가 귀를 살짝살짝 떤다.
내가 유혹하고 그녀가 흘려 넘기는 것을 일종의 놀이처럼 받아들이고, 자기가 이겼다고 우쭐해 하는 것 같다.

감정을 숨길 줄 몰라서 그런지 어째 화신들보다 명백하게 느껴지네.


배웅하겠다는 것처럼  앞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그녀.
계속 앉아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앉은키가 그녀와 비슷해진 상태였다.


새하얀 손가락이 눈앞에서 흔들흔들 움직인다.

“안녕-”


“그래, 나중에 봐.”


분신이 사라지기 직전 분신에 남은 미세한 마력을 최대한 끌어모은다.
그리고 그대로 손을 뻗어 새하얀 손가락을  잡아챘다.
분신이 흐릿해진 것을 보고 손을 되돌리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눈이 댕그랗게 변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낙인처럼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새하얀 손등 위에 선명하게 남은 마력의 자국.

화들짝 놀란 그녀가 뭐라 외쳤지만,  소리를 듣기도 전에 분신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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