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64화 : 편린 (64/169)



〈 64화 〉64화 : 편린

 번이고 지속 된 핵폭발의 끝에, 몽마는 몽마(과거형)가 되어 사라지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아무리 제압 부대가 대단하다고 해도 성좌인 우리 둘을 심문할 수는 없으니,
화신들의 증언으로  명의 성좌가  명의 성좌를 제압한 일로 사건이 종결된 것이다.

야밤에 난리를 친 제압 부대원 중 누군가는 오전 순찰을 돌아야 한다며 죽상으로 근무표를 짜고 있었고,
시들지 않는 거목은 어느새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갔으며 나 또한 악몽의 편린 14개를 가지고  원룸으로 돌아왔다.
같은 몽마와 싸우고, 그를 살해하며 근원을 개방하고 나니 마치 레벨 업을  것처럼 몽마족의 지식이 조금 늘어난 상태.


‘좆밥 싸움이었구나...’

머릿 속에 들어온 지식으로 이번 사건을 정리하면 정말 한 단어로 끝난다.


좆밥 싸움.

성좌들과 대적하는 외계의 괴물들이 미쳐 날뛰는 세상에서,
고작 핵미사일 몇 방에 근원까지 소멸한 녀석도 나처럼 별거 없는 초짜 성좌였다.
당장 시들지 않는 거목만 보더라도 다른 권능 다 봉인 당했는데 나무뿌리 하나로 녀석의 결계를 박살을 내지 않았던가.

생각해보면, 너무 당연했다.

불사르는 폭군처럼 SF 세계관이라면 고작 핵미사일에 당할까?
우주를 항해하는 전함 대대를 이끌고 행성을 소각시키며 다니는데 고작 핵미사일에 대한 방비가 없다는  말이 되나.
아마 핵미사일이고 뭐고 대공 방어 체계에 막힌 다음 방사능도 깔끔하게 제거당하지 않을까.

판타지 세상의 성좌라 해도 마찬가지.
당장 마법을 쓰는 성좌만 하더라도 폭탄을 불발시키는 연소 제어 관련된 마법이 있을 것 같은데
백날 핵미사일을 떨궈도 터지지 않고 땅에 박힐 것이다.

아니면 뭐, 메테오 쓰듯 텔레포트로 미사일을 치워버릴 수도 있겠지.


검을 든 육체파 성좌라면?
폭격기에서 미사일이 투하되어 땅에 닿기 전에 수백  나를 베어 죽일 수 있을게 당연하다.
최상위 화신만 해도 발 구르기와 맨주먹으로 전차 대대를 박살 내는 일이 가능한데 성좌는 어느 정도겠는가.


물론 그 정도 차이가 나면 무슨 악몽을 가지고 있던 찍소리도 못 내겠지만.

어느덧 해가 떠오르며 오전 근무에서 해방된 한예지는 행복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아침 식사를 마친 이하린은 또 마법 연구를 시작했다.
현관에서 일어난 김하은은 근육통 때문에 어기적어기적 샤워하다 관장에게 붙잡혀서 헬스장으로 끌려가는 중.
식사도 하지 못했다니까 도시락통에 준비한 닭가슴살 샐러드를 상냥하게 건네주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는 작은 고민에 빠졌다.

‘이걸, 먹으면 되는 건가?’

손안에 쥐어진 것은 악몽의 편린.


생긴 것만 보면 무슨 보라색 유리 조각 같이 생겨서 입에 넣기 찝찝했다.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으니 등 뒤에서 슬금슬금 세계수의 가지가 뻗어오길래  쳐냈다.
투툭 떨어지는 나뭇잎 몇 개에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하나 줬으면  거지.

악몽의 편린을 어디다 쓰나 했더니, 이게 경험치 물약 같은 거라니.
심지어 타인의 악몽을 직접 해결하고 하나 건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불사르는 폭군도 꿈속 주민이라 부르고, 시들지 않는 거목도 몽마족을 평범하게 대하길래 판타지 세상 종족 중 하나인가 싶었는데.

몽마(夢魔)의 마(魔)가 왜 마귀 마(魔)를 붙였나 이해했다.

‘악몽을 해결해 주는  아니라, 악몽을 부풀려서 터트리는 방식인가.’


내 화신의 악몽을 해결 해 주고, 트라우마를 해결해 주려고 낑낑대니 악몽의 편린을 하나도  얻지.


몽마족은 타인의 악몽을 부풀리고 터트려서 그 악몽이 현실에 반영되게 만드는 종족.
뱀파이어가 사람 피를 마시며 살 듯, 몽마족은 악몽에 고통스러워하는 감각을 먹고 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고민했던 모든 방법이 정반대였다는 소리.

‘흑마법사가 백마법을 쓰려고 하니까 아무리 수련해봐야 레벨이 안 오르지...!’

이러면 화신이 아니라 적당한 범죄자들, 뒷골목 깡패들 붙잡아서 악몽의 편린을 모아야겠는데.
직접 화면을 뒤져서 희생양을 찾기 귀찮은데 한예지가 체포한 범죄자들을 건드리는 것이 더 편하겠지?

이러면 성장 방향이 대충 정해진  같다.
어차피 내 화신들이 괴물들과 싸우러 대륙 밖으로 향하지않는 것은 거의 확실하니까.


내륙에서 인간 범죄자를 체포하는 화신들을 늘리고,
그 범죄자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줘서 악몽의 편린을 모으는 것이다.

다시 슬금슬금 다가오는 나뭇가지를 피해
나는 악몽의 편린 하나를  초콜릿 깨물 듯 앞니로 깨물었다.

손으로 쥐고 바닥에 던지면 무슨 금속 파편처럼 깨지지도 않고 단단하기 그지없던 조각이,
앞니에 닿는 순간 아이스 아메리카노 속에서 녹아내린 얇은 각얼음처럼 으득으득 깨져 입안으로 녹아 넘어온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싸한 청량감.


그 청량한 민트향에 치약을 삼킨 기분이 들었다.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까지는 괜찮은데 민트 100%는 내게 무리였나보다.
스으, 숨을 들이마시니 공기가 차갑게 느껴지며 입안이 화한 느낌이 든다.
양치하다 헹구기도 전에 실수로 침을 삼킨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도 아낄 이유는 없겠지...?’


한 조각,  조각, 열  개의 파편을 전부 먹자
나뭇가지가 머리 위에서 등허리까지 추욱 늘어지는 게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저게 내가 키우는 나무도 아니고, 당장 내가 쪼렙이라 별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데.


불사르는 폭군은 화신 근처에만 가도 휘말리고, 잊히지 않는 뭐시기의 결계에는 간접적으로 접촉해도 빨려 들어가지 않았던가.
무슨 어항 속 금붕어가 물살에 휘말리듯. 아니, 금붕어 정도 되면 물살에 저항해서 헤엄칠 수 있지 않나.
거의 떠다니는 플랑크톤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니 기분이  좋지 않다.


한 살배기 갓난아기에서 파도에 떠다니는 식물성 플랑크톤까지 자기 평가가 내려갔어...


이런 우울한 마음과 안 좋은 마음은 입에서 사라지지 않는 민트 향기 때문일지도.


그와 동시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마치  밖을 걷다 냉장고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 기억이 이유 없이 떠오르는 것처럼
머리에 몽마의 기억이 조금씩 파고 드는 것이 느껴진다.







백일몽, 날이 밝았는데 꾸는 꿈.

몽마족은 꿈을 다루는 종족인데 고작 해가 떠 있다고 꿈을  건드리겠는가.

“성좌님, 오셨네요.”


오전에 푹 잔 한예지가 어기적어기적 일어나 출근한 사무실은
그 커다란 사건으로부터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고요했다.

오전 조는 연속 근무에 울상이 되어 집으로 향했고
오후 조와 야간 조는 순찰 타이밍이 아닐 때 다들 책상에 엎어져서 졸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건강한 화신이라 해도, 육체 능력에 제약을 받은 상태로
어둠 속에서  시간이나 헤매는 것은 심적 부담감이 크니 어쩔 수 없겠지.

“커피 제가 들게요.”

“야 한예지, 잠꼬대는  정도만 해라.”


툭, 하고 정아린이 한예지의 옆구리를 찌른다.
조는 것까지는 몰라도 잠꼬대는 하지 말라는 걸까.
무슨 소리냐며 한예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다시 앞을 바라본다.


당연히, 거기에는 한예지가 봤던 커피를 든 내 모습이 없다.


“어, 분명 성좌님이 커피 들고 오셨는데...”


“집에서  자고 왔냐? 이대로 가면 출동 없을 것 같은데 쟤처럼 걍 엎어져 자던가.”


“아니, 진짠데요...”


마른세수를  번 한 한예지가 그대로 소파에 드러눕는다.
악몽과 분신을 소환하는 것은 모두에게 보이지만 백일몽은 특정 대상에게만 보이는 환상이구나.
실험 대상이 된 한예지가 오랜만에 잔소리를 듣는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이하린은 오늘도 마법진에 고개 박고 공부 중이고,
김하은은 체육관 관장의 하나 더 지옥에 붙잡혀 비명을 지르고 있으니까.


여덟, 아홉, 아홉, 아홉, 아홉, 하나 더! 는 어느 나라 숫자 세는 방식인지 모르겠네.


마지막까지 잔소리를 듣다 작게 꿍얼거린 한예지가 소파에 기대 얕은 잠에 빠져든다.

‘무슨 꿈을 꾸나 볼까?’


자각몽도 사용하지 않고 무의식 속에서 꿈을 꾸는 것을 보고 슬쩍 접근했다.
프로텍터도 사라졌으니 이제야  할  생겼네.


소파에 드러누운 한예지는 꿈속에서도 출동을 나간다.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이 어지간히 뇌리에 남았는지 꿈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네.
하긴, 평범한 범죄자 제압이 아니라 타락한 성좌랑 만난 일인데.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은 왜 타락한 거고, 뭘 하려 든거지?

진실을 아는 녀석은 이미 내 뱃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고,
조무래기들은 잡혀 들어가서 심문받는 중이니 내가  방법이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예지의 꿈을 구경하고 있는데-


‘이건 또 뭐시여.’


어젯밤의  모습이 꽤 인상 깊었는지 그녀의 꿈속에 내가 등장했다.
평소의 자애로운 모습 말고, 뭔 검은 바이크 슈트를 입은 상태로.

‘이렇게 보니까 기분이 되게 이상한데.’


자각몽도 아니고, 한예지의 무의식이 망상하는 내 모습을 보니 기분이 요상했다.
검은 바이크 슈트를 입은 내가 담배  개비를 입에 물고 멋들어지게 등장해
범죄자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좀 쪽팔리고 부끄럽기도 하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워 깊게 빨아 마신 망상 속의 내가,
바이크 슈트 허리춤의 벨트에서 단검  자루를 들고 종횡무진 범죄자들의 사이를 누빈다.
나는 쌍검충이 아니라는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한예지는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드는 상황.


깨우기엔 조금 미안하니까, 그냥 놔둬야겠다.

결국, 그녀의 망상은 피투성이가  내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스윽 훑어 내리더니,
덥다고 슈트 지퍼를 내리며 가슴골을 드러내는 부분까지 진행되었다.

 180 넘는 건장한 남자가 저러니 내가 보기에는 되게 남성미 넘치는 마초적인 분위기인데
한예지가 보기에는 섹시한 누님 보듯 야한 꿈으로 받아들이고 있네.

고생했는데, 오늘 밤에는 저걸  번 입어줘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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