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68화 : 취미
행복하게 미소지으며 재잘재잘 떠드는 여성의 말을 강제로 끊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리고 나는 별 이득 없는 힘든 일을 하지 않지.
“그래서 이번 사건에 대해-”
“그래, 그렇구나.”
저렇게 말하면 턱관절이 아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다스러워지는 이하린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첫 만남 때 게거품 물고 기절하던 모습이 너무 강렬하긴 했지.
지금까진 심약하고 조용한 오타쿠의 이미지가 뇌리에 박혀 있어서 그런가.
서로 껴안고 옆으로 엉거주춤 걷는 연인처럼, 아니 발 등에 아이를 올려놓고 이동하는 애 아빠처럼
나는 그녀가 재잘거리는 것을 들으며 조금씩 꿈을 움직였다.
이하린이 알고 있는 지식이 나와 내가 잡아먹은 놈의 지식을 합친 것보다 방대한데.
성좌 둘을 합쳐도 그보다 박식한 화신이라니.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제가 올린 제물이?”
“음, 지난번 왔던 음식 말고는 딱히 온 게 없단다.”
그 말에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리듯, 그녀의 얼굴이 울상이 된다.
원래 이렇게 표정이 다양하고 감정이 풍부하던가.
꿈에서나 그리던 화신 생활을 계속하게 되니 성격이 좀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봐야 하나?
고개가 푹 내려가는 그녀와 함께 익숙한 소파에 앉는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거실로 배경을 바꿨으니까.
어깨를 붙잡고 힘을 줘 내리자 그제야 주변 모습이 조금 바뀐 걸 알아차리고 얌전히 소파에 앉는다.
털썩, 소파에 앉아 자연스럽게 마실 것을 소환하는 그녀가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 성좌님, 세 번째 화신은 어떤 분인가요?”
“김하은이라 하는데, 어떤 사람이냐면-”
나는 차갑게 우린 달달한 밀크티, 그녀는 유명한 카페의 콜드 브루 커피.
자연스럽게 한 입 홀짝거리자 차갑고 달콤한 음료가 입안을 적셔서 사례가 걸렸다.
세 번째 화신 계약을 얘가 왜 알고 있는데?
“-재능이 있는데 안 좋은 일 때문에 방황하던 아이란다.”
입안에 든 밀크티를 꼴사납게 흘리고 화들짝 놀라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고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여기서 아무리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흐트러진다 해서
이하린의 광증에 가까운 충성심이 사라질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나 좋다는 여자 앞에서 무게를 잡는 게 남자 마음 아니겠는가.
...근데 좀 무섭긴 하네.
“그런데,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었니?”
동대륙도 아니고 아카데미 실험실에 처박혀서
부모님과 연락도 잘 하지 않는 주제에 동대륙 소식을 어떻게 알았을까.
김하은 본인은 근육통에 익숙해지느라 울면서 자고 있고, 한예지는 김하은의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있던데.
“제가 취미로 화신 계약서를 가끔 읽어서, 거기서 성좌님의 이름을 봤거든요.”
수줍게 헤헤, 웃음 그녀가 손안에 스마트폰을 만들어낸다.
지난번에 봤던 국가 공인 성좌-화신 데이터베이스 사이트가 그 작은 화면 안에 담겨 있었다.
뉴스도 이야기도 아니고, 새 화신 등록되는 목록을 전부 읽는 것이 취미라니.
연예인을 좋아한다고 연예기획사 홈페이지를 들어가 계약한 모든 연습생 이름을 구경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구나, 눈앞에 있네.
나중에 지식과 정보에 관련된 재능을 얻으면 동대륙에 존재하는 화신 이름을 전부 외울 것 같은데.
옆에 딱 달라붙었되 피부는 닿지 않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요즘 연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몰두하다 보니 조금 피곤한 것 같아서, 성좌님 말씀대로 조금씩 쉬고 있어요.”
‘그리고 그 쉬는 시간에는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서 새로 계약한 화신들 이름을 전부 확인하고 있는 거니?’
목구멍 너머로 이런 건 휴식이 아니야! 하는 일갈이 터져 나올 뻔한 것을 강제로 욱여넣는다.
어째 이하린의 순수한 광기 앞에 노출되니 계속 자상한 교회 오빠 코스프레가 박살이 나는 게 느껴지네.
역시,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나?
“아카데미에 있다 보니 성좌님들이 자주 오셔서 화신들을 잔뜩 만날 수 있거든요.그 덕분에 공부하거나 실습할 때 집중해서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머리를 좀 식히고 있어요. 처음에는 마법학 교관님이 소개해 주신 분들 예술품 같은 거 공양했는데, 점점 실력이 좋아지면서 사소한 것들도 올려보낼 수 있게 되었어요.”
“사소한 걸 보내는 게 더 어렵니?”
“네!”
씁쓰름한 콜드 브루 커피를 냉수처럼 벌컥 마신 그녀가 잔을 탁 내려놓고 입을 연다.
아, 씨. 또 지뢰 밟았네.
“제사는 본디 성좌님께 귀하고 값어치 있는 물건을 진상하는 마법이거든요. 그 때문에 제물이 귀하면 귀할수록 원형 그대로 올라가고, 값어치가 없을 때 손상되거나 강제로 포인트로 환원, 정말 급이 떨어지면 성좌님께 가지도 못하고 소멸당하거든요.”
“그런 것 치고는 내게 커피와 샌드위치를 보내 주지 않았니?”
“헤헤, 그건 제가 성좌님과 계약했기 때문에 운 좋게 성공한 거예요. 정성 들여 만든 수제 음식이라 상차림으로 인정받아서 그런 것도 있고요.”
그래서 아까 뭘 받은 거 있냐고 물어봤구나.
마치 주문한 물건 택배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모습과 닮았던데.
내가 안 보는 사이에 여러가지 물건을 내게 보내려고 시도했지만 전부 실패했다는 건가.
“그래서 대작이라 불리는 미술품이나, 예술가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은 제사에 실패하지 않는데 돈 주고 산 물건을 성좌님께 보내려는 제사는 실패를 많이 해요.”
크고 비싼 게 쉽고, 작고 사소한 것이 어렵다.
왜, 만화 같은데 보면 갑자기 초능력자가 된 인간이 문을 열려다 문고리를 박살 내거나,
세수하려다 세면대를 부수는 장면 같은 걸 생각해보면 타당하기 그지없다.
괴력이 생기면 날달걀이나 두부를 깨트리지 않고 손에 쥐는 수련을 하는 내용도 꽤 많이 본 것 같은데.
폐허가 된 대여점에서 주워와 한 장씩 땔감으로 사라진 소설의 내용을 기억 속에서 더듬고 있으니 계속해서 이하린의 말이 이어진다.
“그리고 제가-”
대화를 들어 주는 것도 좋지만 몽마로서 케어해주러 온 거니까.
그래서, 그런데, 그리고, 그러고 보니로 무한하게 순환하는 그녀의 화신 토크
이걸 끊기 위해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다.
촉촉하던 입술이 바짝 마르고 각질이 올라온 상태.
턱을 붙잡고 엄지로 아랫입술을 살살 쓰다듬으니 그녀가 대번에 조용해진다.
진작 이렇게 할걸.
천진난만하게 재잘거리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턱을 붙잡은 손가락이 쇄골 쪽에 끼어버릴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다.
몇 날 며칠을 몸 비비며 게거품 물고 기절하는 일은 없어졌다지만 부끄러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오른손 엄지로는 아랫입술을 살살 문지르며 왼손으로는 이하린의 뒷머리를 붙잡고 뒤로 눕혔다.
군사 학교에서는 단발이더니 아카데미에 와서는 어깨뼈를 조금 넘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길어졌네.
양손을 어색하게 꼭 모은 그녀가 소파에 눕는다.
그 모습이 맹수 앞에서 굳어버린 초식동물 같아 입꼬리가 스윽 올라간다.
주도적으로 뭘 하기에는 무례한 것 같은데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자니 건방진 것 같다는 딜레마에 갇혀 있으니까.
증폭된 몽마의 능력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녀의 고민이 느껴진다.
그렇게 가만히 있어 주면 나야 좋지.
늘 오냐오냐하며 남자에 익숙치 못한 숫처녀들에게 교육하듯 하다 보니 조금 좀이 쑤셔서.
평소라면 별 상관 없이 예쁘장한 여인들과 어울리는 것에 감사하겠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간만에 손맛을 봐서 그런지, 다른 몽마를 죽이고 근원을 차지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몸이 근질근질하다.
이쪽 세상에 와서 성좌 놀이를 하느라 잠시 잠재운 남성성이 불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기분이 들어서.
대부분의 밤이면 밤마다 물고 빨고 할 건 다 했다지만 일 년 내내 수동적으로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소파 위에서 긴장으로 딱딱히 굳어 있는 이하린의 양 무릎을 손으로 잡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여자애들인데, 운동하니까 몸이 장난 아니네.’
출퇴근에 시달리며 반쯤 직장인의 삶을 사는 총잽이 한예지와
23년의 세월을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다 반 몽마가 되어버린 김하은과 달리
이하린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운동해 온 것 같은몸이다.
운동 동기가 화신이 될 때를 대비한다는 망상에 가까운 동기였지만, 뭐 화신이 진짜 되었으니 넘어가고.
아무튼 초등학교 무렵부터 공 차고 놀다 중고등학교 진지하게 운동을 하고,
군사 학교에서 훈련을 받다 아카데미 기초 체력 단련까지 수료한 그녀의 몸매는 점점 좋아지고 있었다.
하루 대부분을 책상머리에서 보낸다지만 규칙적인 수면과 운동,
전문가가 관리하는 질 좋은 식단이 어우러지니 살이 찔 리 없지.
그러한 부분은 내가 그녀의 무릎을 붙잡고 허벅지 사이로 슬그머니 들어가자 명백하게 드러났다.
“서, 성좌님!?”
쌔끈한 여자가 무릎을 꿇고 다리 사이로 들어와 바지 벨트를 풀면 남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적어도 지금 이하린이 하는 생각과 다를 게 없겠지.
얼굴도 귀도 시뻘겋게 변한 그녀가 처음으로 미약한 반항을 한다.
허벅지에서 후욱 일어나는 근육. 튼실한 장딴지는 부담스럽게 과하지 않았다.
힘줄이 바짝 서서 겉으로 드러나고 다리는 탄탄하게 굳어 손바닥으로 눌러보니 꾸욱꾹 밀리는 게 느껴질 정도.
“다리에 힘 빼렴.”
“...네.”
물론, 그 탄탄한 허벅지가 내 욕망을 불태우면 불태웠지 가라앉힐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