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74화 : 엘프 누나 2
시들지 않는 거목의 저택은 내가 모르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었고.
자신에게 흥미를 느껴주는 내 모습이 기꺼웠는지 그녀도 밝게 대답을 해 준다.
전선 대신 나무 넝쿨이, 전등 대신 사람 머리통만 한 꽃이 빛을 내는 저택.
바닥부터 천장까지 식물로 이루어진 집은 구경할 것이 넘쳐났다.
고운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드는 그녀의 설명은 이해하기 쉬워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정원에서 들어와 거실부터 복도를 지나 2층으로 들어가기까지.
벽과 천장에 있는식물을 설명하던 시들지 않는 거목이 아무런 생각 없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다.
“그래서 여기 있는 이 침대는 구름 송이 잎사귀로 만든 건, 데에...”
나무 틀을 덩굴로 엮어 푹신해 보이는 솜털로 가득 채운 침대 앞에서 그녀가 뻣뻣하게 굳는다.
이제야 자기보다 한참 어린 남자애를 제 침실에 데려왔다는 것을 떠올린 것 같다.
새하얀 얼굴이 가스 불 위 주전자처럼 삐익 달아오르는 것이 눈에 띄게 보일 정도.
“그게, 그러니까-”
“구름 송이? 이렇게 생겼으면 간지러울 것 같은데.”
제 딴에는 자연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려는 것 같아 그대로 비집고 들어간다.
키 차이 때문에 방 문턱에서 그녀의 어깨가 내 가슴팍을 툭 친다.
그 생소한 감촉에 놀라 뒤로 화들짝 물러나는 사이, 나는 그대로 방 안으로 침입했다.
‘와, 풀 냄새.’
거실과 복도에서는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면, 이 방 안에서는 짙은 풀 냄새가 난다.
침대가 풀로 만들어져서 이리저리 짓눌린 탓일까? 기분 나쁜 냄새는 아니었다.
한여름 공원에 돗자리를 깔고 나른하게 누워 있는 기분.
“와, 되게 푹신하네.”
새하얀 식물 솜털 주제에 내 방 극세사 이불보다 부드러운 것 같은데.
감탄하며 동그란 침대 위에 앉는다.
팔을 뻗은 상태로 뻣뻣하게 굳어버린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이 다시 벌겋게 달아오른다.
자기 침대에 호감 있는 여자가 들어오는데 포커페이스 유지가 될 리 있나.
그 정도로 노련하기는커녕 방금 어깨와 가슴이 부딪친 감촉에 당황하는 숙맥인데.
“이리 와서 앉아. 여기서 이야기하면 좋겠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옆자리를 팡팡 두드린다.
어째 손바닥으로 두드리는데 껍데기 없는 솜털들이 날아오르질 않네.
구름 송이로 만든 이불이라, 나중에 나도 하나 살까?
나뭇잎 침대라서 거사를 치르다 피부가 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재촉하는 눈길로 바라보니 그녀가 숨을 거세게 몰아쉬는 게 보인다.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옆에 앉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그녀의 어깨와 내 어깨가 닿을 정도로 우리는 밀착해서 앉았다.
‘키가 확실히 줄었네.’
180cm를 넘어가는 건장한 신장에서, 대충 175cm 정도로 줄어든 것 같은데.
걸을 때는 잘 모르겠지만 시들지 않는 거목과 딱 붙으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차이.
머리통 하나 차이가 반 개 정도 차이가 나니 마주 볼 때 조금 편하긴 하네.
슬금슬금 곁눈질하는 시들지 않는 거목.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살 웃어주니 조금씩 자극을 받는 것 같다.
연애 경험이 없고 사랑이 뭔지 모른다 해도 이건 알아야지.
내가 지금 명백히 그녀를 ‘애’ 취급하고 있다는 걸.
그녀의 공간에 들어와서 그런지, 아니면 그녀의 생각대로 내 육체가 변해서 그런지 그 감정이 명확하게 느껴진다.
어렴풋이 속마음까지 느껴질 정도로. 이건 엘프인 그녀가 너무 정직해서 그런 건가.
‘애 취급 때문에 조금 화났네.’
침대에 앉아 수다를 떠는 동안 황금색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팔랑거리는 긴 귀를 건드린다.
내 다정한 손길에 오히려 그녀는 불만을 느끼는 상황.
화가 났다고 해서 나를 미워하고 성질이 난다는 게 아니다.
어린아이가 애 취급당하면 짜증을 내는, 분노보다는 짜증에 가까운 가벼운 감정.
답지가 반쯤 보이니 행동에 망설임은 없어졌다.
“와, 이거 푹신하네~”
대화를 나누다 말고 그대로 침대에 벌렁 눕는다.
위로 쭉 기지개를 켜니 반팔 셔츠가 올라와 배꼽 부위가 드러나는 것이 느껴진다.
그와 동시에 따갑게 내리 꽂히는 시선도.
‘오, 고민한다 고민해.’
이제 시들지 않는 거목은 제 방 침대에 발라당 드러누운 남자애를 상대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자상한 누나의 모습으로 배를 가려줘야 하는지, 모르는 척 구경이나 해야 하는지.
그런 고민 사이로 아까 말했던 가벼운 짜증이 파고든다.
‘얘는 나를 여자로도 안 보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훨씬 나이가 많은데.’
‘친구 취급도 아니고 애 취급받는 건 조금...’
‘인간은 외형으로 판단한다던데몽마도 그런가?’
같이 재미있게 떠드는 일은 기쁘다.
나도 그렇지만 그녀도 외로운 삶을 살았으니까.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혼자 지하실에 처박혀 있다가 인류 최후의 피신처가 멸망한 것도 모르고 성좌가 된 남자.
그리고 세계수 바깥세상이 전부 멸망해, 같이 있던 인간은 늙어 죽고 짝사랑하는 남자애는 자살해서 성좌가 된 여자.
다른 성좌들처럼 괴물, 악마, 외계인에게 맞서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고립된 공간에서 메말라 죽어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별거 아닌 평범한 대화조차 기쁘겠지.
나도 성좌가 처음 되고 한예지에게 메시지 하나 보낼 때 얼마나 입꼬리를 벌벌 떨었던가.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사춘기 남학생이 있다고 치자.
나이 백 수십 년은 먹은 엘프지만 하는 행동이나 심리 상태는 딱 그 정도다. 사춘기 고등학생 정도.
남자 고등학생의 집에, 반에서 예쁘기로 소문 난 여자 고등학생이 놀러 왔다.
근데거실도 아니고 자기 안방으로 들어오더니
발랑 드러누워서 배를 까보이질 않나, 어깨를 두드리고 스킨십을 계속하지를 않나.
정상적인 성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다.
지금처럼.
“...왜,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말하지만 내 눈과 입은 능글맞게 웃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도-”
뭔가 말하려다 꿀꺽 삼킨 그녀가 슬그머니 내 옷자락을 내린다.
“여자니까. 그리고 남자애가 배를 차게 하면 안 돼.”
여자, 그리고 남자애.
그 단어 하나하나에서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직은 욕망이 이성을 이기지 못하는 단계.
선배 성좌로서, 그리고 인간족보다 나이 많은 엘프로서의 자세.
이끄는 자로서 존재하던 그녀에게 당연한 이야기.
그렇다면 욕망을 이기게 해 주면 된다.
“따듯하게? 그러네... 손이 참 따듯하네.”
옷자락을 잡고 머뭇거리던 그녀의 손.
새를 낚아채는 뱀처럼 빠르게 팔을 뻗어 그걸 잡아 쥔다.
애들한테 가슴 만지게 했던 경험이 있으니, 까...
이렇게 말하니까 존나 성범죄자 같네.
남녀 역전 세상에서의 정조 관념 때문에 회의감이 들 때가 가끔 있다.
물론 그런 고민은 눈앞의 절경에 휙 날아가 버릴 가벼운 고민일 뿐.
새하얀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건드리듯, 더듬더듬 내 복근을 간질인다.
“너어는, 정말...”
달뜬 한숨과 함께 나를 간질이는 뱅어 같은 흰 손가락.
이런 단어가 왜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는 광경이다.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것 같은 손가락은 감히 희고 투명한 물고기와 비교해도 꿀릴 게 없어 보인다.
툭툭, 계속해서 자극하자 꽃봉오리에서 꽃잎이 펼쳐지듯 소녀는 여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 따듯하게 해 줄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줄 아는 어엿한 여인이.
부드러운 손바닥이 배를 간질인다.
그녀의 성격상 조금 더 머뭇거린다고 예상했지만 한 번 마음 먹으니 꽤나 저돌적이다.
이미 망설이다 한 번 후회했기 때문일까.
자살한 엘프 소년을 생각하면 조금 실례인가 싶지만 아무튼 나는 그녀의 손길을 즐겼다.
“흠, 으흠- 흠-”
다른 세상에도 엄마 손은 약손 같은 게 있는지 어린아이 어르듯 그녀가 내 배를 빙글빙글 쓰다듬는다.
등을 대고 누운 나와, 옆으로 누워 한쪽 팔로 자기 턱을 괴고 나를 내려다보며 배를 쓰다듬는 그녀.
헐렁한 옷차림 때문에 흐트러진 의복 사이로 그녀의 가슴골이 보인다.
작지만 없는 건 아닌, 여성성의 상징이 새하얀 의복보다 하얗게 빛나며 내 시선을 끌어당긴다.
내 시선을 다르게 받아들인 그녀가 살포시 웃어 보인다.
“정말, 이렇게 보면 완전 애 같은데.”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가 나를 껴안는다.
코끝을 파고드는 숲의 향기와 달콤한 체향.
생각보다 적극적이라 조금은 당황하며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니 등 뒤로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진다.
말썽꾸러기를 재우는 누나처럼, 느릿하게 토닥토닥.
“있지, 네 분신... 사라질 때가 된 거 같은데?”
“어?”
이마에 쪽 소리를 내며 가벼운 입맞춤을 한 그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유혹에 당한 줄 알았더니 귀여운 반격을 하네.
그렇다고 해서 무의미했던 시간은 아닌지 애써 의젓한 척하는 그녀의 얼굴은 벌겋기 그지없었다.
‘심장이 저렇게 뛰면서 무슨-’
“안녕, 다음에 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른인 척 나를 배웅하는 그 미소가 묘하다.
한 방 먹었다는 것처럼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개구쟁이처럼 씨익 웃는 그녀.
신기한 식물 구경에 시간 가는 걸 몰랐다가 이렇게 당해버렸네.
그녀는 알까.
그 짧은 포옹 동안 내게 역류한 감정이, 어마어마하게 빨리 뛰는 심장 박동이 모든 진실을 알려줬다는 것을.
아무리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봐야 창피해하는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는 걸.
침대 위에서 조금씩 작아지는 내 키도 그렇고, 그녀의 욕망을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