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85화 : 취미 2
문학의 질이 높아지고 예술을 담당하는 성좌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즐기는 서브 컬쳐는 우리 세상과 매우 비슷했다.
유행하는 내용이나 장르는 화신과 성좌가 존재하는 만큼 조금 다르지만
결국 웹툰과 소설을 읽고 게임을 하며 인터넷 방송인을 보고 낄낄대는 부분은닮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게 제가 보는 사이트인데, 얼마전부터 뭘 잘못 먹었는지 여독자들한테도 자꾸 백합관이니 뭐니 하는 광고를 보내더라구요. 근데 제가 어플 설정을 잘 몰라서... 성좌님? 듣고 계신 거 맞죠? 이상한 오해 하시는 거 아니죠?”
그 덕에 낚아챈 스마트폰 속 소설 사이트 어플은
내가 전생에 사용했던 것과 UI는 완전히 다르지만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등 뒤에서 감히 스마트폰을 뺏을 수 없으니
내 허리에 팔을 감고 필사적으로 설명하는 한예지의 말을 대충 흘려 넘기며 웹 소설들을 구경하였다.
얼떨결에 질질 착즙하는 여성으로 몰린 한예지가 백허그를 하고 어깨에 턱을 올린 채 애원하지만,
체감상 십몇 년 만에 잡아보는 웹 소설 사이트인데 놔줄 수는 없었다.
드라마와 영화는 명작들이 엄청나게 많았지.
예전에 분신을 사용 못 할 땐 한예지네 집 TV에 영화를 틀어놓고
성좌의 공간에 있는 TV 스크린을 통해 간접적으로 감상했는데.
이제는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사이트의 베스트 작품들을 찾아보니 유행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성좌에게 선택받았지만, 모종의 사유로 대륙 내각에 남아 남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현대 판타지 역하렘물,
과거로 돌아가 현대의 지식을 사용해 큰 피해가 일어났던 침략을 막아내고 총애받는 화신이 되는 대체 역사물,
화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재능으로 아카데미의 교관이 되어 여러 성좌의 컨택을 받는 아카데미물.
그 외에도 성좌에게 받은 지식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구는 기업 경영물이나
부잣집 망나니였지만 성좌께 재능을 인정받고 정신을 차리는 재벌물이나
성좌께서 재능 넘치지만 나태한 화신을 벌하기 위해 영혼을 바꾸는 것으로 시작하는 망나니물까지.
현대인의 생활에서 성좌와 화신을 빼먹을 수 없는지
무조건 성좌와 화신이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내가 대학 다닐 때 읽던 소설과 별다른 게 없어 보인다.
“그, 성좌니임?”
“가만 있어 보렴. 재밌어 보이는 게 몇 개 있구나.”
한예지가 보지도 않는 GL물을 자꾸 광고한다고 성토한 것이 맞는지,
그녀의 선호작 목록에는 GL과 관련된 소설은 딱히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가 불안해하는 이유는 아마 다른 것이겠지.
사이트가 성인용 소설 메인인지 대부분 새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으니까.
베스트 작품을 위에서부터 쭉 읽는 것 같은 한예지의 소설 목록이었지만,
그 베스트 작품들이 전부 새빨간 딱지가 붙어 있는 상태로 연재하는 상태.
그 때문인지 등 뒤에서 그녀의 심장 뛰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는 게 느껴진다.
명작 속으로 들어가 스토리를 바꾸는 대가로 예술의 성좌에게 포인트를 받는 소설이나,
여남 역전 세상에 들어가 여자인데도 남자들에게 떠받들어지는 소설 같은 건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감상하면 뒤에 있는 한예지의 심장이 터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긴장하고 있어서 그만두었다.
“휴...”
그러다가 문득 호기심이 들어 인터넷 어플에 들어갔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TV 영상 매체도 봤고,
웹 소설과 웹툰 같은 전자 도서 매체도 봤는데 아직 못 본 게 하나 남았으니까.
“흐엑! 성좌님 잠시, 잠깐만요 진짜루!”
주소록을 눌러 자주 가는 사이트에서 야동 사이트가 없나 보려 했더니,
화들짝 놀란 한예지가 온몸으로 나를 누르며 스마트폰을 빼앗아 간다.
남에게 폰 보여줄 일이 없으니 방문 기록을 지우지 않는 걸까?
성좌를 몸으로 짓누르는 건방진 행동이지만,
얼굴 한 가득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 덕분에 참을 만 했다.
와이어가 얼굴을 찌르지 않는 걸 보니 잠잘 때는 속옷을 벗는 편이구나.
“왜, 못 보여 줄 거라도 있니?”
스마트폰을 위해 엎치락뒤치락 가벼운 몸싸움을 한다.
내 기준으로는 애정 어린 남녀 간의 가벼운 장난질이고,
한예지로서는 판도라의 상자를 지키기 위한 필사적인 싸움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결국 호기심이 이기기 마련.
까놓고 말해서 아카데미 임시 성역에서 공물로 받은 스마트폰으로 야동 사이트를 검색하는 것보단,
한예지 폰으로 검색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 성좌님, 잠깐, 진짜 잠깐만요.”
“기록 지우려고 그러지? 내가 그거 보려는 건데.”
이불 속에서 딱 달라붙어 엎치락뒤치락 꿈틀댄다.
한예지는 폰을 가지고 새우처럼 몸을 말고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고,
나는 그런 한예지의 옆구리나 가슴, 팔뚝 쪽을 툭툭 건드리며 괴롭히는 상황.
가벼운 잠옷 차림 때문인지 말캉말캉한 여체의 감촉이 느껴져 괜스레 손에 힘이 들어간다.
그러다 어두컴컴한 이불 아래에서 서로 눈이 마주친다.
스마트폰의 불빛으로 거슴츠레 보이는 어벙한 얼굴.
얼굴과 얼굴이 딱 마주 보는 상황에 어색하게 헤헤, 웃으며 방심하는 한예지의 모습을 보고
마주 웃어주며 몰래 손을 뻗었다.
※
남녀의 관념과 정조가 역전된 세상.
그러한 세상에서 남성이자 성좌인 나는 이런 사소한 장난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스마트폰 좀 보겠다는데 그걸 무슨 수로 막겠는가.
어차피 한예지가 야동 사이트에 즐겨찾기 같은 걸 해둘 리 없고.
“오, 여자들은 이런 거 좋아하니?”
“네? 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저런 표정을 지을까.
얼떨결에 내 품 안에서 포르노 사이트 가이드가 된 한예지가 형용할 수 없는 애매한 표정으로 내게 설명을 해 준다.
살색이 난무하고 신음이 넘쳐나는 사이트를 남자 품 안에서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한가 보다.
세상도 남녀의 정조관념도 다르다 해도, 미적 관념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포르노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새하얀 피부에 금발을 자랑하는 몸매 좋은 남성들이었다.
제 물건 우람한 것을 자랑하는 표지가 잔뜩 보이지만
동시에 여성의 성기도 적나라하게 쩍 벌리고 노출되어 있어 그닥 역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긴, 야동 보러 가서 남자 꼬추에 화내면 그게 정신병자 아니겠는가.
저걸 열심히 쑤시는 꼴을 보러 가는 게 포르노 사이트인데.
물론 소수의 취향으로 쑤셔지는 게 아니라 비벼지는 꼴을 원한 사람들도 있긴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그렇게 사이트를 슥슥 둘러보다 보니 희한한 것들이 꽤 있었다.
“저게 기분이 좋아 보이니? 뭐 아무것도 없는데.”
“그, 좋으니까 하는 게 아닐까요?”
성행위의 남녀 역전 버전이라 해야 하나?
가슴팍이 송판같이 넓데데한 남자의 위에서,
하반신만 알몸인 여자가 열심히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막대기가 아니라 가슴판 위에서.
헬스장 가면 무게 좀 치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은 거대한 가슴 근육에
자신의 축축히 젖은 음부를 열심히 비비는 여성.
저게 기분은 좋을까 싶었지만 포르노 스타 카테고리 답게 남녀 모두 열에 달뜬 얼굴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인지부조화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외에도 남성의 팔뚝을 제 가랑이에 끼우고 허리를 앞 뒤로 흔드는 여성,
남성이 의자에 앉은 자세로 있자 남성의 무릎에 열심히 비벼대는 여성,
남성이 딜도를 들고 와 쑤셔주는 걸 즐기는 여성까지.
남녀의 상황을 바꾸자면 전생의 포르노와 비슷한 것 같긴 하지만,
이렇게 변형된 모습으로 보니까 포르노보다는 19금 개그 프로처럼 보인다.
왜 성진국에서 가슴 보고 사람 맞추기 같은 걸 하는 꼴리지 않는 성인 예능처럼.
“이 중에 해보고 싶은 거 있니?”
“아뇨, 아뇨! 없는데요.”
한예지에게도 조금 어색한 장르였는지 내 질문에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젓는다.
구경할 만한 것은 다 봤고, 여기서 카테고리를 조금 더 옮겼다가는
여자 말고 남자가 포르노에서 무슨 꼴을 당하는 지 볼 것 같아서 주저 없이 사이트를 종료했다.
내가 궁금한 건 여성의 알몸이지 남자의 알몸이 아니니까.
만약 여기서 흥분한 남성의 얼굴이나 타인의 극대쥬지 껄떡거리는 걸 클로즈업 한 영상을 보면,
기분 좋게 달아오른 몸이 차갑게 식어버릴 것 같았다.
품 안에 가벼운 잠옷 차림의 여성을 껴안고,
그 여성의 손으로 포르노 사이트를 함께 보는 야릇한 상황.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웹 사이트를 종료하고 스마트폰을 건네 주자 그제서야 안색이 돌아온 한예지가 슬그머니 폰을저 멀리 보낸다.
김하은이라는 세기의 천재에 비해 재능이 뒤떨어지는 거지,
그녀 또한 마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으니까.
산들바람을 탄 나뭇잎처럼 스마트폰이 저 멀리 있는 책상 위에 안착한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품 안에 있는 한예지의 몸을 살살 어루만졌다.
말캉한 가슴부터 슬슬 복근이 보일락 말락 하는 매끈한 배를 쓰다듬다, 슬그머니 바지춤에 손을 넣으며.
슬금슬금 달아오른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는지 바지 안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하기야, 나의 분신도 가벼운 차림.
사랑하는 성좌의 품에 안겨 포르노를 몇 편이나 강제 시청했는데 반응이 없으면 고자... 여자는 뭐라 부르지?
석녀? 아무튼 그런 불구가 아니겠는가.
한예지의 취향이 아니더라도, 일단 여성을 노리고 만든 포르노들인데.
슬금슬금 허벅지와 습해지는 그녀의 속옷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니 부드러운 손길이 내 고간을 쓰다듬는 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야한 꿈도 제대로 못 꿔서 자각몽이 깨지던 한예지가 이제 먼저 손을 뻗을 줄도 알게 되었구나.
별 이상한 곳에서 감격에 젖어, 그대로 그녀의 속옷을 슬그머니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