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84화 : 쇼핑
김하은의 무의식을 마지막으로 탐방하고 나니 벌써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무의식의 공간에서 숨겨진 욕망을 전부 해소한 화신들이 평소보다 쌩쌩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일과를 시작하는 게 보인다.
그 모습을 TV로 슬쩍 내려보다가 모니터 앞 의자로 옮겨 앉았다.
시들지 않는 거목이 선물한 나무 가구들은 다 좋은데, 의자가 두 개인 점은 좀 귀찮네.
나중에 포인트로 바퀴 달린 의자를 구매해서 이리저리 밀고 다녀야지.
생각난 김에, 포인트로 쇼핑이라도 좀 할까?
명품 의자를 원하는 건 아니니까, PC방에서 볼 법한 바퀴 달린 의자를 10포인트 언저리를 주고 구매했다.
그렇게 의자를 구매하니 남은 것은 백만 단위의 포인트.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싶어 의자 기댄 등을 뒤로 쭉 젖혀 스트레칭을 했다.
기지개를 켜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보이는 숫자의 자릿수는 여전했다.
드림 테라피를 시작한 지, 고작 하루 지나지 않았나?
이제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하루가 지났다고 말하기도 어려운데.
복잡한 마음으로 슬쩍 모니터를 보니 아카데미 섬의 항구가 미어터지고 있었다.
구속복을 입은 사람들도 보이고, 간병인에게 기대 침을 질질 흘리면서 절뚝거리는 사람도 보이고,
귀마개에 안대까지 한 상태로 업혀서 오는 사람까지 있었다.
전 세계 유일한 화신들의 교육 기관이라서 그런지 동서남북 온갖 인종의 환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상황.
환자들의 인파를 보니 그제야 ‘가벼운 마사지 가게’ 따위를 생각 한 내가 얼마나 세상 물정 모르는 놈인지 알 수 있었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전생의 심리 상담도 사람들이 꽤 이용하는데,
무려 성좌가 주관하고 효과가 100% 있으며 아카데미가 보증한 드림 테라피라면 사람들이 얼마나 몰려오겠는가.
그리고 저 사람들에게 퍼진 것이 전부 입소문으로 돌아 오는 거지.
불사르는 폭군의 전함 유지비가 억 단위였던가.
그런 최상급 성좌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수익이 10배로 늘어났는데 기분 나쁠 리 있나.
이 정도 모였으면 좀 써도 되겠네.
정말 오래간만에 모니터에서 상점 창을 열었다.
편린을 흡수해서 그런지, 아니면 포인트가 잔뜩 늘어나서 그런지 처음 보는 품목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무슨 게임 업적 열리면 상점도 열리는 것도 아니고,
전에 시들지 않는 거목과 연결되고 나서 갱신된 것처럼 한 번 더 뭐가 생겼나 본데.
포인트를 아낄 생각 따위는 없었다.
급하게 포인트가 필요할 일이 생긴 적도 없으니까.
전부 화신들에게 사용해서 그녀들을 강화하는 게 훨씬 현명한 소비 아니겠는가.
내 성장이야 김하은과 이하린의 드림 테라피 덕이나 보며 마력과 악몽의 편린만 얻어도 되고.
마우스를 드륵 드륵 내리다 보니 슬슬 비싼 장비들도 보인다.
그러니까 전에 봤던, 수백만 포인트 하는 휘황찬란한 아이템들 중에서는 가장 싼 놈들.
뭔 피 묻은 짱돌에 최초의 살인 도구라는 거창한 이름 붙여놓고 120만 포인트에 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성좌나 신화에 관련된 것 같은 장비들이 있다.
‘공용 권능이냐, 장비 맞춤이냐...’
드림 테라피가 벌어오는 수익은 조금씩 늘어나면 늘어났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면 RPG 게임 장비 맞추듯 장비 한 부위씩 구매해서 맞춰줄 수 있지 않나.
아니면 몽마의 권능 중 내가 배워서 세 화신에게 전부 도움이 될 법한 걸 찾아도 좋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적어도 10만 포인트는 남겨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또에 맞으면 어쩌지? 같은 망상이지만,
김하은 같은 마력의 천재를 만났는데 계약서 구매할 포인트가 없으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정말 급하면 시들지 않는 거목에게 빌려도 되겠지만 남자가 가오가 있지.
세계수 가지야 통신용이고, 지난번 포인트야 온종일 열 번 넘는 제사를 지내면서 받은 거니까 괜찮다.
하지만 포인트가 부족하다고 여자애한테 급하게 땡겨온다?
차라리 계약서 포인트를 획득할 때까지 분신을 보내 육탄 공격으로 묶어두고 만다.
‘장비냐, 권능이냐. 골 아프네 이거.’
그런 다짐을 하며 목록을 자세히 살펴보니 몽마용 장비들은 권능처럼 90% 할인을 하는 게 보인다.
거 창조주 양반, 컨셉질을 얼마나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렇게 할인된 장비들을 보니 더욱 골치가 아프다. 잘만 하면 장비를 두세 개는 살 수 있을 테니까.
전생의 친구 중, RPG에 미쳐 있는 놈이 게임 이벤트를 참여할 때마다
엑셀로 만든 함수표로 구매 계획을 짤 때 비웃던 업보가 이제야 돌아오는 것인가?
머리 아픈 계산은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매달 들어올 수입인데 계속 고민하느니 바로 써버리고 말지.
곧바로 마우스를 움직여 목록에서 눈여겨 봤던 것을 선택했다.
※
숨 가쁜 일상이 흘러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느긋한 것은 취직한 상태인 한예지.
그녀는 근무표가 짜여 있으니 갑자기 테러 조직이라도 등장하지 않는 이상 근무 시간이 딱딱 지켜질 것이다.
반대로 이하린과 김하은은 몰려드는 퇴역 군인들 때문에 정신없이 돌아다니고 있었고.
바닥부터 기둥, 천장까지 마법진으로 꽉 채운 강당에 환자들이 들어오면,
이하린이 마법진을 발동시키고 김하은이 마력을 조종하는 방식으로 한 번에 50명씩 치료를 시도하고 있다.
문제는 손님이 몰려오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점.
그렇게 온종일 혹사당하는 두 명이지만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는다.
되려 뺨에 혈색이 돌고 신수가 훤해지는 게 보일 정도.
당연하지만, 내가 구매한 아이템 때문이다.
목록에는 유용한 물건들이 너무 많았다.
한예지에게 특등 저격수를 위한 공용 권능 세트를 선물해 줄 수 있었고,
이하린에게 정보와 지식을 정리해주는 인공 정령 같은 걸 구매해 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독보적으로 앞서나가는 김하은의 성장을 한층 더 빠르게 밀어줄 수도 있었고.
뭐를 구매해도 확실한 이익이 있다 보니 고민하며 쇼핑을 하다 찾아낸 물건 하나.
- 자색 달 조각 펜던트 : 연(聯) [1,200,000pt]
아슬아슬하게 10만 포인트만 남기고 전 재산을 지불하여 구매한 것이 목걸이 하나.
세트 효과라도 있는지 연(聯) 말고도 다른 한자도 있었지만, 설명을 읽고 구매한 것은 저것 하나였다.
이름 그대로 성좌가 장착하면 화신들과 딱 하나를 공유하게 해 주는 아이템.
마력 다루는 실력이나 이쪽 세상에 대한 지식 같은 건 내가 화신들보다 못하다.
하지만 성좌로서 화신들보다 뛰어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종목이 딱 하나 있으니까.
바로, 체력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성좌의 공간이나 임시 성역 속에서 나가질 않는다.
그리고 몽마는 자신의 꿈속에서 무적에 가깝지.
아무나 다 때려잡는다는 뜻이 아니라 체력과 정력적으로 지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진짜 괴물 같은 화신들이나 포인트 재벌 성좌들에게 까불면 자각몽째로 마력에 쌈 싸 먹혀
곧바로 대가리가 터지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나의 체력을 화신들에게 공유해 주는 것이다.
무려 120만 포인트나 처박았는데 있는 기능이라고는 체력 공유지만,
화신 한 사람당 40만 포인트씩 사용해 영구적인 체력 버프를 걸어줬다고 생각하면 괜찮게 느껴진다.
꿈속에서 내가 가지고 있으니 파손이나 분실의 위험도 없고.
백만 포인트가 넘어가는 아이템을 화신들이 부숴 먹는다면 속이 매우 쓰릴 것 같긴 해.
“그렇다고 해서 밤새워 논문 읽을 생각 하지는 말고.”
“잠자는 시간을 조금만 더 줄이는 건...”
“퇴역 군인들이 너무 많은데 업무 시간을 새벽에 좀.”
“...”
일단 밤새도록 논문을 읽으려는 이하린과 밤새도록 악몽을 착취하려는 김하은을 막아 세우는 게 먼저.
아이템의 효능을 설명해 줬더니 슬그머니 잠 자는 시간을 줄이고 일을 하려 들었다.
여러 감정을 담아 슬그머니 눈동자를 내리까니 안절부절못하는 두 화신.
잠을 줄인다는 게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겠다는 소리니 강하게 밀고 나오질 못하는 게 보인다.
아무리 지치지 않는다 해도 건강 관리는 알아서 해야지.
“알겠습니다. 잠자는 시간은 안 줄일게요.”
“예, 새벽에는 좀 쉬어야겠죠.”
어색하게 같이 온 두 명이 어색하게 같이 나간다.
지난번 대화하다 말고 이하린이 설정 오타쿠답게 급발진을 해서 그런가.
같이 일하게 되었으니 좀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아닌가? 생각해 보면 꿈에서 몽마가 야한 일 하는 거 아니까 서로 어색할 수밖에 없나?
그렇게 두 사람의 건강을 위해 잔소리를 조금 한 다음,
아카데미의 임시 성역에서 다시 화신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당연하지만 자색 달 조각의 효과를 받은 한예지를 보기 위해서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잠은 제 시간에 자는 거라고 조언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퇴근한 한예지가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며 스마트폰을 들여 보고 있었다.
하루에 6시간은 자야 피로가 풀리는데, 4시간만 자도 피로가 풀리는 상황.
2시간의 여유가 생겼으면 푹 쉬던가, 성장을 위한 단련을 하라고 버프를 준 거지.
밤새도록 인터넷 보라고 준 게 아닌데.
어째 조금 꼰대가 된 기분이지만, 40만 포인트짜리 체력 버프를 받고
저녁을 먹자 마자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잔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체력이 중요하다고 충동적으로 구매해서 그런가, 본전은 뽑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드네
곧바로 한예지의 방에 분신을 내려보낸다.
“뭘 그리 재밌게 보니?”
“으왁!”
대놓고 이불 속에 분신을 보내 허리를 껴안는다.
자기 이불 밑에서 누군가 갑자기 자신을 껴안으니 화들짝 놀란 한예지가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친다.
스마트폰에 입술과 앞니가 찍힐까 곧바로 손을 뻗어 잡아주었다.
“서, 성좌님?”
갑자기 한예지가 꿈틀거리길래 왼손으로 허리를 감고 제압했다.
오른손에 삐뚜름히 잡힌 스마트폰 화면 때문인가?
또 게임 방송이나 보고 있나 싶었지만 의외로 보이는 것은 웹 소설 사이트.
하긴 이런 쪽 문화는 우리 세상이랑 다를 게 없어 보였으니까.
[눈물이 질질(GLGL),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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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예지야. 그러니까... 그럴 수 있지.”
“아니에요! 제가 보는 게 아니라, 이 사이트가 그냥 막무가내로 광고를 해서 수신 차단 중이었어요!”
내 시선에 화들짝 놀란 한예지가 자신의 성적 취향을 어필하듯 황급히 나를 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