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88화 : 성좌, 무기력한 악몽 3
손수건 대신 넥타이인가.
남녀 역전 세상의 고지식한 여기사님의 머릿속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포병을 지키기 위해 출전하는 중갑 기마병의 랜스 차지.
물밀 듯이 밀고 들어오는 괴물의 무리와 그걸 짓밟고 지나가는 강철의 부대는
남자의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로망을 품고 있었으니까.
[성좌,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가 자신의 기사를 치료해준 당신에게 감격합니다]
[성좌,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가 다음 전쟁의 영광을 당신께 바치노라 서약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물론 성좌도 화신도 부담스럽게 구는 걸 보니 가슴이 웅장해지다 팍삭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말투며 태도며 시선까지 나를 부잣집 영애처럼 대접하려 드니 조금 기분이 이상한 상황.
성좌로 대접받는 것도 조금 어색한데, 곱상한 아가씨 다뤄지듯 대하는 건 어색하다 못해 오그라든다.
차라리 씨발씨발 거리는 입 험한 년들이 낫지.
부드럽게 말하는 여성스러운 어투를 계속 쓰다 보면 때때로 전생의 야가다 김씨들이 그리워진다.
서로를 이 새끼 저 새끼 부르면서 못 볼 꼴 전부 보여주던 편안한 관계.
물론 녹슨 통조림과 재배 실수로 갈색으로 변한 이파리를 식사로 배급받던 것도 같이 떠오르면
그냥 여성스러운 말투 쓰는 게 낫다는 생각도 바로 따라온다.
인간관계가 그리운 거지, 생활이 그리운 게 아니니까.
그리 생각하며 부담스러운 화신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친다.
환자도 간병인도 전부 서대륙의 기사들이었는지 쫘악 나열해서 니끼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적응이 안 되네.
“그러면, 나머지 환자들을 잘 부탁한다.”
“네, 성좌님.”
분신으로 온 김에 환자들의 공간을 좀 둘러 볼까 싶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양한 성좌들이 환자에게 도움이 될 물건을 처박고 있어 올 때마다 새로웠으니까.
포인트나 효능은 둘째 치고 마법이 걸린 물건들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정신이 치료되었지만 육체가 쇠약해 약간의 요양이 필요한 사람들과 순번을 기다리는 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간병인들이 잔뜩 있는 아카데미의 한 건물.
건물 내부를 은은하게 밝히는 화톳불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는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건 귀찮았지만 그 정도는 참아야겠지.
그렇게 환자들이 머무는 공간을 둘러보던 중, 새하얀 털 뭉치와 마주했다.
“뭐여, 시벌.”
아무리 성좌와 화신이 있는 세상이라 해도 환자들이 머무는 공간에서
사람 허리춤까지 올 법한 새하얀 털 뭉치가 뽈뽈뽈 굴러다니는 것은 예상치 못해서
그런지 입 밖으로 욕설이 툭 튀어나왔다. 김하은이 나한테 설명할 때 이런 건 말해준 적 없는데.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욕설을 들었는지 새하얀 털 뭉치가 우뚝 멈춰선다.
이런 걸 뭐라 부르더라, 사모예드?
자세히 보니 살이 좀 많이 쪄서 동글동글해진 대형견이
어디로 몰래 가고 있었는지 복도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었다.
‘환자도 있는 공간이고, 안전하겠지 뭐.’
술래잡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지 얌전히 멈춘 털 뭉치에 손을 올렸다.
몽실, 하고 손목까지 삼키는 부드러운 감촉이 만족스럽다.
주변에 아무도 없겠다, 말캉하고 뜨거운 개의 피부와 그 온기를고대로 간직하는 털 뭉치를 전력으로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야, 너도 뭔 신수 같은 거냐?”
대답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성좌, 충성스러운 송곳니가 그 아이 또한 환자라고 말합니다]
※
햄스터 집을 불려둔 것같이 커다란 지푸라기 침대, 바닥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마른 풀 냄새.
시들지 않는 거목의 공간이 아름다운 식물원이라면, 이 공간은 포근한 둥지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아무렇게 앉게나. 손님 대접할 건 없고, 술이라도 한잔하겠는가?”
씨익 웃어 보이는 커다란 털북숭이.
그래, 눈앞에 있는 것은 수인족이었다.
턱 쪽은 하얗고 뺨과 이마, 머리 쪽과 등은 회색과 검은색의 털을 가지고 있는 늑대 인간.
만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흉측한 늑대 인간이 아니라, 정말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늑대였다.
새하얀 송곳니가 다 드러나도록 씨익 웃어 보인 이족 보행 늑대가 투박한 대접에 새하얀 액체를 꿀렁꿀렁 붓는다.
막걸리같이 곡물로 만든 술인지 짐승 젖으로 만든 술인지 잘 모르겠지만 달달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그 녀석은 내가 꽤 아끼던 전령이거든. 지금은 살이 좀 붙어서 그렇지 얼마나 발이 날랜 녀석인데.”
제 잔에도 술을 콸콸 부은 충성스러운 송곳니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다.
입가의 털이 젖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술을 들이켜는 모습이 호탕하기 그지없다.
목소리도 걸걸하고, 행동도 그렇고 대충 감이 온다.
“잘 뛰어다니다 전령인 주제에 화신 하나 구하겠다고 몸을 날려서 말이야. 스펙터인지 고스트인지 기분 나쁜 유령한테 붙들려서 뛰지를 못하게 되었어. 그 뒤로는 살만 뒤룩뒤룩 붙어서 고민이 많았거든.”
얘도 나랑 비슷한 세상에서 온 남자구나, 하고.
치료를 받으러 제 전령을 내게 보냈으니 내게 독이라도 줬겠는가.
거기에 이건 분신, 설마 분신이 독을 마셨다고 성좌까지 죽이는 강력한 독이 있으면 아카데미에서 막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새하얀 술을 쭉 들이켰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고소한 우유 같은 단맛, 그리고 훅 올라오는 알콜의 향.
‘이거 그 뭐냐, 우유 캬라멜 맛인데.’
어째서인지 군대에서 잠 깨려고 질리도록 먹은 우유 캬라멜의 맛이 나서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입가를 쓱 닦았다.
2m에 가까운 늑대 인간이 대접하는 술이라 되게 독하고 쓸 줄 알았는데 안주 없이 먹어도 될 정도로 달콤하네.
“호쾌하게도 마시는군. 나도 부탁할 게 있으니 원하는 대로 들게.”
“부탁?”
흐, 하고 송곳니가 드러나는 짐승 특유의 미소를 지은 그가 말한다.
“이쪽 세상은 참 이상해. 죽음이 두려워 충성을 핑계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려 한 죄인을 떠받들어주질 않나, 수컷에게 조신하라며 몸가짐에 대해 떠벌리는 암컷들이 있지를 않나. 한술 더 떠서 명예니 긍지니 하면서 같잖게 구는 암컷들도 많지.”
낮게 그르렁거리는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어두운 터널에서 크리쳐와 마주했을 때 느끼던 감각.
문명이 아닌 야만이 내 목숨을 위협한다는 그 원초적인 기분.
“꿈, 꿈을 다루는 주술사라 들었네. 그렇다면 내게도 원하는 꿈을 꾸게 해 줄 수 있나?”
그 부탁과 동시에 세상이 빙글 돈다.
불사르는 폭군이나 시들지 않는 거목의 기억을 엿봤던 것처럼 타인의 마력에 휩쓸리는 현상.
마력 다루는 능력은 꽤 늘었지만, 마력의 양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입에 맞아 연거푸 들이켠 술 때문일까.
“음, 내 상대를 해 주려고? 좋지, 수컷 둘이 한 자리에 있으면 서열 싸움이 일어나는 수밖에. 그대에게선 피비린내가 나. 세상 물정 모르는 곱상한 도련님은 아니겠지.”
맨발을 간질이는 잔디의 느낌과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가득 채운 커다란 달.
슈퍼 문이라도 되는지 시야를 가득 채운 새하얀 보름달 아래에서 털을 빳빳이 세운 늑대 인간이 내게 이를 드러낸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시야가 빙글 돌아간다.
꿈속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턱에 강한 충격을 받아서.
대지를 박차고 달려든 늑대 인간이 내 턱주가리에 주먹을 날린 것이다.
성좌끼리 뭔 개 짓거리지? 하고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가슴 깊은 곳에서 짜증이 밀려온다.
‘언제부터 대화로 해결했다고, 씨발.’
고통을 느끼지 않는 분신에, 능력이 제약된 무의식의 세계.
거기서 턱주가리를 얻어맞았는데 대화를 하자고 싸움을 멈출 이유가 있겠는가.
복부를 걷어차 오는 발을 양손으로 붙잡고 그대로 쥐어짜듯이 비틀었다.
냉철한 이성은 저 보름달에서 흘러나오는 마력 때문이라고 냉정해지라 속삭인다.
하지만 한 대 얻어맞고 멍해진 머리는 저 땡칠이를 교육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완전히 무장했다.
암컷이니 수컷이니 전쟁이니 명예니 지껄인 걸 봐선, 개처럼 얻어터지면 어디 가서 소문은 안 내겠지.
현란한 기예도 수려한 기술도 없었다.
“이 개새끼가 진짜!”
고통은 없지만, 퍽퍽 타격음과 함께 시야가 돌아가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감각은 있으니 머리에 피가 쏠린다.
안면을 노리고 위에서 내리 꽂히는 주먹에 이마를 들이박는다.
시야가 돌아가는 와중 되돌아가는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물어뜯었다.
2m짜리 근육 덩이를 맨손으로 패 죽이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크학-! 미친놈이로구만 정말! 살다 살다 흄에게 물릴 줄은 몰랐는데!”
뺨과 귓가에서 우득 소리가 나며 강제적으로 입이 벌려졌다.
대체 왜 싸우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고개를 치켜들지만,
한 대 맞았는데 어떻게 안 싸우냐는 생각이 곧바로 가슴 속 반동분자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한 대 맞고, 한 대 치고.
한 번 맞고, 한 번 물어뜯고.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난다. 침을 퉷 소리 나게 뱉으니 피 섞인 침과 함께 개털이 뱉어진다.
나야 고통이 없어 달려든다 하더라도 털에 땜빵이 나고 털가죽이 피에 젖은 저놈도
뭐가 그리 좋은지 낄낄 웃어대고 있었다.
들판을 휩쓰는 서늘한 바람이 잠시 소강상태가 된 우리 사이를 휩쓸고 지나가자, 그
차가운 감각에 이제야 머리가 조금 식는다.
불사르는 폭군 때도 그렇고, 몽마 특유의 능력 때문인지 타인의 마력에 자꾸 휩쓸리는 것 같은데.
“후우, 이게 부탁이었-”
“누구 마음대로 끝내려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다시 퍽 소리와 함께 시야가 돌아갔다.
돌아간 시야 너머로 핏방울이 초원 위로 흩뿌려지는 게 보인다.
어질어질한 머리에서 이제 이성이 완전히 떠나가는 것 또한 느껴진다.
‘뭔, 술 잘 먹다 말고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정신은 흐려지고 육체는 달아오른다.
머릿속에서 하는 생각과 다른 말이 입 밖으로 절로 흘러나오며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마력이 온몸을 휘감는 게 느껴진다.
잠에 빠져드는 것처럼 정신이 흐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