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73화 : 엘프 누나 1
엘프는 인간과 너무 다르다.
몽마는 꿈속세상에서 인간처럼 살지만, 엘프는 인간의 삶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
시들지 않는 거목의 기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동료였던 엘프 소년을 짝사랑한 것이 수십 년.
인간의 수십 년은 평생에 가깝지만, 엘프에게는 조금 기네? 하고 말 정도의 시간인 것 같다.
화신이 개입한 범죄도 ‘최근 30년’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흘려들어서 기억이 잘 안 나네.
가장 기본적인 시간관념이 다르니 문화 대부분이 다르다.
판타지 세상과 현대 세상의 차이보다 엘프와 인간의 차이가 더 클 정도.
이러한 점은 시들지 않는 거목과 주고받은 편지에서도 나타났다.
- 저기, 편지 하는 거 귀찮지는 않지?
평소대로 세 화신을 돌보면 저녁에 시간이 잠시 남는다.
일상과 훈련이 끝나고 잘 준비를 할 때. 그때는 내가 건드릴 일이 없으니까.
곧 자각몽에 들어올 상황인데 분신을 보내서 뭘 하겠는가.
- 나는 상관없는데 왜?
그럴 때 시들지 않는 거목과 편지로 대화를 나눈다.
심심하다 보니 손글씨로 편지를 쓰는 것조차 재미있기도 하고 동글동글한 글씨로 온 편지를 읽는 재미가 있었으니까.
적어도 백 수십 년은 대륙을 지켜본 성좌에게 과거 이야기를 듣는 건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 너무 자주 편지를 보내는 게 아닌가 싶어서...
숲의 향기와 함께 부끄럽다는 감정이 물씬 풍기는 편지지.
저녁 시간에만, 그것도 편지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 날이 있으니 매일 하는 것도 아닌데.
그마저도 ‘너무 자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게는 2, 3일에 한 번씩 편지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너무 자주 말을 거는 귀찮은 여자가 될까 걱정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귀엽고 예쁘게 생긴 여자와 2, 3일 간격으로 소통하는 일이 귀찮을 리 있나.
- 정말 귀찮지는 않지?
- 귀찮았으면 답장을 안 했지.
- 남자애들은 솔직하지 않은 면도 있으니까 알 수 없어서
엘프 특유의 시간관념에, 정조 역전 세상의 남성성까지 더해지니 저쪽이 알아서 설설 긴다.
내 입장에서 보면 예쁘장한 엘프녀가 포인트도 줘, 권능도 빌려줘, 원룸도 꾸며주니
일방적으로 받아먹기만 하는 기둥서방이 된 기분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심심해서 매일 말 걸어, 달라고 하지 않은 선물을 일방적으로 주는 귀찮은 선배가 될까 걱정하는 모양새다.
가장 큰 이유는 성좌가 다른 성좌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보낸다는 점 같지만.
성좌는 신적 존재로 대우받는다.
과거에 얼마나 비루한 영혼이었든 간에, 이 세상을 창조한 양반이 자신의 권능을 하사했기 때문에.
화신을 만들고 그들에게 초능력과 마법과 무공을 하사해 인류를 수호하는 존재.
그렇게 떠받들어지는 성좌를 같은 성좌가 심부름꾼으로 쓴다?
XX 전자 사장이 같은 계열사 XX 생명 사장을 비서 겸 심부름꾼 삼아 업무 지시를 시키는 게 가능할까?
회사의 자본 규모가 차이난다 해도 같은 사장인데 사장을 심부름꾼 취급 받은 게 지금 나의 상황.
내 인식이야 어쨌든, 이쪽 세상 성좌들의 삶에 빠삭한 그녀에게는 그만큼 부담스러웠나 보다.
포인트를 지원해 주고 싶긴 한데, 공짜로 주자니 내 자존심이 상할 것 같다.
그래서 일단 일을 부탁했는데, 생각해보니 같은 성좌인데 미움 사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을 걱정하는 상황.
나의 인식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걱정하고 있는 그녀를 달래는 방법은 하나.
...뭐 있겠는가, 섹스지.
아포칼립스의 끔찍한 삶에서 안락한 성좌의 삶 때문에 뇌수 대신 정액이 들어찬 것이 아니다.
엘프에게는 엘프의 관념이 있듯 몽마에게는 몽마의 방법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말로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나는 다른 남자와 다르다’ ‘나는 이런 감성을 가지고 있다’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침대로 이끌고 가서 몽마의 정 하나 갈기는 게 쉽고 빠르다.
물론, 어느 정도 욕망도 존재하는 건 인정한다.
엘프 소년을 짝사랑하며 첫사랑의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 대상이 자살해 성좌가 되어버린 외톨이 엘프 소녀.
내게 보내는 감정이 여성으로서 남성에게 느끼는 사랑인지,
말이 통하는 대화 상대에 대한 호감인지 구분조차 못 하는 게 절절히 느껴진다.
나보다 우여곡절이 많은 삶을 살았으며 나이도 많고 인생 경험도 많지만,
사랑과 섹스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순백의 도화지.
그런 여성을 보고 꼴리지 않으면 아래쪽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화신들과의 관계도 그렇고 이번 시들지 않는 거목과의 관계도 그렇고
성좌가 되고 나서 생존본능보다 아랫도리로 생각하는 일이 많아진 것 같아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이게 몽마의 정상이라고.
별로 효과는 없지만 누가 욕하겠는가.
야한 여자는 싫어하나요? 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는 없다.
그러니 야한 남자는 싫어하나요? 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여자도 없겠지.
단순하게 생각하자, 단순하게.
※
세계수의 가지를 붙잡고 집중하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이 바뀐다.
TV 화면을 통해 분신을 보내는데, 세계수 가지의 편지처럼 내 분신을 보낼 수 있지 않나?
요령이 조금 달라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꺅! 어, 어떻게?”
놀란 비명조차 성악처럼 들리는 시들지 않는 거목에게는 찰나의 시간이리라.
그러고 보니 악몽의 편린을 흡수하고 나서 그녀의 노래하는 것 같은 말투가 들리지 않는다.
일종의 종족별 사투리 통역 기능일까? 고운 목소리는 여전하지만 독특한 어조가 사라지니 조금 아쉽네.
“와, 생각보다 넓네?”
“지난번, 편지 때문에 온 거야...?”
무슨 오해를 했는지 시무룩하게 귀가 내려가는 모습이 귀엽다.
떡 각을 잡기 위해 대놓고 쳐들어 왔더니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밟히네.
내가 편지 좀 그만 보내라고 온 것이라 착각했는지 안색이 눈에 보일 정도로 어두워진다.
쫑긋거리다 축 늘어지는 긴 귀도, 마주치지 못하고 아래로 내리까는 눈동자도 나를 유혹하는 것 같다.
하지만 먼저 들이대는 건 참아야지.
내 안의 음습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녀가 내게 손을 대야 하니까.
몽마라는 종족이 그렇다.
먼저 다가가는 것보다 꿈과 환상을 이용해 유혹하여 다가오게 만드는 것이 몽마의 본능.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에게, 왜 잠자리처럼 사냥감을 찾아 날아가지 않냐고 따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응, 지난번 편지 때문에 온 거야.”
“아, 미안해...”
시무룩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는 작은 머리통.
은은한 조명을 받아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비단을 만져본 적이 없지만 이게 비단결 아닐까 싶은 부드러움.
‘아님 말고.’
최초의 기억 이전부터 어른들은 전쟁터에서 죽었고, 엘프 중에서는 그녀가 최고 연장자였다.
머리를 쓰다듬으니 낯선 감촉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그녀.
눈을 마주치고 살짝 웃어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2층까지 올릴 수 있구나?”
내 방은 조금 넓은 원룸인데, 그녀의 방은 2층짜리 주택이었다.
창문 밖으로 푸릇푸릇한 식물이 보이는 걸 보니 마당도 있겠네.
내 원룸에는 창문도 없는데.
혼자 사는데 이렇게 넓어 봐야 귀찮을 것 같지만 화분이 잔뜩 있는 걸 봐선 엘프에게 좋은 환경인가보다.
“정원에 있는 나무가 세계수야?”
허리까지 오는 덤불 너머로 주택보다 높게 솟아오른 나무가 보인다.
담장 너머로 뻗은 가지가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네.
저 가지가 내 방으로 온 것이겠지.
“응, 저 나무가 세계수야. 옆에 있는 덤불은 전에 이야기했던 돌딸기 넝쿨이고, 저 옆에는 얼음 장미가 있어.”
갑작스러운 내 방문과 머리 쓰다듬기에 당황해서 말도 못 하던 그녀였지만,
잘 아는 분야로 이야기를 이끄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식물을 소개하기 시작한다.
내가 알던 식물도 있고, 뭔가 미묘하게 바뀐 식물도 있었다.
“와, 이건 빛이 나는데?”
“응, 별빛 초롱이라고 빛이 사그라지면 꽃을 말려서 약으로 쓸 수 있어. 키우기 엄청 어려워서 포인트를 좀 썼지.”
어릴 적 아파트 단지에서 뭔지도 모르고 달다고 꿀을 빨아 먹던 빨간 열매부터,
방울꽃 비슷하게 생겼는데 안에서 LED 등처럼 빛이 나는 꽃까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식물원에 놀러 간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볼 때마다 놀라니 설명하는 그녀도 신이 났나 보다.
“별빛 초롱이랑 비슷한 꽃에는 달빛 초롱이랑 햇빛 초롱이 있는데, 걔들은 꽃을 먹으면 음기나 양기가 너무 커서, 아?”
화단에 쪼그려 앉아 꽃을 구경하고 있으니, 그녀가 내 근처에 와서 설명한다.
슬그머니 달빛 초롱이 뭔지 구경하러 가는 척 일어나며 그녀에게 몸을 들이댄다.
설명에 열중했는지 느릿하게 움직이는 나를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쿵,
“미, 미안해?!”
“아냐, 미안해할 것 없어.”
몸이 얽히며 작은 가슴이 내 뺨을 짓누른다.
시들지 않는 거목에게서는 청량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났다.
방향제 같은 것 중 향이 과하면 악취로 느껴지는 게 있는데
그녀의 체향은 은은하게 코끝을 간질이며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정도.
‘이러니까 판타지 세상에서 엘프에 목숨을 거는 걸까?’
화들짝 놀라 몸을 떨어트리는 그녀의 목덜미에서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쉬며 향기를 만끽했다.
뻘겋게 달아오른 새하얀 피부, 당황한 듯 위아래로 파닥거리는 길쭉한 귀,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못 하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
눈을 마주치고 다시 한번 야릇하게 웃는다.
악몽의 편린 속 기억처럼.
몽마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