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0화 〉80화 : 욕구해소 (80/169)



〈 80화 〉80화 : 욕구해소

상상치도 못한 규모로 진행된 드림 테라피.


아니 이제 드림 테라피라 부르기보단 퇴역 군인과 은퇴 화신을 위한 정신적 복지 시스템이라 불러야 하나?
아무튼, 엄청 거창해진 사건이 진행된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퇴역 군인을 만나는 것도,
은퇴 화신의 악몽을 엿보는 것도 아니었다.


“...저도 이쪽으로 오는  노려볼까요?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는데.”


은근히 소외감을 느끼며 토라져 있는 한예지를 꿈속에서 달래주는 것이었다.


이하린과 김하은은 내가 분신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여도
성역에 찾아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있으니 그게 부러운  같았다.

파스타 반 그릇에도 부러움을 느끼고 자각몽 속에서 레스토랑을 소환하는 게 한예지다.
이 상황에 부러움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겠지.

“음, 아무리 그래도 이제 3년 차 주제에 아카데미를 노리는 건 너무 허들이 높네요.”


팔짱을 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지만, 꿈속인 만큼 감정을 숨길  없다.
명백한 시기와 질투,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도전 욕구까지.


질투가 원망과 좌절이 아닌 도전 정신으로 변환된다니 화신 하나는 참 잘 뽑았네.
하기야, 어린 나이부터 남동생을 자기가 부양하며살아온 책임감 있는 여자니까.
그런 안도감과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저격 실력이 눈에 띄게 발전하고공적도 꽤 올렸는데 허들이 높다고 표현할 정도인가?


아카데미는 넓고, 교관도 거의 천 단위로 있었다.
그중 화신이 아닌 교관도 있고 젊은 교관도 있어서 생각보다 널널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깊게 생각해보면 그럴 리 없구나.
섬을 오가는 화물선에 화신 수 십 명이 달라붙을 정도로 엄중한 공간이다.
내부에는 화신 수 백 명이 눈을 부라리고 있고, 나 말고 다른 성좌들도 꽤 주의 깊게 살피는 공간.


그런 곳에 어중이떠중이들이 취업을 할 수 있을까?

“많이 어렵니?”


“그으, 저도  수 있다면 가고 싶은데.”


내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예지가 이토록 망설이는 걸 보니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한예지는 죽는 시늉까지 할 거고, 이하린은 진짜 죽지 않을까.

갑작스레 튀어나온 잡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니 한예지가 어렵사리 입을 연다.

“아카데미 교관직은 지원 요건부터 엄청 엄격해요.”


몸을 꼼지락거리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녀가 말을 이어나간다.

“으음, 정확히는 기억이 잘  나는데. 아마 교관직이 아니라 아카데미 내부 근무직의 요건만 해도 어지간한 엘리트들만 뽑아 가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애초에 교관직은 토너먼트로 뽑아가고.”

“토너먼트?”


“네, 교관직 TO가 비면 대륙별로 분야별 토너먼트가 열려요. 무기술의 경우 실제 대련을하고, 사격술이면 시뮬레이션으로 점수 내기, 마법학 교관은 논문과 연구실적으로 점수를 매긴 다음 강연 실력까지 보고 뽑는 거로 아는데...”

그제야 낮에 봤던 광경이 떠오르며 한예지가 왜 자신 없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카데미의 사격술 시뮬레이션. 한예지가 만점을 못 받아서 스트레스로 악몽까지 꾸지 않았던가.
그런데 교관들은 만점은 당연한 거고, 기록 단축으로 경쟁을 하고 있다니.

아직 저격 하나만 밀고 나가는 한예지에게는 가혹한 시련이겠지.
아카데미에 있던  어려 보이던 교관들이 대륙 단위의 토너먼트 우승자라는 소리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럼 화신이 아닌 교관들은... 권능을 부여받은 화신을 재능과 실력으로 찍어 누르고 아카데미 교관이 된 건가?’

권능은커녕 재능도 베풀지 않고 화신을 늘려나가는 성좌들이 있다지만 화신은 화신이다.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시스템의 백업을 받으니 민간인과 비교하기 미안할 수준.
근데 그걸 순수한 실력으로 이겼다고?


“그래서 목표로 삼으면 삼을 수 있지만... 당장은 조금 어려울 것 같네요.”


그와 동시에 내게 기댄 그녀에게서 강렬한 감정이 몰아친다.


아쉬움과 죄송함.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자신의 능력 부족을 말하는 것이 죄송스러운 걸까.
아까부터 너무 기특한 마음가짐만 보여주기에 가슴이 흐뭇함으로 가득 찬다.
다른 두 화신에 비해 실력 늘어나는 속도가  더디면 어떻겠는가.


재능 보고 고른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상도 줄 겸, 조금 미뤄 뒀던 일을 해야겠네.



내가늘 곁에 있는 것도 아닌데 자각몽은 매일 꿀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그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공부할 때도 있고 사격 연습을 할 때도 있고 휴식을 취할  있으며... 한창때의 청춘답게 성욕을 해소할 수도 있지.

하지만 그녀들은 꿈속에서 성욕 해소를 위해 완전한 ‘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나는 몽마고 그녀들은 인간이니까.

그 뿐만이 아니다.

자각몽의 권능은 내가 내려 준 것이며 우리는 성좌와 화신의 계약 관계.
여러 가지 의미로 그녀들과 나는 완벽한 상하관계에 있는 것이다.
적어도 불꽃과 용암보다는 명백한 상하관계다.

내가 마음대로 분신을 다루지 못 하는 것처럼, 그녀들도 자각몽을 제멋대로 다룰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나를 소환해서 성욕 해소용 인형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능력이 부족하니까.


성좌인 나도 성좌인 나를 불러내는 시간 제한이 있는데 어디 화신이 성좌를 멋대로 만들어 내겠는가.
아무리 꿈 속이라도 시스템상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그 때문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거다.

세상이 찰흙처럼 한 번 무너졌다가 레고처럼 다시 조립된다.
어두침침한 골목, 깜빡거리는 가로등, 시끄럽게 으릉으릉 거리는 새카만 바이크.
그리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편의점 비닐봉지를 들고 있는 한예지.

‘얘가 정신을 못 차리는데... 괜찮은 거 맞지?’

이것이 나 없을  성욕이 쌓인 한예지가 만들어낸 무의식의 세상이다.

눈앞에서 한예지가 입을 쩍 벌린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부에 착 달라붙는 가죽옷의 느낌이 생소하다.
전신 슈트는 입어 본 적이 없으니까 뭔가 쫄쫄이를 입으면 이런 기분인가? 싶기도 하고.
여기서 쫄쫄이 생각을  하면 한예지가 무의식에서 벗어날 것 같아 바로 꿈을 다루기 시작했다.

“누, 누구세요?!”


“...”


깨어난 한예지에게 답하지 않고 말없이 입에 담배를 물었다.
주머니에서 자연스레 꺼낸 딸각 소리가 나는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흡연자는 아니니까 입을 통해 들어오는 연기에서는 가습기의 증기처럼 아무 향도 나지 않는다.

한예지는 생생하게 매캐한 담배 연기를 마시고 있겠지만.

“누구시냐니까요?”

반복되는 질문에 대꾸는 하지 않았다.
이게 그녀가 원하는 것이니까.



자각몽의 권한을 내게 빼앗기고 무의식 깊은 곳으로 찾아왔기 때문에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
지난번 내가 나이프를 들고 애들 등허리를 후비고 다니는 걸 보더니 이런 걸 망상하고 있었구나.

갑자기 등장한 야성적인 분위기의 미남, 쫙 달라붙는 전신 바이크 슈트와 두꺼운 담배.
설명은 나중에 한다면서 일단 시작되는 자동차 추격전.


 적나라한 욕망에 웃음이 터져 나올  같아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설명은 나중에  테니까, 일단 타라.”


“무, 뭔데요? 악! 내 맥주!”

손목을 낚아채자 못 이기는 척 그녀가 바이크 뒤에 올라탄다.
바닥을 나뒹구는 맥주 네 캔의 소리 너머로 거친 배기음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바이크를 타고 출발하면 기다리던 추격자들이 약속한 것 처럼 오겠지.

허리춤을 휘감는 손길이 어색하다.
익숙해져서 능청스레 허리에 손을 대며 허벅지를 더듬던 한예지는 없다.
능글맞아지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남자 허리에 감히 팔을 못 감아서 쩔쩔매고 있었다.


메마른 저음, 하지만 약간의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내숭 떨지 말고 허락할  허리에 팔 똑바로 감아. 헬멧도 없으니까 떨어지면 골통 갈린다.”

“아, 네? 네.”

툭 던진 말에 그제야 한예지가 뒤에서부터 나를 꽉 껴안는다.
괴물처럼 달리는 바이크의 속도감에 겁을 먹은 게 분명하네.
얇은 슈트 너머로 물컹한 가슴이 이리저리 눌리는 게 느껴진다.
물론 그녀도 온몸으로  등 근육과 복근을 만끽하고 있겠지.

‘그래서, 이제 어쩌지?’

바이크를 타고 찻길로 나오니 검은 자동차들이 우리를 쫒아온다.
한예지는 흘끗 뒤를 돌아보고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등에 얼굴을 묻는다.
등 뒤에 느껴지는 가슴 감촉은 실컷 즐겼으니 좀 넘어가 볼까.

“야! 너 오늘 낮에 뭐  거 있냐?”


바람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지만,
내 목소리도 한예지의 목소리도 서로에게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꿈에서 말귀를  알아들어서 깨는 일은 없을 테니까.

“낮, 낮에요?”


“그래,  이상한   적 있냐? 잘 생각해 봐라. 저 뒤에 애들도 그게 궁금해서 따라오는 거니까.”

내 말에 한예지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는다.


“그, 골목에서 양복 차림의 여성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거?”

“그래? 가슴 주머니에서 사진 있거든? 꺼내.”

“네?!”

“아 씨, 그냥 꺼내!”

수줍은 손길이 가슴팍을 더듬으며 방금 만들어진 낡은 사진 한 장을 가져간다.
좀도둑이나 소매치기처럼 엄지와 검지만, 정확히 엄지와 검지의 손톱만 사용해서 벌벌 떠는 손으로 사진을 집어서 가져간다.

그렇게 한예지가 남자 가슴의 압박감에 망설이는 동안 바이크는 어느새 느려졌고 죽일 듯 따라오던 차량도 사라졌다.
그녀가 사진에 집중하는 동안 내가 바이크를 몰고 도착한 곳은 낡고 허름한 골목 구석의 모텔.

“아, 맞아요. 이 사람을 호위하듯 엄청나게 우르르 몰려다니던, 데?”


“알겠으니까 따라 들어와. 설명은 안에서 할 테니까.”

지직거리는 네온 간판이 OTEL 부분만 빛나고 있는광경을 보며 유리문 안으로 곧바로 들어갔다.
문 바로 앞에 세운 바이크를 주차하지도 않았고, 지폐가 허공에서 생겨났지만
카운터 너머의 주인장이 말없이 키를 주며 9층으로가라고 말한다.

돈을 주고 키를 받는 동안 한예지는 고장이 난 기계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모텔은 가  적 없어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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