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72화 : 일상 3
세 화신이 각자의 길을 찾아 조금씩 발전하고 있어서 나도 뭔가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뭘 해야 할지 정확히는 모르는 상황.
지금으로서는 악몽의 편린을 모으는 게 가장 빠르다.
문제는 그걸 모으겠다고 악몽을 터트리고 다니면 피해자가 잔뜩 생긴다는 거다.
사람의 성격이나 가치관을 바꿀 정도로 큰 트라우마를 악화시켜서 얻는 게 악몽의 편린.
조금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정신병 초기 증상이 있는 사람을 괴롭혀서 정신병 말기까지 이끌고 가면 얻는 물건.
조금 강해지겠다고 길 가던 시민 붙잡고 그런 짓거리를 할 리 있나.
대상이 범죄자면 상관없지 않나? 하고 생각도 해 봤지만 어쩔 수 없다.
성좌와 화신에 관한 법률과 규칙이 있는 세상이다.
성좌가 강해지겠다고 범죄자를 쓱싹한다면 이게 인신 공양이랑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나야 사람 죽이는 게 통조림 뚜껑 여는 일보다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이쪽 세상에 기본적으로 깔린 사상이다.
성좌를 숭배하는 이유는 결국 인간의 안락한 삶을 위해서다.
그런데 숭배를 위해 인간의 생명을 바친다면 본말전도 아닌가.
때문에 성좌에게 온갖 예술품부터 포인트가 될 법한 물건을 바치더라도, 생명과 관련된 제사는 거의 없다.
뭐, 이런 다양한 제약 때문에 이하린같이 희귀한 제사장들이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이겠지.
성좌에게 아무거나 바칠 수 있다면 누가 공들여 제사를 지내겠는가?
몸을 정갈히 하고, 삿된 것을 멀리하며, 마법적 처리를 한 제단 위에서 절차에 따라야지 성좌께 닿으니 돈을 내겠지.
아무튼, 다양한 제약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의외의 곳에서 드러났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응, 밀알에 가지를 세 번 흔들어 줘.”
바로 시들지 않는 거목과의 협업이었다.
“세 걸음 걷고, 밀알에 잎사귀가 닿을 정도로 세 번. 그걸 세 번 반복하고 밭에 가지를... 던지라고?”
“응, 바로 그거야.”
시들지 않는 거목은 성좌 중 거느리는 화신이 매우 많은 부류에 속한다.
나와 달리 두 종류의 화신과 계약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정아린 같이 드루이드의 권능을 받고 전투직에 나서는 화신들.
두 번째는 세계수의 축복을 받는 농부들이다.
성좌가 있고 화신이 있으며 외계의 괴물이 있어도 사람은 뭘 먹어야 하니까.
스마트폰과 TV, 컴퓨터 등 과학 기술이 우리 세상과 비슷한 수준이니 농사도 비슷하게 짓고 있다.
마법의 도움이던 성좌의 도움이 있던 일단 논과 밭에서 식량을 경작한다는 뜻이다.
불사르는 폭군처럼 공장에서 밀과 돼지고기를 생산하는 시대는 멀고 먼 미래겠지.
“정말 이거면 되는 거야?”
“맞아, 나는 분신을 전부 보내기 힘들어서 부탁하는 거니까. 너한테는 쉽지 않을까?”
그녀가 농부들에게 내릴 수 있는 축복은 두 가지 종류.
화신 계약을 맺은 농부에게 내리는 축복과 그녀들의 밭에 내리는 축복이다.
농부에게 내리는 축복이야 방구석에서 클릭만 해도 되지만 논밭에 내리는 축복은 다른 듯하다.
“나뭇가지를 이렇게 많이 떼어내도 괜찮은 거야?”
“땅에 닿아서 자연에 환원되면 그만큼 세계수도 자라나니까 괜찮아.”
원룸에 있던 큰 나뭇가지가 툭툭 사람 팔뚝 크기의 나뭇가지를 장작 쌓듯이 내 방바닥에 떨군다.
모양새는 낙엽을 떨구는 것처럼 가볍게 떨어지는데, 팔뚝만 한 것이 수십 개 떨어지니 부피가 장난 아니다.
덕분에 방 안은 숲속이라도 된 것처럼 청량한 향기가 넘친다.
“그러니까, 잘 부탁해?”
그녀의 부탁을 듣고 지난번에 내 방에 놀러 온 그녀의 정령을 떠올렸다.
눈이 마주치고 잠시 마음이 흐트러지더니, 그것만으로 펑 사라진 정령 분신.
그런 연약한 분신으로 동부 대륙 곡창지역에 축복을 내리긴 힘들겠지.
떼어주는 포인트도 많고 분신 연습도 되는 데다 동대륙 다양한 곳을 돌아다닐 기회.
사양할 이유도 없어 나는 그녀의 부탁을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
성좌가 다른 성좌의 대리인이 된다.
자존심 강한 성좌나, 전생에 왕족이거나 하면 절대 안 받아들이겠지.
하지만 나는 그럴 이유가 없다. 구체적으로 화신이 버는 만큼 내가 포인트를 벌 수 있는데.
수입이 두 배가 되는 데 이걸 안 해?
포인트가 복사가 된다고.
‘하지 말 걸 그랬나.’
포인트에 눈이 먼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있었다.
하나는 규모. 나는 분신으로 슥 가서 농장 주인의 안내를 받고 나뭇가지 던지면 끝이라 생각했었다.
포인트를 케이크처럼 쉽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아, 그럼 이쪽으로!”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풍년을 기원하는 농부들의 축제 겸 제사에, 성좌가 직접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다.
동네 시골에서 돼지머리에 굿판만 올려도 시끌벅적 한데
진짜 성좌가 내려와 눈에 보이는 축복을 내려주면 사람들이 얼마나 오겠는가?
“어이구, 곱다 고와.”
“거그, 김가네 아지매. 성좌님한테 허튼소리 하다가는 경을 치니 입 좀 다무소.”
“으이? 저 고운 도련님이 성좌님이시라고?”
“그랴. 그러니까 아가리 다물고 막걸리나 자셔.”
밭일을 하다 왔는지 흙먼지 묻은 아줌마들이 우글우글 몰려든다.
거기에 이마에 쟁반을 지고 오는 까까머리 아저씨들도 잔뜩.
아줌마들이 뽀글머리 파마를 하는 이유가 오래가서라던데.
남녀 역전 세계여서 그런지 농부 아저씨들은 머리 관리를 덜 하기 위해 까까머리가 되어 있는구나.
몸빼를 입은 아저씨들이 막걸리니 전이니 머리 고기니 하는 것들을 잔뜩 들고 오니
풍년기원제는 어느새 동네잔치가 되어 있었다.
밭일로 다져진 구릿빛 피부를 드러내며 막걸리를 권하는 아저씨들을 피해 세계수의 가지를 흔든다.
팔락거리는 소매가 조금 거슬리네-
생각하지 못한 두 번째. 여기가 남녀 역전 세상이라는 것.
남성인 나는 신관보다는 무녀에 가깝고, 교황보다는 성녀였다.
무슨 뜻이냐면 복장이 팔락거린다는 소리지. 하늘거리는 의상에 인중이 헤벌쭉 늘어나는 아줌마들이 있다.
그나마 농부도 성좌와 관련된 직업이라고 젊은 사람이 있긴 하지만 유쾌하지는 않았다.
미녀들이 나를 바라보는 거면 참겠는데, 주름진 아지매들이 그러니 기분이 좀 안좋네.
- 저기, 이건 네 취향... 아니지?
- 아냐 아냐. 세계수 관리자들의 남성 복장인걸?
한복 두루마기처럼 소매 넓은 겉옷.
새하얀 천에 금색 자수가 허리를 휘감은 나무 넝쿨처럼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치마처럼 생기거나 노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여성스럽다’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주는 모양새.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도 주책이니 불경이니 하며 등짝 두드리는 소리도 등 뒤에서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아이구, 눈가 찢어진다 이 화상아.”
“거, 홀애미 티 좀 내지 말고 전이나 자셔. 막걸리 마시게 두면 사고 치겠구먼.”
“아랫동네 그 뭐시냐, 우옌네 동네가 천벌 받아서 일 년 치 농사 말아먹은 거 몰러?”
그 와중에 왁자지껄한 아저씨들 구박 속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들려 밭두렁에 넘어질 뻔했지만 무사히 행사를 끝냈다.
잔칫상을 준비하고 이것저것 쥐여 주는 아저씨들을 피해,
몇몇 아줌마들의 음흉한 눈초리와 그걸 구박하는 아저씨들의 수다까지.
‘역시 세상에 날로 먹을 수 있는 건 없네.’
엄청나게 고생한 건 아니고, 딱 포인트 값 했구나 싶을 규모의 행사.
나뭇가지의 수를 보면 몇 번 더 하게 생겼네.
이동할 때에는 분신을 해제한 뒤 다시 생성하면 되니까 다행이다.
하루 행사 몇 탕씩 뛰며 혹사당하는 연예인의 심정을 느낄 뻔했어.
그래도 동부 대륙의 곡창지대를 돌아다니니 재미있는 사실을 잔뜩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인터넷 사이트로는 알 수 없는 세상의 기초 상식들.
동대륙은 크다.
그 때문에 지역별로 사투리가 거의 외국어처럼 되어 있는 일도 있었다.
이 커다란 대륙이 왜 한국어와 99% 비슷한 언어를 쓸까? 에 대한 해답이 나온 것이다.
동대륙 중앙의 도시 사람들은 표준어로 阮이라는 글자를 원이라고 읽지만, 동대륙 동남부 사람들은 응우옌이라 읽는다.
옌이라 읽는 지역도 완이라 읽는 지역도 있고 천차만별.
전생의 아시아에 속하는 국가들의 언어가 여기서는 사투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아마 서대륙도 표준어로 영어를 쓰고, 사투리로 스페인어나 프랑스어 같은 걸 쓰지 않을까?
그 덕에 각 지역 특산품으로 만든 전통 음식을 잔뜩 맛볼 수 있어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파전에 막걸리라는 고전적인 조합부터 닭구이에 사케 비슷한 술까지 다양하게 즐겼으니까.
도시 음식점에서 파는 것과는 조금 다른 특유의 맛들이 잘 살아 있었다.
“하이고, 수고하셨습니다.”
피부가 까무잡잡한 노파 하나가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인다.
동네마다 의식이 달라서 보는 맛이 있었는데, 혹여나 성좌가 지루했을까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을 사람들이 장작으로 쌓은 제단에 불을 붙이고 빙빙 돌며 춤을 추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니
슬금슬금 이장 비슷한 사람이 접근하는 것도 그 이유다.
다 늙은 사람들만 모여서 자기들끼리 술판을 벌이니, 그걸 구경하던 성좌가 노여워하지 않나? 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 성좌가 조금은 지저분하다 할 수 있는 농촌 축제와 어울리지 않는세련된 미남이라서 그런 걱정을 하는 걸지도.
‘이게 시들지 않는 거목의 취향인가?’
생각해보면 어차피 세계수의 가지만 던져주면 되는 행사인데, 왜 전통 복장을 입혔을까.
분신의 외형이 엘프 특유의 숲 내음 나는 마력의 영향을 받아 조금 바뀐 것도 그렇고.
하기야 몇백 년을 외롭게 살아온 소녀 아닌가.
조금이나마 음흉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런 섬세한 부분까지 파고들 마음은 없었다.
한예지는 부드러운 눈매에 나른한 인상을,
이하린은 키도 크고 어깨도 넓어 듬직하고 위엄 있는 모습을,
김하은은 탄탄한 몸매지만 체구는 조금 줄어들어 자신과 비슷한 수준이 되는 걸 선호하던데.
‘엘프의 취향은 여리여리한 몸인가?’
지금의 모습은 김하은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얇은 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