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63화 : 도전장 4
익숙한 일을 하다 보면, 직감적으로 결과를 미리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손끝에 느껴지는 느려지는 혈관의 박동,
끄르륵하고 폐를 가득 채운 피거품에 막힌 목소리,
팔다리에 힘이 빠지며 축 늘어지는 몸뚱어리와 커허 커허, 하고 마지막으로 힘겹게 내뱉는 호흡.
‘이 새끼, 안 죽었네?’
단말마조차 뱉지 못했으며 최후의 호흡을 내뱉고 심장 박동이 멈춘 상태로,
쓸어내린 눈꺼풀이 감겼지만 죽지는 않았다.
등 뒤에 꽃은 나이프를 뽑았다가 그대로 꽂아 넣는다.
노리는 것은 폐가 아니라 등허리의 척추.
까드득 하고 뼈에 금속이 걸리는 익숙한 저항감이 손바닥에 느껴진다.
뜨득 하고 소름이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나이프가 제대로 박혔지만 여전히 감각은 외치고 있었다.
아직, 안 죽었어.
-이, 빌어먹을 새끼가!
폐에 구멍이 나서 목소리 대신 텔레파시를 사용하는 걸까?
기분 나쁜 괴성이 머리를 울린다.
하긴, 성좌가 지상에 강림했다가 칼 맞고 죽으면 그게 성좌인가, 병신이지.
그 정도로 연약했다면 인류는 성좌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육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품 안의 시체를 밀어냈지만,
검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마력의 안개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한 박자 더 빨랐다.
조금 익숙한 감각과 함께 세상이 빙글 돈다.
“너, 이 빌어먹을 애송아! 동족이라 평화롭게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건만!”
보라 머리의 미남이 멀쩡해진 모습으로 내 앞에서 이를 간다.
무심코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지만 녀석도 나도 가벼운 옷차림일 뿐 무기 따위는 없었다.
근데 몽마족인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못 죽이는 건가?
이건 나한테도 중요한 이야기인데.
“컥, 놔, 놔라 이, 이 미친...!”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길래, 그대로 양손을 뻗어 목을 졸랐다.
기본적인 체력이 후달리면 밧줄이나 버팀목을 이용해 목뼈를 꺾어야 하는데 악력이 강하니 맨손으로도 죽일 수 있구나.
우득 소리와 함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한 놈이 혀를 빼물고 바닥에 널브러진다.
- 이 미친 새끼야!
“와 씨, 이게 사네?”
그러자 목 부러진 시체가 내게 텔레파시를 보낸다.
목뼈가 부러지며 신경이 끊어지기라도 했는지 바닥을 바르작거리던 녀석이 다시 한번 검은 안개를 펼친다.
몽마는 마력을 이용한 기술로만 사냥할 수 있는 걸까?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몽마의 싸움이 고작 그런 육체적인 다툼이라 생각했느냐?”
눈과 눈이 마주하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누군가 뒤에서 목을 붙잡은 것처럼 얼굴이 움직이지 않는다.
어여쁜 여자도 아니고 남자랑 이렇게 눈 마주치는 취미는 없는데.
뜨거운 콧김이 서로에게 닿을 거리가 되어 기분이 나빠졌다.
그대로 양손을 들어 눈동자라도 후벼 팔까 생각했지만 팔도 안 움직이는 것은 마찬가지.
조금씩 다가오는 녀석의 얼굴에 기묘한 부담감을 느꼈다.
남자끼리 얼굴 비비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진짜!
“흐흐, 두려워하거라!”
“아 씨발, 너 게이냐? 면상 안 치워?”
“천박한 소리를!”
어딘가의 귀족 도련님처럼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하며 점점 접근하는 모습이 무섭다.
눈과 눈을 마주 보고 있는 상태로, 팔을 쭉 뻗으면 손목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생명의 위협 말고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몽마족은 꿈속의 존재... 죽이고 싶다면 그 근원을 겨뤄야겠지!”
[성좌, 잊히지 않는 죄악이 몽마족의 근원을 개방합니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의 몽마족의 근원을 강제 개방합니다]
어째서인지 툭 튀어나온 시스템이 눈 앞을 가린다.
그래, 남자끼리 얼굴 맞대고 눈싸움하느니 이게 좋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주변이 또 꾸물꾸물 변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등 뒤로 평야가 펼쳐진다.
낡은 병장기가 부러진 채 이리저리 뒹구는 피로 물든 평야.
누가 봐도 전쟁터구나, 싶은 평야의 끝자락에서 검은 물결이 다가온다.
두 발로 걷는 소나 도마뱀부터, 개나 돼지의 머리를 달고 있는 야만인들.
어디 판타지 RPG에서 볼 법한 몬스터 모둠 세트가 쿵쿵 발걸음을 맞추며 다가온다.
“너, 이 씨발럼아 저거 표절이야!”
등짝에 투석기를 매달고 있는 거인을 보니 그런 욕설이 절로 튀어나온다.
아까부터 격앙된 감정의 영향인가.
다른 종족이야 양판소에 허벌나게 나온다지만
거인 등짝에 투석기를 매달고 거기에 매달린 쬐끄만한 소인족을 보니 전생에 좋아하던 반지 영화가 떠올랐기 때문에.
기억 저편에 있던 최애 영화를 눈 앞의 게이 몽마가 표절했다는 생각이 드니 잠잠하던 분노가 다시 울컥 솟아오른다.
“흐흐, 애송이 녀석. 네놈의 근원이 무엇인지 몰라도 참 보잘것없군!”
“근원이 뭐냐?”
“그것조차 모르는 거냐? 근본조차 없는 녀석이로군. 몽마는 꿈속의 존재, 생명이 잉태하기 위해 정자와 난자가 존재하듯, 몽마족이 잉태되기 위해서는 그 근간이 되는 꿈이 필요하지.”
여유롭게 주절대는 녀석의 뒤로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다가오며 가죽 북 치는 소리와 뿔피리 소리가 귀를 어지럽힌다.
저 판타지 군대가 녀석의 세상을 멸망시킨 악몽인 걸까? 많기는 정말 많네.
“왕국의 기사단도 엘프의 군대도 드워프의 골렘도 사그라트리는 몬스터의 군단! 이게 내 악몽이다 이 하찮은 녀석아!”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이제야 자유로워진 고개를 쭉 돌려도 시야의 끝에서 끝까지 가득한 괴물들의 군대.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군대가 계속해서 다가온다.
확실히, 중세 배경의 판타지 세상은 멸망시킬 수 있을 숫자다.
“네 녀석의 하찮은 악몽과는 비교도 되지 않지. 하! 그 알량한 쇳덩이로 뭘 할 수 있지?”
쇳덩이?
그 말을 듣고 나는 목뼈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개를 뒤로 돌렸다.
녀석의 등 뒤에 군대가 등장했던 것처럼, 나의 등 뒤에도 나의 악몽이 등장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의 머릿속에는 수 십 가지의 생각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일단, 눈앞의 이 새끼는 현대사회랑 동떨어진 놈이다.
어디 판타지 왕국 출신이고 인간의 과학을 잘 모르나 보다.
이쪽 대륙에는 이게 없나? 싶기도 하고 쟤는 그... 없나? 싶기도 하면서 불사르는 폭군을 모르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리고, 저거 나한테 영향은 없겠지?
내 꿈이 나를 해칠 리 없을 거다.
제발, 내 꿈에 내가 죽기는 싫은데-
쿵쿵거리는 위압감 넘치는 발걸음 사이로, 쉬에에에엑- 하고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난다.
은회색의 날씬한 몸체를 가진 비행기.
그걸 요격하기 위해서인지 놈들의 군대에서 와이번인지 드래곤인지 모를 놈이 저 하늘 높이 날아올라 불길을 뿜어낸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행기의 소리는 계속된다.
갑자기 내 악몽이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 정도.
‘씨발, 진짜 나는 상관없겠지?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힘내라 와이번, 격추라도 시켜봐!’
“하하하, 나의 용기병이 두려운가?!”
눈을 질끈 감으니 의기양양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더욱 끔찍한 것은, 눈을 감으니 청각이 더 예민해진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다.
쿵쿵거리는 발소리, 둥둥 울리는 북소리,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르는 드래곤의 흉포한 울부짖음과
각양각색의 괴성들 사이로 선명하게 들리는 바람 가르는 소리.
쉐에에엑-하고 빠르게 바람 가르는 소리도 들리고 후우우웅 하고 묵직하게 날아오르는 비행기 엔진소리도 들린다.
모든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히니 대체 내 등 뒤에 몇 대가 존재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긴장감 때문에, 속이 울렁거린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눈을 꾹 감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음에도 눈부신 섬광이 파고들어 시야를 밝혔다는 것이다.
다행이다, 안 뜨겁네.
※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동네 지하철이 너무 깊어서 핵 방공호로도 쓰이는 지하철이라는 이유 딱 하나였다.
지하철 내부 편의점 알바를 하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그 뒤로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말하기가 힘들었다.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 내리지, 사람들이 위아래로 흩어져서 도망치지,
기다란 에스컬레이터에는 갑자기 불이 나서 올라갈 방법이 없어졌지.
아마 불이 안나서 올라갔으면 나도 죽었겠지만.
아무튼, 우리 세계는 그렇게 이유도 모르고 멸망했다.
북한이 미쳐서 선제공격했는지, 누가 레이더 오작동을 보고 보복 핵을 발사했는지.
어디 인터넷에서 보니까 보복성 핵미사일 공격 프로그램도 존재해서
버튼 하나 누르면 사람 다 뒤져도 계속 미사일을 쏜다던데 그게 아닐까.
아무튼, 진실을 알 만한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퇴근 중인 직장인, 술 마시러 왔던 대학생, 횡단보도 신호 기다리기 귀찮아서 지하철로 건너가려던 학생들.
뭐 그런 사람들이 보복성 핵전쟁에 대해 뭘 알겠는가.
그 뒤로는 뭐, 메트로 뭐시기마냥 내가 했던 게임처럼 현실이 바뀌었지.
지하철 내부에 있는 화재용 방독면을 쓰고, 거적때기 같은 거 둘둘 말고 밖으로 나가 생필품을 챙겨오는 사람들.
무너진 지하 선로를 파헤치는 사람들과 손재주를 살려 잡동사니로 가구나 도구를 만드는 사람들까지.
지하철역은 하나의 마을이 되었고, 지하철 레일은 다 뜯어서 재활용되었다.
방사능에 오염된 괴물 새끼들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인류를 재건 할 수 있을 정도의 희망이 존재하긴 했는데.
내가 마지막 생존자라는 소리는 결국 나 빼고 다 뒤졌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환기 시스템이 좆 된 건지, 서울역에 있던 놈한테 위치를 들켰는지
외국은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한국이 마지막인지 모르고 아무튼 다 뒤졌다니 참.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근원 일부를 깨우칩니다]
[성좌, 잊히지 않는 죄악의 근원이 파괴됩니다]
[악몽의 편린을 획득합니다 : 14EA]
왜, 남의 악몽을 함부로 끄집어내고 지랄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