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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화 〉83화 : 욕구해소 4 (83/169)



〈 83화 〉83화 : 욕구해소 4

물도 먹여주고 밥도 먹여주는 수준으로 시중을 드는 이하린의 욕망에서 벗어나 다시 화면을 바라본다.
높게 떠 있던 달은 어느새 슬그머니 내려온 상태.

욕탕에서 나른하게 봉사를 받다 보니 시간 가는  모르고 멍하니 있었나 보다.
겪은 일이라고는 온탕 수중 펠라 밖에 없는데 시간은 한예지의 망상과 비슷하게 흘렀으니까.


‘김하은은, 여기 있네.’

아직 짐을 다 정리하지 못했는지 1인용 기숙실에서 침대를 둘러싼 박스 더미와 함께 잠을 자는 김하은을 찾아냈다.
새벽부터 일어나는 화신들의 일상을 생각해 보면 남은 시간이 얼마 없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나를 이끌었다.


고작 화신 세 명인데 두 명만 보고 멈추면 찝찝하잖아.

보려면 한 번에  봐야지.

마음을 다잡고 그녀의 자각몽으로 들어간다.
낮에 있었던 거대한 제사가  인상 깊었는지 오늘의 자각몽은 헬스장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꾸고 있네.
아카데미 운동장에서 열심히 운동 중인 김하은에게 곧바로 접근했다.

“아 성좌님, 오셨습니, 깍?”


“일단, 자렴.”

훅훅 거친 숨을 내쉬며 달리던 김하은이 내 앞에 서서 숨을 고르기도 전에, 똑같이 이마를  찔렀다.
마력 다루는 것에 능숙하지 않아이렇게 트리거가 될 행동을 해야 편하게 권능을 다룰 수 있으므로.


“으음, 무슨 일이신지?”


“저항하지 말고 좀 들어가렴.”

그 와중에 뛰어난 마력 감응 능력으로 무의식에 빠져들지 않는 김하은.
그렇게 한 번 버틴 그녀의 이마를 툭툭  번 더 건드린다.

내 말을 듣고 나서야 반사적으로 자각몽에 매달리던 그녀가
몸에 두른 마력을 풀어헤치고  뜻대로 무의식 속에 빠져든다.

이 와중에 자기 자각몽이라고 한  저항하는 거 봐라, 진짜.

느릿하게 무의식 속으로 빠져드는 김하은을 따라 나도 그녀의 무의식 세계로 향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전쟁터. 전에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하은이 가장 인상 깊게  것은 불사르는 폭군의 행사였으니까.
괴물을 통쾌하게 쓸어버리는 모습에 열광하는 것이 그녀의 욕망.

본 것을 또 보는 것만큼 지루한 일이 없다.
이름난 명작들이야 다시 읽는다지만 이런 단순한 꿈을 반복할 이유가 있겠는가.
약간의 실망감과 함께 곧바로 떠나려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김하은이 없었다.


전에는 불사르는 폭군의 군대처럼 설치된 기관포를 난사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네.


그러면 다른 욕망이 있다는 건가?

호기심이 나를 전장으로 이끌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늘 높은 곳에서 빗방울보다 더 많이 쏟아지는 폭격.
붉은 빛기둥으로 만들어진 소나기에 대지가 뒤집히고 용암이 치솟아 오르며 괴물들을 박살을 내는 전장으로.

전장에 다가가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지난번 꿈과는 매우 달랐다.


“밀어, 밀어, 밀어!”
“우, 우, 우!”
“섭리의 흐름이 함께 하리라!”
“등불 하나가 전장을 밝히리!”


대지가 뒤집히고 용암이 치솟는 와중에
야만적인 외침과 땀내 나는 구호로 합을 맞추며 괴물들과 육탄전을 벌이는 근육질의 여인들이 있었다.
원시인들이 매머드를 몰이 사냥하듯 근육질 덩어리들이 건물만 한 괴물들을 한 곳으로 밀어내면
냉병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이 구름과 바람을 밟고 괴물 사이를 누빈다.


언덕 저 너머에서는 현대식 군대가 자주포와 탱크를 몰고 와 쉬지 않고 포격을 발사하고,
게임에서 나올 법한 포탑에 매달린 화신들이 허공에서 총알을 복제한다.
레이저빔과 재래식 탄약 사이로 흐릿한 빛이 그림을 그리면
그 안에서 불꽃과 뇌전과 얼음덩어리와 독무가 흘러나와 괴물들을 지져버린다.

‘올스타전?’


하늘거리는 무복을 입은 무인들, 강철 갑옷을 입은 기사들,
펄럭이는 로브에 보석 지팡이를 든 마법사들,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지면 아래를 헤엄쳐 이동하는 사냥꾼들,
소형 발전기를 등에 매달고 거대한 중화기를 들고 돌진하는 기갑병까지.

온 세상 화신들이  모여서 괴물들을 죽이고 있었다.


괴물들의 모습도 평범하지는 않다.
수 십m짜리 촉수를 휘젓는 괴물이 땅에 사는 문어처럼 흐물흐물 기어오며 먹물을 뿜자 검은 독안개가 밀려온다
. 팔뚝만 한 식인 메뚜기들이 날개를 칼날처럼 휘두르며 구름처럼 몰려오고
기괴하게 생긴 짐승의 무리가 포격 속에서도 동료를 방패 삼아 달려든다.

과도한 화력으로 버티지만, 머릿수는 명백히 부족한 상황.

‘그래서 김하은은 어디에 있지?’


그리고  모든 광경에 김하은은 존재하지 않았다.


괴물들을 쓸어버리는 걸 구경하는 게 그녀의 욕망일까?

세상 어느 액션 영화도 이보다 화려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류되는 성좌만 해도 10명이 넘어가고 화신이 천 단위로 있는데 누가 감히 이걸 CG로 구현하겠는가.
확실히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지고 있다. 하지만 무의식의 욕망이라 보긴 힘든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어디선가 음울한 나팔 소리가 들린다.

나팔인지 뿔피리인지 모르겠지만 전쟁의 소음을 뚫고 귓가에 울리는 낮고 둔탁한 소리.
 소리에 전장에 있던 화신들이 한 곳으로 시선을 모은다.
군인들이 자리를 잡고 포격 지원을 하는 언덕 맞은편의 능선을.


포연과 흙먼지 너머, 햇빛을 등지고 나타난 것은 깃발을 든 미남.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나였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전장에서 한 걸음 떨어진 군대였다.
자주포를 장전하던 병사부터 참호에서 긴장한 상태로 소총을 겨눈 병사까지.
남녀 분간 없이 숨 가쁘게 포를 갈기던 군인들의 입에 다양한 단어가 오르내린다.


악몽을 삼킨 악몽, 살아 숨 쉬는 꿈결, 자색 제복, 죽지 않는 노병이니 돌아온 화신 같은
생소한 단어들이병사들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다.



 단위는 되어 보이는 군인들은 물론, 군복 견장에 화려한 마크를 단 장군들도
언덕 위에서 깃발을 든 나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다음은 화신들이었다.
근육 덩어리들이 사람보다 큰 강철 덩이를 들고 방진을 짠다.
기사와 무림인들이 전열을 이루고 마법사와 초능력자와 총잡이들이 후열에서 똘똘 뭉친다.
 모습을 보고 나서야 김하은의 욕망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동서남북을 대표하는 화신들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의 영향력.
고작해야 깃발 한  보여줘도 군대와 화신들이 알아서 호응하는 정도의 위엄.

불사르는 폭군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고 싶다는 건가?


포부가 커도 너무 커다란데.


 영향력이 무의식 속에서 단순화된 다음, 무력 과시의 형태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달달한 분위기나 음탕한 것과는 거리가 먼 욕망인지라

나는 떡 각을 포기하고 그대로 내 모습을 한 김하은의 무의식이 뭘 하는지 구경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흰색 깃발에 보라색 나비 문양 깃발. 문양을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는지 깃발이 조금 흐릿하다.
그 너머로 익숙한 보라색 머리가 보인다. 두말할 필요 없이 김하은이겠지.

그녀가 보라색 마력을 길게 늘어트리자 물줄기가 경사면을 타고 흐르듯 마력이 지면을 침범한다.

보라색 호수라 해야 하나, 거대한 카펫을 펼쳤다고 해야 할까?
꿈속 세상답게 말도 안 되는 마력이 전장을 뒤덮는다.
대지가 보라색 마력에 침식당하다 못해 허공으로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간다.
물안개가 시야를 가리듯 연보라색 마력의 안개가 한  앞도 보지 못하도록 세상을 가린다.

보라색 안개 속에서, 김하은이 커다란 날개를 펼친다.

고함도 기합도 없이, 낮고 음울한 뿔피리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


그리고 안개 속에서 다양한 것들이 몰려나와 전선을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군복을 입은 군인이 있고 김하은처럼 제복을 입은 화신들이 있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것은 다른 존재들이다.
괴물도 화신도 군인도 아닌 명백히 이질적인 존재들.


삐에로가 풍선다발에 매달려 날아올라 나무망치로 괴물들의 대가리를 부순다.
뻘겋게 칠한 입술이 귀밑까지 찢어져 있는데, 웃을 때마다 그 커다란 입안에 있는 상어 이빨이 보인다.
작은 놈은 깨물어 죽이기라도 했는지 끈적한 타액이 붉게 물들어 있다.

새하얀 가면을 쓰고 거구의 여성이 전장 한가운데에서 터벅터벅 걷는다.
몇몇 괴물들이 달려들지만 옆구리나 앞다리 바로 아래를 찔리면 땅바닥에서 바르작거리다
끼잉, 소리를 내며 스러진다. 고작해야 식칼 한 자루가 이루어내는 성과였다.

팔다리 관절이 거미처럼 기괴하게 꺾인 여성이 몸을 뒤집은 상태로 바닥을 기어 다니며
작은 곤충형 괴수들을 머리카락으로 잡아챈다.


그림자 속에서 길쭉한 짐승의 팔이 올라와 땅속으로 끌고 가기도 하고,
하늘 저 높은 곳에서 기괴하게 생긴 괴조가 내려와 적당한 크기의 괴물들을 낚아채 올라간다.


삼류 공포영화 패러디에서나 볼 법한 장면.

“증원이다! 증원이 왔다!”
“기세를 놓치지 마라! 지금 밀어 붙여!”


내 입장에서야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김하은의 욕망인데. 괴물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괴물들을 아예 대륙 밖으로 쫓아내 발도 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
그리하여 부모의 복수를 완성하고 자신처럼 가족을 잃는 사람이 없게 되는 것.


그게 그녀의 욕망이었다.

야성적인 연상의 남성에게 리드 당하고 영화 같은 첫날 밤을 꿈꾸는 한예지나,
성좌의 뒤치다꺼리와 시중은 자신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질투심을 품은 이하린보다는 기특하지 않나.


‘그러면 구경만 하다 나가야 하나?’

마력의 날개를 펼치고 군인들과 화신들에게 찬사를 듣는 김하은의 모습을 보고 굳이 다가가지는 않았다.
농약 먹은 쥐 떼처럼 픽픽 죽어가는 괴물들의 모습을 보니
그래도 스트레스 해소 하나는 확실하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도 저건  창피한데.’

다른 건 다 좋은데, 깃발을 들고 전진하는 내 모습은 좀 부끄럽네.

그 뭐냐, 전생에 봤던 그림 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던가?

시민들의 앞에서 깃발 들고 전진하는 여인처럼
진군하는 화신들 앞에서 깃발 들고 똥폼 잡는 모습이 조금 창피하긴 했다.
남들 시선 없는 무의식 세상이라 다행이지.

어두운 곳에 숨어서 옆구리에 칼날을 처박는  익숙하지,
저렇게 남들 앞에서 이끄는  내 성격에  맞으니까.

조금 미안하지만 김하은의 옆에서 저렇게 깃발 들고 있을 일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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