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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87화 : 성좌, 무기력한 악몽 2 (87/169)



〈 87화 〉87화 : 성좌, 무기력한 악몽 2

동서남북 온 대륙에서 환자들이 몰려온다.

백만 단위로 들어온 포인트에 화들짝 놀랐지만, 아직  길이 멀다는 것도 여실히 느껴진다.
당장 시들지 않는 거목만 봐도 나보다 훨씬 많이  테니까.

퇴역 군인과 은퇴 화신들을 돌보는 것은 충분히 명예로운 일이지만 그게 엄청난 이름값이 되지는 않는다.
나도 전생에 퇴역 군인 복지 센터장 이름 같은  모르고 살지 않았던가.


하긴, 구름을 밟고 뛰어다니며 산봉우리를 베어내는 검객이나,
대륙을 불태우는 우주 전함을 몰고 다니는 황제와 비교하면
정신병을 치료해주는 성좌님은 조금 소박하다는 느낌이 있다.

첫술에 배부를  없다는 속담이 정확한 것이다.

‘백만 포인트짜리 첫술, 좋네.’

뭐, 목에서 찰그락거리는 보라색 펜던트를 보면 가슴이 든든해지는 기분이 든다.
RPG 게임처럼 고가의 장비를 하나하나 맞춰가는 기분이라 해야 할까.
계약서 10만 포인트를 위해 절약하던 게  년  이야기인데,
이제는 100만이 넘는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었으니까.

목에 뭘 거는 건 군번줄 이후 처음이라 조금 어색하지만 120만 포인트짜리 귀한 물건이라 꾹 참을 수밖에.
거기에 120만 포인트 따위는 별거 아니게 된 상황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김하은과 이하린이 자리 잡은 건물로 향했다.

보이는 것은 수많은 환자와 간병인들.


퇴역 군인이면 별 상관없지만, 은퇴 화신의 경우 성좌들이 권능을 회수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
자신의 화신에게 나름의 정이 들었는데 쓸모없어졌다고 권능까지 전부 회수하면 좀 그렇지.

거기에 성좌로서의 명성에도 먹칠하는 꼴이니까.


그 때문에 정신병에 걸린 화신 하나에 간병인이 다섯 명 정도 붙어 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언제 어떻게 난동을 부릴지 모르니까 아카데미 내부를 순찰하는 화신들도 이쪽에 집중된 상황.

“오셨습니까, 성좌님?”


[성좌, 구름을 울리는 우레가 자신의 화신을 걱정합니다]
[성좌, 넘어지지 않는 탐구자가 현세를 노니는 몽마에게 호기심을 느낍니다]
[성좌, 질주하는 불꽃이 정교한 분신에 감탄합니다]

그와 동시에 몇몇 성좌들이  분신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역시, 엘프인 시들지 않는 거목이 정령을 이용한 분신술에 능숙하지 않더니만,
다른 성좌들도 그녀처럼 분신을 잘 다루지 못하는 건가.

RPG 게임에 비교하자면 일종의 종족 특성이겠지.
하긴 분신을 잘 다룬다면 나처럼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 오늘도 몇 가지 물건이 왔습니다.”


보라색 장막 속에서 안개로 만들어진 괴물을 흐트러트리던 김하은이 내게 다가온다.
무려 100만 포인트가 고작 100만 포인트가 되어 버린 이유.

다른 성좌들과의 연결 고리다.
나도 고작 1년 얼굴 맞대고 지낸 세 화신에게 이토록  빠졌는데.

“질주하는 불꽃 님이 평온과 안식의 성화를 보내셨습니다. 환자들이 머무르는 기숙사에 꼭 배치해 줬으면 한다고.”


 년 넘은 베테랑 화신이 정신과 영혼에 상처를 입은 꼴을 본 성좌의 기분은 어떨까.
포인트로도 치료할 방법이 없어 고민하고 있는데 그걸 고쳐 줄 수 있는 다른 성좌가 나타난다면?


당연히 뭔가 바리바리 싸 들고 오겠지.

“그러면 성화는 기숙동에 배치하고, 나머지 재물들은 총장에게 넘겨주렴.”

사람 사는 곳은  비슷하기 마련인지라, 성좌들 중에서도 다양한 이유로 선물 공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당장 질주하는 불꽃이 환자 케어용으로 보내준 성화 말고도 다양한 것들이 아카데미로 배송되고 있었으니까.


저 성좌들도 몽마에게는 뭘 줘야 하는지 잘 모르고,
나도 뭘 선물로 달라고 대놓고 말하기는 어려워서
대부분 아카데미와 환자들을 위한 선물이 배송되는 중이지만 그게 어딘가?
나를 위한 성역을 만들 때 들어간 재료들이 꽤 값비싼 물건들이었으니 그걸 충당시킬 수 있겠지.

아카데미가 풍족해지면 이하린과 김하은도 덩달아 풍족해지니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여기서 욕심을 부려 아카데미에 갈 몫을 내가 챙기는 것도 좀 추하고.
업무 대부분은 아카데미와 이하린이 전부 하고 있지 않은가.

김하은과 나는 그저 마력으로 슬쩍 거들기만  뿐.

그리고, 내게 직접 선물을 보내도 반응하기가 조금 곤란하다.

[성좌,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가 마음조차 아름다운 당신에게 선물을 보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새끼들.

내게 오는 선물은 크게 세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번째는 ‘의사’인 내게 보내오는 선물.
질주하는 불꽃이 보내준 성화처럼 환자들을 돌보는 데 사용할 것들이다.
시들지 않는 거목도 정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화분을 잔뜩 보내줬고,
 외에도 수돗물 대신 사용하라며 성수가 흘러나오는 미니 분수 같은 게 설치되었다.


두 번째는 ‘성좌’인 내게 보내는 선물들.
포인트와 제물로 사용할 수 있는 귀중품이다.
남 대륙의 사냥꾼들이 보내오는 번제용 순결한 짐승부터
임시 성역을 확장하고 증축하는 데 사용하라며 오는 다양한 귀금속들까지.
이런 것들은 내가 쓸 수도 없으니 아카데미 총장에게 양도하고 있었다.
성역 만드는 데 쓴 비용 겸 우리 애들 잘 봐달라는 뇌물의 의미가 강하다.


마지막 세 번째. ‘남자’인 내게 보내는 선물들.
이게 반응하기 참 애매하다. 향수와 타이, 손수건과 꽃다발, 보석 달린 목걸이나 반지들.
마력이 담긴 것도 아니고 그냥 이쁘기만 해서 아카데미에게 양보하기도 애매하고, 내가 착용하기도 귀찮은 물건들.


물론, 거절할 이유는 없다. 주면 포인트로 다 바꿔 써야지.

“그래서, 이쪽이?”

“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물건만 받고 모른 척하지는 않는다.
나름의 특별 대우로 내가 환자를 직접 봐주는 노력은 하고 있으니까.
마력을 더 잘 다루는 것은 김하은이다.

하지만 남녀 역전 세계에서 남성 성좌가 남의 화신을 직접 치료해준다는 것은 꽤 치켜세워 주는 행위니까.


적어도 몇만 포인트는 될 법한 물건을 받았는데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지.
그리 생각하며 부축을 받으며 들어온 금발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낭만을 노래하는 무훈시라는 이름답게, 서대륙에서 온 것 같네.








한껏 치장한 젠틀맨들이 자신의 타이를 풀어헤친다.
출정을 준비하는 기사들의 갑옷 장식에 형형색색의 타이들이 곱게 묶인다.
공훈을 세우고 돌아오면 옷자락을 풀어헤치겠다는 은밀한 신호였다.

고운 사내들의 부드러운 배웅에 기사들의 사기가 치솟는다.


자신만만하게 창을 들어 올리는 동료들과 달리, 내 가슴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오늘따라 몸을 감싼 갑옷이 관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쿵쿵,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금속의 소리.

특제 갑옷에 성좌님의 축복까지 받아 천으로 만든 옷처럼 가볍지만,
그 미세한 소음과 약간의 무게감마저 나를 심해 밑바닥까지 끌어 내리는 손아귀처럼 느껴진다.


‘뭔가, 위험해.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가슴이 불길하게 두근거린다.
위풍당당하게 출전을 나서는 모습에 가슴이 웅장해지고 든든한 안도감이 들어야 하는데
어째 절벽 위로 달려가는 짐승의 무리가 된 기분이 든단 말인가.

그리고 아까부터 느껴지는  불길한 기시감은 무엇이고?

이대로 출전한다면 전부 죽을 것이다.


심장이 가쁘게 뛰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좁아진 시야에 잠시 휘청이자 들숨이 꼬이며 호흡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으니 갑작스레 옆에서 누군가 부축을 해 준다.
그와 함께 코끝을 파고드는 청량한 향기가 어두워진 시야를 탁 트이게 해 준다.

“아, 감사합니, 다?”


“...”


서대륙에서 흔히 보기 힘든 새카만 머리카락.
조각가가 자로 재서 조각한 것과 같이 아름다운 황금비율의 얼굴, 걱정 대신 격려를 담은 것 같은 자상한 눈길.
당신은 누구시냐고 묻기도 전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깨 견장에 보라색 넥타이가 곱게 묶여 있었다.


‘뭐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말발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군인들이 관문을 열고 포병들이 지원 사격을 준비하는 것 또한 보인다.
코끝에 느껴지는 화약 냄새와 귓가를 울리는 포성에 늘 전장을 함께하던 애마도 푸릉푸릉 거친 콧김을 내뿜는다.

어째 기억이 일부 사라진 것 같지만 아무튼 관문이 열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 동료들과 함께 말을 몰고 나가 저 증오스러운 괴물들을 무찔러야 한다.


문이 열리고 준비를  틈도 없이 괴물들이 밀고 들어와
군인들을 도륙하는 망상이 잠시나마 가슴 한구석에서 머리를 치켜들었지만,
홍차에 녹아드는 각설탕처럼 사라지는 것 또한 느껴진다.


갑옷 너머로부터 느껴지는 따듯한 온기.
어깨에 묶인 보라색 타이가 세상 무엇보다 든든하게 느껴진다.

“명예를 위하여-”

“““영광을 위하여!”””

면갑을 내리자 시야가 좁아진다.


채 열리지 않은 문 옆에서 우리를 배웅하기 위해 군인 하나가 멋들어지게 경례를 올리는 게 보인다.
 문을 비집고 들어오는 괴물도 보인다. 저 뒤로 무수히 많은 괴물이 쏟아져 들어오며
우리를, 나를 처참하게 살해했겠지.


 번이고 반복된 악몽.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밀고 나가앗-!”

고삐를 쥐고 박차를 가했다.


성좌께 축복받은 말이 지축을 울리며 땅을 박찬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는 군인, 경례를 올린 팔을 뜯어 먹기 위해 아가리를 벌린 짐승과 닮은 괴물,
갑작스러운 돌진에도 한 몸처럼 호응해주는 동료들의 고함-

세상이 다시 한번 느려지고 좁아진다.

날카로운 이빨로 군인의 팔을 뜯어 먹으려던 괴물이 기마창 끝에 꿰여 으스러진 육편으로 변하는 것이 보인다.
마력이 깃든 창 끝자락이 괴물의 파도에 눌린 관문을 박살 내며 밀고 나아간다.

늘 꾸던 악몽과는 전혀 다른 풍경.

말발굽이 시체 조각을 밟고 나아간다.
발굽이 바닥을 몇 번 박차니 성좌께서 내린 축복이 우리를 바람보다 빠르게 달리도록 돕는다.
우리에게 타이를 메어주던 젠틀맨들이 손에 손을 잡고 성좌께 영광 바치는 노래를 부른다.
고운 음색의 찬송가가 들려오며 감히 이를 드러내는 괴물들을 묶는다.


심장 고동과 함께 가슴을 울리는 기묘한 열기가 목구멍을 비집고 절로 흘러나온다.

“흐핫, 아하하하! 밀어, 밀어, 밀고 나가앗!”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다만 선봉에  나를 따라오는 무수히 많은 발굽 소리만 들려올 뿐.
좁아진 시야 너머로 수백 수천의 괴물들이 보이지만 두려움 따위가 가슴에 들어올 수 없었다.
기묘한 충족감이 용기와 함께  심장을 가득 채웠으니까.

말을 달려괴물의 파도를 뚫고 나간다.
어질어질한 시체의 밭 끝자락에는 드넓은 초원이 있었고,  끝에 새하얀 건물이 보인다.
말 머리를 돌릴 생각도 하지 않고 무아지경에 빠져 앞으로 말을 몰았다.


어느새 동료들의 발굽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깊은 물에서 빠져 나와 심호흡을 하듯,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손수건을 묶어  남성.


살며시 웃어 보이는 그 아름다운 젠틀맨에게 타이를 풀어 영광과 함께 바치려 들었지만,
손끝에 느껴지는 것은 강철 견갑에 묶인 타이가 아니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선배?”

부드러운 환자복과, 나를 부축하고 있는 후배 녀석.


“이게, 이게 무슨 상황...?”

“정신을 차리셨네요!”

와악! 하고 달려드는 녀석들의 포옹에 얼굴이 가슴에 문대진다.
여자끼리 더럽게 뭐 하는 짓이냐고 역정을 내고 싶었지만
휘두르려는 주먹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몸에서 힘을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설명 들은 것은 몇 분이나 여자끼리 몸을 부대낀 뒤.

조금 빨리 설명을 해 줬으면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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