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79화 : 사업 4
기나긴 회의 끝에 분신의 지속시간이 다 되었다.
아침 식사 직후에 시작된 사건이 늦은 점심시간조차 한참 지나버린 상태.
회의실에 사람이 오고, 사람이 떠나고, 다른 사람이 오는 걸 몇 번이고 반복한 결과였다.
‘생각해보니까, 이거 터무니없는 거물 아닌가?’
화신 아카데미의 총장.
이 세상은 내가 살던 지구보다 아주 비슷한 시대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보면 과학 기술은 10년 정도 뒤떨어진 상태지만
성좌들 때문인지 인구는 조금 더 늘어난 것 같은데.
그래도 이 넓은 대륙에 백억 언저리의 인구는 유지하고 있는 세상이다.
어느 대륙이 몇 명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세계 인구가 100억이라는 건 인터넷에서 지나가며 봤으니까.
인간끼리 전쟁을 하지 않고, 모든 대륙이 식량 걱정 없이 발전해 온 결과인 것 같다.
기계를 이용한 대규모 농업 시스템이 발전하기 전부터
성좌들의 권능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식량을 생산하고 있으니까 가능한 이야기겠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존재하는 세상에 아카데미 총장은 딱 한 명.
아카데미가 하나니까 당연하겠지? 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리 쉽게 볼 일은 아니다.
전생의 UN 사무총장 같은 것만 해도 꽤 높은 지위일 텐데.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게 아카데미 총장 아닌가?
세상 유일한 화신 교육 기관의 장.
쉽사리 도달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겠지.
밑에 부리는 임원만 백 단위는 되는 것 같고, 건물 크기에 비례해서 교관도 천 단위는 있어 보인다.
세상 모든 화신이 모이는 장소니까 권력이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그런 대단한 인물이 내게 굽신거리더니 전력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금괴는 동남쪽, 수은은 서북쪽!”
“벽조목으로 만든 제기는 제대로 관리 중인지 확인해라!”
“제사 보조로 갈 신관들은 전부 목욕재계 완료하셨습니다!”
화면 너머에서 사람들이 우글우글 움직인다.
아침에 이야기를 나눠서 점심에 회의하고 저녁이 되기 전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아카데미 구석 창고의 결계가 풀리고 사람보다 커다란 금덩어리가 튀어나오질 않나,
박물관 같이 생긴 곳에서 반들반들한 나무를 잔뜩 꺼내오질 않나.
한껏 당황한 김하은과 목욕재계를 끝마치고 무덤덤하게 서 있는 이하린을 중심으로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진다.
운동장의 절반은 채울 것 같은 커다란 마법진과 순백색 대리석으로 만든 제단이 턱 하고 등장하니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드림 테라피니까, 피부 관리 마사지 가게처럼
나와 김하은이 오순도순 손님을 받아 악몽을 흡수하는 자그마한 가게를 생각했는데.
이게 어딜 봐서 ‘테라피’의 영역이라 볼 수 있겠냐고.
저 멀리서 새하얀 의복 하나 얇게 걸친 남자들이 손에 다양한 우르르 몰려온다.
보석으로 조각한 나뭇가지를 든 사람도 있고 황금 사슬에 연결된 향로를 든 사람도 있다.
마법진을 그리는 붉은 가루도 루비를 갈아서 만든 가루라 하고,
걸친 옷부터 제사용 도구까지 전부 권능이 깃든 물건들.
‘가장 싼 게 사람보다 커다란 순금 덩어리?’
황금이 가장 싸구려니 말 다했지.
새하얀 제단 위에 김하은이 어색하게 드러눕는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눈동자가 애타게 의지할 사람을 찾지만 제사를 돕는 사람들이 시야를 가린다.
이하린은 두 눈을 감은 상태로 보석 박힌 순금 향로를 시계추처럼 느릿하게 흔들며 무언가 주문을 외우고 있고,
제사를 보조하는 사람들은 보석 가루로 그린 선을 밟고 제단을 둥그렇게 포위하고 있었다.
시들지 않는 거목에게 세계수 가지를 받아 진행한 시골 마을 풍년 기원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장경.
딱히 감지하려 들지 않아도 마력의 기류가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뭉글뭉글 솟아 나와 아카데미를 감싸는 게 보인다.
그 마력의 폭풍을 두 눈으로 보았는지 김하은이 불안한 것처럼 제단 위에서 움찔움찔 팔다리를 움직인다.
마력이 색을 가지는 걸 넘어 물리력도 가지게 되었는지 훙훙거리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니까.
목욕재계로 잘 가다듬은 이하린의 머리카락이 산발이 된다.
납작 엎드린 20명의 신관은 어느새 바람에 밀리고 나뒹굴며 마법진 밖까지 밀려 나간 상태.
사람 몸뚱이 크기의 순금 덩어리도, 2m는 되어 보일 커다란 짐승 송곳니를 비롯한 온갖 재물들이
마력의 폭풍 속으로 사라지더니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원룸을 울릴 정도로 장엄한 폭풍과 대비되는 자그마한 소리가 내 귓가를 울린다.
난리가 난 TV 화면 말고, 그 옆에 얌전히 메시지를 출력하는 컴퓨터 모니터.
[화신, 이하린이 성좌강림 기원제를 주관합니다]
[화신, 김하은 외 20인이 성좌강림 기원제를 보조합니다]
[제물, 시들지 않는 꽃의 황금 향로가 확인됩니다]
[제물, 진창 속에 숨은 사냥꾼의 첫 번째 사냥감이 확인됩니다]
.
.
.
.
[화신, 이하린의 성좌강림 기원제가 완벽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의 강림이 가능합니다]
[화신의 염원에 응답하시겠습니까?]
세는 게 무서울 정도로 주르륵 이어진 제물 확인 메시지에 나는 주저 없이 Y 버튼을 눌렀다.
※
사람보다 커다란 순금 덩어리,
다양한 보석이 박힌 황금 향로,
길이만 2m가 넘어가는 거대 괴수의 송곳니,
루비를 갈아서 그린 수 십m짜리 마법진,
사파이어와 에메랄드로 조각한 나뭇가지,
신성력으로 키우고 불벼락으로 내리친 벽조목 그릇들.
싹 다 사라졌다.
“염원에 응답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고작 나 하나를 불러들이기 위해서.
도시를 구경하다 봤던 5성 호텔보다 휘황찬란한 방.
방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넓으니 응접실이라 불러야 할까.
그렇게 부르자니 여기가 내가 머물게 될 장소인데.
그 앞에서 고개를 꾸벅 숙이는 20명의 남자를 손짓으로 쫓아 보냈다.
여자도 아니고 얇은 옷 입은 남자 무리를 뭐하러 보고 있겠는가.
그렇게 다 내보내고 방 안을 슬슬 둘러본다.
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벽걸이 TV와 다양한 가전제품들
사람 수 십 명이 누울 수 있어 보이는 양탄자와 아무리 봐도 명품인 것 같은 가구.
스마트폰의 디자인이나 TV 등 가전제품을 보면 10년 정도 뒤처진 세상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있는 가구들과 가전제품들은 전생에 내가 구경했던 명품보다 훨씬 뛰어난 상태다.
‘예술과 관련된 성좌가 있어서 한정 생산되는 명품의 질은 훨씬 올라간 건가?’
이제, 내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거점은 두 개가 되었다.
처음 눈을 떴던 성좌의 공간과 돈을 발라서 만든 이 임시 성역.
“성역이라니, 대단한데?”
“제 능력이 아니니까 그렇게 칭찬하시면 부끄럽습니다.”
거실 소파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기다리던 이하린이 곧바로 대답한다.
김하은은 아침에 챙겨 뒀던 자신의 짐을 아카데미 기숙사로 옮기는 중.
따라서 여기서 나를 시중 드는 것은 이하린이 전부였다.
사실 내가 남자랍시고 정리를 할 가정부 아저씨니 예비 신관인 소년들을 잔뜩 데려오려 하길래 내가 막았다.
여자와 동거도 아니고, 남자 수 십 명과 함께 동거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으니까.
아무리 방이 넓다 해도 말이지.
내무반도 아니고 씨발.
“그래서, 내가 뭘 해주면 되겠니?”
“음, 딱히 무언가를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마법진의 중심핵인 이 공간에 머무르시는 것만으로도 저희에게 마력을 공급해 주시니까요.”
현대 지구처럼 보이지만 마법이 과학 기술보다 발전한 세상이다.
단순하게 불덩어리를 쏘는 마법이 아니라 분류만 해도
수백 종류가 넘어가는 모든 마법이 과학 기술처럼 얽히고설켜서 연구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원리도 이론도 전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이 딱 그뿐이다.
내가 화신들의 염원에 응답하여 지상에 강림했다.
몽마 성좌가 강림했다는 조건이 채워지며 아카데미에 있는 온갖 복잡한 마법진들이 반응한다.
그 마법진을 이용해 김하은과 이하린이 정신을 치료하고 다닌다.
그러니까, 나는 일종의 발전기였다.
“그러니? 이것 참... 신기하긴 하구나.”
손가락을 허공에 스윽 긋는다.
꿈속처럼 마력이 반응하더니 리모컨도 없이 TV가 딱 켜진다.
마력으로 마법을 부린 게 아니라 자각몽을 건드리듯 현실을 건드린 것이다.
이 성역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꿈속 세상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현실이지만 꿈 속 처럼,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공간이란 뜻이었다.
‘누가 침입해 와도 걱정은 없겠구만.’
대륙 중앙의 아카데미
그중에서도 총장이 있어 가장 엄격히 경호하는 건물에 있는데 쳐들어올 사람이 누구 있겠냐마는.
그런 생각을 하며 TV 앞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엉덩이가 녹아서 눌어붙을 것 같은 편안한 감촉.
TV와의 거리가 꽤 되는데 화면이 크다 보니 눈에 쏙쏙 들어온다.
거리까지 재서 소파를 배치한 걸까?
그렇게 궁금해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이하린이 소파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는다.
“...뭘 하는 거니?”
“오늘, 아무리 강림 기원제라 해도 성좌님을 너무 오래 세워두었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내 발을 붙잡고 양말을 벗겨 주무른다.
발목이나 종아리도 아니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을 정도로 꼼꼼한 마사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기묘한 감각에 몸을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네?’
분신이 아니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주물러지는 것과는 다른 느낌.
TV를 보면서 발 마사지를 받으며 달달한 간식을 집어 먹는 사치스러운 상황.
그 안락한 감각을 5분 정도 만끽하고 나서 문득 든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서, 내 시중을 들면 개인 연구는 어쩌려고 그러니?”
여기는 일종의 호텔 방.
나중에 내 마음대로 디자인을 바꾸겠지만 일단은 호텔 거실처럼 생긴 곳이다.
당연히 마법 연구를 위한 서류나 재료가 없다.
지금 시각이라면 열심히 마법진을 그리며 연구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게 이하린의 일상이고.
“그, 일단 제가 이 성역을 관리하는 것도 공부니까.”
“그래서, 어쩌려고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내 시중드는 일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는 질투심인가.
“후우, 여기는 내 꿈과 같은 공간이니까 시중드는 사람은 딱히 필요 없단다.”
“읏, 그, 렇습니까?”
내 거부 의사를 읽은 이하린의 얼굴이 시드는 꽃처럼 순식간에 시무룩하게 변한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나는 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고, 연구할 것 끝나면 놀러 오려무나.”
“아, 네!”
그제야 활짝 웃는 얼굴로 대답한 그녀가 내 발에 곱게 양말을 신기더니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간다.
내가 현실에 강림해서 다른 사람을 시종으로 부려 먹을까 걱정하고 있던 걸까.
아니, 걱정보다는 질투였겠지.
같은 화신끼리는 질투하지 않더라도, 화신이 아닌 사람이 내게 접근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걸까.
이쪽 세상의 화신 감수성은 너무 어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