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화 〉75화 : 반 쪼가리 (75/169)



〈 75화 〉75화 : 반 쪼가리

시들지 않는 거목에게 한  먹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나한테만 어느 정도지, 그녀에게는 짧은 시간인지 아직 편지는 안 왔지만.

한예지도 이하린도자기 자리를 찾았으니 요즘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는 것은 김하은.


정확히는 김하은의 육체.

“아니, 운동량이 이렇게 늘었는데 왜 근육이 안 붙지?”

“이 몸에 근육이 붙으면 되게 보기 싫을 것 같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뭐... 화신이란 게 과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는 아니니까 어쩔 수 없죠.”


박동하는 사자심의 화신이 김하은의 팔뚝을 조물딱거린다.
새하얀 살집이 두툼한 손가락 사이에서 찹쌀떡처럼 말캉말캉 찌부러진다.
김하은의 육체는 저 상태에서 변화가 없는 것 같다.
운동하는 걸 보면체력은 엄청나게 늘었던데.

흔히 말하는 3대 몇백의 무게가 쭉쭉 늘어나고
달리는 속도와 지구력까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외형적인 변화는 없다.
우락부락한 근육이 생기기는커녕 팔뚝에 잔 근육조차 붙지 않는 것이다.


‘저것도 몽마의 영향인가?’


 육체가 화신들이 바라는 대로 변화하듯이
김하은의 육체도 내가 생각하는 야한 몸으로 고정되어 버린 것이 아닐까?
아카데미 입학 전이랍시고 하루 6시간을 헬스장 건물에서 머무르는데 근육량이 하나도 늘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촉진한 결과가 아니라 인바디 테스트를 했는데 그렇다는 거다.

“뭐, 그래도 체력은 확실히 늘어났으니까요. 몸매를 조금 조각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건 좀 아쉽네. 다음 주면 입학이니까 슬슬 정리해야겠죠?”

“예, 다음 주 입학 맞아요.”


이제는 익숙해졌다는 듯 자연스럽게 바벨을 내려놓으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3대 500이네 500클럽이네 하면서 스포츠 의류를 선물 받았지만, 여전히 야한 몸.
남자가 보기에는 껴안고 싶은 몸이지만 같은 여자가 보기에는 허여멀건 살덩어리인가.
김하은보다 체육관 관장이 아쉬워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뭐... 이러면 비포, 애프터 사진은 못 걸겠네요. 화신 이름만 걸어야겠네.”


“어쩔 수 없죠. 성좌님이 내려 주신 몸인데.”


“하긴, 체력 늘어나는 속도만 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몸이니까. 진짜 축복받은 몸이긴 해요. 성좌님이 몽마 계열이라 하셨던가?”

내가 만들어 준 몸이 대단한 게 아니라 김하은이 천재적으로 마력을 다뤄서 기초 체력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건데.
아마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근접 박투를 배우면 그쪽 재능의 한계를 빠르게 느끼지 않을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김하은은 마력을 다루는 천재지, 육체파 천재가 아니니까.

쇠질로 다져진 우정이라 할까?
두 사람이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진다.
그렇게 헬스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하은이 시장 거리로 발걸음을 돌린다.
콜라 비슷한 탄산부터 과일 맥주, 씹을 육포와 전자레인지에 돌릴 안주까지 바리바리 구매하기 위해.


“으, 드디어 닭가슴살에서 해방이다...”

감격에 찬 그녀의 중얼거림이 마음 깊숙이 다가온다.
절절한 기쁨을 담고 있는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운동을 해도 나태하게 지내도 유지되는 극상의 몸매.
하지만 근육을만들어 주겠다며 이리저리 이끌고 다니는 체육관 관장 때문에 강제로 식이요법을 병행했던 그녀다.


몸이 변하고 화신이 되었다 해서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던 공부벌레의 성격이 어딜 가겠는가.
남들보다 강렬한 욕망을 지닌 건 맞지만 자신의 욕구를 표출해 의견을 밀어붙이는 것은 할 줄 모르는 여자.

그게 김하은이니까.


아침에 사과를 곁들인 양배추 샐러드, 점심에 닭가슴살과 현미밥, 저녁에 고구마와 삶은 계란에 구운 파프리카.
이런 식으로 싫다는 말도  하고 꾸역꾸역 먹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상대가 같은 여자지만 도와주겠다는 호의 하나로 손수 도시락까지 챙겨오니 싫다고 버티지도 못했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레몬 맥주보다는 애플 사이다를 추천합니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청양고추 돼지고기 육포를 요구합니다]

보니까 슬그머니 술도 챙기는 것 같은데 우리 화신이 혼술을 하게 놔둘 수 없지.
슬그머니 끼어들어 메시지를 보내자 그녀가 발걸음을 돌려 내가 원하는 안주를 챙긴다.
독주보다는 가볍고 달달한 맥주가 좋다는 술 취향은 똑같은 것 같네.

새우 맛 과자부터 육포까지 바구니 한가득 담아 집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본 뒤 그대로 분신을 만들었다.
세 가족이 살던 집이라 조금은 넓게 느껴지는 김하은의 집으로.
문이 굳게 닫힌 안방은 내버려 두고 거실 테이블에 널려 있는 빨래를 치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어서 오렴.”

“...네, 다녀왔습니다.”

묘한얼굴로 다녀왔노라 말하는 그녀에게서 양손의 짐을받았다.
화신 계약을 하고 운동을 하며  달이 흘렀지만, 마음 정리는 아직인 것 같네.
하기야 부모님이 사고로 한 번에 돌아가셨는데 그걸 쉽사리 털어낼 수 있겠는가.


TV를 틀고 적당한 예능 채널로 돌린 다음 소파 테이블에 주전부리를 주욱 나열한다.

케요네즈를 찍어 먹을 조금 밍밍한 새우 과자, 짭조름한 감자 칩,
매콤한 맛의 청양고추 육포와 무뼈 닭발, 니끼하지만 계속 손이가는 맥  치즈.
전자레인지에 3분 돌리면 완성되는 주전부리들이 끝도 없이 테이블 위를 점령한다.

“이렇게 마셔도 되나요?”

“너도 네 육체를 알  아니니? 먹으면 살로 가는 게 아니라 마력으로 간단다.”


혈관이 비명을 지를  같은 상차림이지만 무슨 상관일까.
운동해도 근육이 늘지 않는 것처럼 과식해도 살이 찌지 않는 것이 몽마의 특성이다.

본체가 꿈속에 있으니까.
그리고 그 꿈속의 본체는 꿈을 다뤄서 살을 제거할 수 있으니까.

치익- 하고 청량감 넘치는 소리와 함께 맥주 캔을 연다. 코끝을 간질이는 달달한 사과 냄새.
알코올 향 보다 과일의 단내가 더 많이 나는 달달한 맥주를 들이켜자 나도 모르게 커어-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하하호호 떠드는 TV 속 예능인들을 보며 우리는 말 없이 육포를 씹고 맥주를 마셨다.

김하은이 입을 열기 전까지.

“성좌님, 제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뱉는 한 마디.

“제가 잘 할  있을까요?”

한예지의 질문과 완전히 같은 질문.


그러나 거기에 담긴 무게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한예지의 부담감은 소실된 목표 의식에서 시작된 것이다.
어릴 적부터 고아로 살아와 장래희망보다는 다음 달 들어올 알바비가 더 중요했던 인생이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단기적인 훈련이 아니라 장기적인 인생 플랜에 부담감을 느꼈다.


김하은의 부담감 또한 소실된 목표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충격의 타이밍이 다르다.
어릴 적부터 고아여서 익숙해진 한예지와 달리 그녀는 부모가 죽고반년이  지나지 않은 상태.


“괴물들을 많이, 그냥 많이 죽이는 걸 돕고 싶다... 이런 이상한 목표로 움직여도 될까요?”

그녀가 TV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린다.
꿈속에서 스트레스를 풀도록 계속 도왔는데 부족했던 걸까.

“그래도 화신이 되었는데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뭉글뭉글 흘러나오는 부정적인 감정을 맛본다.
내가 생각하던 것과 그녀가 생각하던 것이 너무 달라서 일어난 이야기.
나는 아직도 이쪽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은  같았다.


김하은이 고민하는 이유는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


“얘, 하은아.”


화신에 대한선망 때문이었다.

“네, 성좌님?”

한예지의 과거에서 죽은 화신과 군인을 욕보였다는 이유로 눈이 뒤집혀 학부모의 멱살을 잡은 교생이 있었다.
학교 폭력을 묻어버리려는 부패 교사조차 목에 핏대를 세우게 만드는 것이 화신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란 뜻이다.

“너는, 화신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고 있구나.”


김하은의 고민은 무겁지만 간단했다.
괴물을 많이 죽이고 싶다- 같은 마음가짐으로 화신이 되어도 될까?
정말 나 따위가 그런 생각으로? 이런 사소한 생각으로 화신이 되어도 된다고?

그녀는 갑작스럽게 드러난 재능 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를 좀먹는 의심은 화신에 대한 과도한 선망에서 시작된 것이다.
화신과 성좌를 완벽하고 위대한 위인처럼 생각하니 자신이 화신이 되어도 되는지 의심하는 것.

한예지도 이하린도 한 번 거쳐  길.
화신에 대한 부담감과 성좌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으로 인한 고민.
이제야 나의 세 번째 화신이 어마어마한 천재가 아니라 초짜 화신처럼 보였다.

“나의 화신이잖니? 나를 보렴. 나를 위하고, 나를 따르렴.”


새하얀 피부, 취기로 달아오른 붉은 홍조,
소파를 묵직하게 짓누르는 커다란 엉덩이와 헐렁한 옷차림으로 가릴  없는 커다란 가슴.
맥주를 내려놓고 그녀의 온몸을 만지작거린다.

“내가,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니? 내가, 너의 성좌인 내가 너에게 명령했단다.”


손가락을 세워 꾹꾹 눌러본다.
 포장된 고급 찹쌀떡을 짓누르는 감촉.
안는 베개로 사용한다면 하루 18시간도 잘  있을 것 같은 최상급의 여체.
팔뚝과 허벅지를 찌르다 그대로가슴으로 향해 턱 밑으로 손을 보낸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의문을 가득 담은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우리 답답한 화신이, 마음껏 노닐 수 있게 도와줘야겠네.”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던  하나를 챙긴다.
와인  브랜디를 섞었네 뭐네 하며 구매했던  중 가장 독한 녀석으로.
독하다 해 봐야 소주 언저리지만 맥주보다는 독하니까.

그대로 와인을 입에 머금고 상황 파악이 덜 된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


말캉한 입술이 자연스럽게 열리고, 과일 향 훅 풍기는 액체를 혀를 이용해 그대로 넘겨준다.
눈가가 찢어져라 크게 뜬 그녀의 뺨을 붙잡고 다시 한번 더.


타액과 뒤석힌 독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 게 보인다.
새하얀 목이 꿀렁이며 꿀꺽꿀꺽 전부 받아 마신다.


헤- 하고 벌린 그녀의 분홍빛 입에서 술 냄새가 훅 올라온다.

“네 욕망대로 움직이렴.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렴. 내가 너에게 전쟁에 나서 내게 영광 바치라 명한  없단다. 괴물을 죽이고 싶다면 죽이려무나. 권력과 금력으로 사람을부리고 싶다면 그렇게 하렴. 네가 무엇을 하던 나의 화신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테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번 입술이 다가온다.
과즙에 절인 것 같은 말캉하고 따듯한 살덩어리가 거칠게 내 잇몸을 두드리며.
코로 훅훅 거친 숨을 내뿜는 그녀에게 웃어주며 그대로 입을 열었다.


혀와 혀가 얽힌다.
온몸이 달뜨고 열기가 머리를 몽롱하게 만든다.


결국, 분신인 나와 다르게 숨을 쉬어야 하는 그녀가 먼저 떨어져 나간다.


새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뺨도, 귀도, 그리고 목덜미까지.
붉어진 목덜미와 뽀얀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으니거칠게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녀가 내게 묻는다.

“괴물을 잡으러 가는 것 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게 부모님이 원하던 일일까요? 우리 부모님은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 가면 된다고만 말했는데.”


“그렇다면 전쟁터로 향하지 말고 화신이 할 수 있는 사업이라도 찾아보렴.”


생각해보면 이하린도 제사 마법으로 밥 벌어먹고 있지 않던가?
그렇게 생각하며 가볍게 대꾸했다.


 어깨를 강하게 붙잡은 그녀의 눈동자. 그 눈동자가 올곧게 나를 바라본다.


“...제가 원하는 대로?”

“그럼, 네 욕망대로.”


보라색 눈동자가 어둡게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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