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67화 : 이해
파편이라는 것은 소화하는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먹고 나서야 알았다.
큰 먹이를 삼킨 아나콘다가 여러 날 동안 웅크려있는 것처럼,
그 보라 머리의 몽마족은 내 안에서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기분이 참 묘한데.’
여름의 어느 날 갑자기 패딩 주머니에 붕어빵 사 먹으려고 만 원짜리 지폐를 넣어 놨다는 게 떠오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몽마의 지식이 내 머리에 떠오른다.
마력을 다루는 법, 몽마들의 습관이나 평균적인 모습, 그리고 단편적인 기억들.
인간과 똑같이 생겼지만, 인간은 아닌 종족의 기본적인 지식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서야 몽마족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몽마족은, 말 그대로 꿈속 세계의 주민이다.
꿈을 다루기에 그렇게 불린 게 아니다.
꿈속 세계에서 살기 때문에 주민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엘프도 드워프도 SF 슈퍼 솔져도 존재하는데 왜 다른 유명한 몽마는 없는가?
다들 꿈속에 있으니까 없는 거지.
그들은 나처럼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는다.
마치 고대의 제사장들이 꿈속에서 신적 존재를 만나듯,
몽마의 마력을 다루는 재능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꿈속을 헤매다 몽마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포인트나 성좌의 업무? 그게 무슨 상관일까.
몽마족에게 있어서 원룸의 기초적인 침대 하나만 있다면, 꿈속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데.
포인트가 없으면 자각몽도 배우지 못했을 나와 달리, 그들은 꿈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
그러니까 딱히 화신을 키울 이유도 없지.
그냥 원룸의 침대에 누워서 냉장고에 있는 0pt짜리 음식을 먹으며 계속 꿈만 꾸면 되니까.
자각몽을 휴식의 장소로 사용하고 현실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나와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물론 지식을 얻었다 해서 완전히 호기심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내게 죽은 이 새끼가 왜 날뛰기 시작했는지 모르니까.
하는 짓만 보면 어설프기 그지없는데 이유는 여전히 할 수 없다.
인간에서 몽마가 된 나와 달리, 날 때부터 몽마였던 녀석.
원룸에서 꿈만 꾸면 될 걸 굳이 타락한 화신이 되고,
위험을 무릅쓰고 현실에 강림해서, 목숨을 걸고 하는 짓이라는 게
동대륙 제압 부대의 일부를 공격하는 짓이라니.
비행기를 빼앗은 테러리스트가 대도시의 무역센터 대신
위성 도시의 이름도 모르는 중소기업에 테러를 시도한 상황 아닌가?
제압 부대원에게 원한이 있다 보기에는 목숨에 근원까지 걸었고,
목숨을 불태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경험상 이상한 일에 목숨을 거는 또라이들은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게 답이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얘는 어쩌지...’
지금은 그 호기심보다 이하린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니까.
‘생각보다 중증인데.’
성좌와 화신을 알기 위해 군사 학교까지 들어갔던 이하린은 지금 대륙 중앙의 아카데미에 머무른다.
학생보다 대학원생이나 연구자에 가까운 모습으로 처박혀서 제사를 연구하고, 올리고, 수수료를 받는 상황.
문제가 있다면 그녀의 자각몽이 흔들리는 걸 봐서는 아주 큰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각몽이 흔들리고 연구에 집중을 못 하며 생활 패턴이 깨질 정도로 커다란 고민.
밥을 굶고잠을 줄여도 매일 하던 웹서핑 성좌 덕질도 멈추는 걸 보니 한숨이 푹 나온다.
‘이게 30대 백수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인가?’
이하린의 고민은 한 단어로 정리가 된다.
진로 고민.
“하아... 한 달 밖에 안 남았는데.”
다 마신 커피의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머리를 벅벅 긁는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다.
원래대로라면 마법진이나 제사 도구에 머리를 쿡 박고 거북목이 걱정되는 자세로 헤벌쭉 입을 벌리고 공부나 하고 있던 게 그녀의 모습인데.
재료가 가득한 책상 위는 서류 몇 장만 있고, 그 위에는 몇 번이고 고쳐 쓴 듯 볼펜이 죽죽 지저분하게 그어져 있었다.
볼펜으로 글씨를 쓰고, 화이트로 뭉개고, 그 위에 다시 줄을 긋고 글씨를 쓰고 북북 뭉개고-
결국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상황만 놓고 보면 행복한 고민인데, 성좌에 대해 너무 진지한 이하린이다 보니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있다.
제사 마법이라는 희귀한 특성에, 재능 보정까지 받은 그녀에게는 크게 두 가지 진로가 있다.
다른 화신들처럼 대륙 외곽으로 나갈 것이냐 내륙으로 들어올 것이냐 하는 선택지.
대륙 끝자락 전쟁터로 향해 전쟁에 나가는 이들의 행운을 빌어주는 안전기원제를 벌이는 마법사가 될 것인지,
내륙으로 들어와 지금처럼 화신과 성좌의 소통을 도와줄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화신들은 재능에 따라 정해진 다지만, 제사라는 특이한 마법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서 사용할 수 있으니까.
남들이라면 돈 많이 버는 내륙이다, 성좌들에게 헌신할 수 있는 외곽이다.
이렇게 기준을 잡고 정하겠지만 고민하는 이하린은 중증의 성좌 오타쿠.
내륙으로 가면 못 만나는 화신
외곽으로 가면 못 만나는 화신
이 두 가지 걱정이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게 흩트리는 것이다.
그녀가 화신이 되고 가장 기뻐한 일 중 하나가, 다른 화신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니까.
성좌가 좋다고 군사 학교에 입학해 훈련을 받던 어마어마한 행동력도 이런 상황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머리를 벅벅 긁고, 마시지도 않던 맥주를 마시지 않나,
혼잣말이 늘어나고 아침에 달리다 고민을 하다 코스를 벗어나기까지.
“전쟁에 참여하면 내륙 쪽, 비전투직종 성좌들이랑 엮일 일이 너무 없는데...”
“아냐, 그렇다고 내륙으로 가면 동대륙 말고 다른 대륙의 신들과 교류 할 일이 너무 적어져."
"전쟁터에서는 합동 섬멸전 같은 게 있어서 북 대륙 남 대륙과 자주 엮이는데, 특히 불사르는 폭군님...”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내륙직에서 외교 관련으로 가면 되지 않나?”
“아냐, 외교직 때문에 오히려 동대륙 화신에게 소홀해지면 어쩌지? 그럼 본말전도인데...”
아침과 점심과 저녁에 하는 생각이 다르고, 그걸 혼잣말로 전부 중얼거리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저렇게 우유부단한 걸 보니, 해결책은 하나.
그냥 내가 정해주는 것이다.
한예지와는 다르지만, 아무튼 이하린 또한 성좌인 내가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그러니 그녀의 고민은 오늘까지. 밤이 되면 꿈에 찾아가서 정해줘야겠다.
※
딱히 원하는 게 없어서 시키는 대로 하는 한예지와 달리 이하린은 원하는 게 너무 많았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으니 성좌님이 시키시면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직 뭘 안 시키셨네.
이게 그녀의 심리인 것 같다.
놔두면 아카데미 졸업 학점 취득까지 미루고 고민할 거고, 정해주면 불평불만 없이 기쁘게 따를 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자각몽에 들어가자 꿈속에서도 고민 중인 이하린이 보인다.
오른쪽과 왼쪽에 가득히 쌓인 서류에는 성좌들이나 화신들의 프로필이 잔뜩.
“으, 으으윽...”
왼쪽으로 한 걸음 걸어가니, 오른쪽에 있는 성좌들의 서류가 바람에 펄럭인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오른쪽으로 두 걸음 가니 쿠르르릉 소리와 함께 왼쪽 서류철이 어디론가 떠밀려 사라지려 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덜컹 덜그럭 난리가 나는 양쪽 서류의 모습에 울상이 된 이하린이
옴짝달싹 못 하고 가운데에서 정확히 중립을 유지하며 근육을 혹사하고 있다.
마치 허수아비처럼 양팔을 쫙 벌리고 필사적으로 버티는 모습에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내가 보기에는 희극이지만, 그녀가 느끼기에는 비극이겠지.
“그렇게 고민되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건 어떠니?”
“성좌님!”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더니 활짝 웃는다.
그러더니 서류가 흐트러지든 휘말리든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달려든다.
세상이 밝게 빛나며 서류가 스윽 사라지는 것이 달려드는 그녀의 등 뒤로 보인다.
그대로 내 품 안에 달려들 줄 알았는데, 황급히 달려와서는 내 앞에 급히 멈춰선다.
포옹조차 부담스러워서 못 하는 건가 싶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니 그제야 내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린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김하은을 껴안았듯이 가슴팍에 이하린의 얼굴을 끌어안는다.
흐읍, 하고 깊게 숨 들이 마시는 소리가 나더니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그녀.
남자 가슴팍에 자기 콧김 내뱉는 것조차 부담스러운지 숨을 참고 있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쿡, 하고 빈손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그제야 퍄학, 소리를 내며 숨을 쉰다.
야밤에 침대에서 할 건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다니.
매일 공부에 매달리길래 한동안 자각몽 속에서 쉬게 내버려 뒀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걸까.
“왜 그렇게 고민을 하니?”
“그게-”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여는 그 모습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타쿠한테 설명 좀 해보라고 말하면 쉽게 안 끝날 텐데.
꿈 속임에도 불구하고 입 안에 침이 바싹 말라 시원한 냉수를 소환해야 할 때 까지 그녀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7살짜리 조카한테 공룡 이름 물어봤을 때가 생각나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