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62화 : 도전장 3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우리는 점점 세력을 불려 나갔다.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는 제압팀과 문을 열기는커녕 길도 못 찾는 밀매범의 싸움은 너무 뻔한 양상이니까.
벽에 붙어서 이동하며 문이란 문을 전부 열어버리면 세 명씩 툭툭 튀어나와 합류하는 제압 대원들.
“너, 정아린 맞냐?”
“너 술자리에서 전 남친한테 전화 걸면서 울었던 썰이라도 풀어 줘?”
“씹, 꼭 그런 이야기로 증명해야 해?”
그 와중에 대원들 대부분이 우리를 환상, 혹은 타락한 성좌가 만들어낸 적대적 분신 같은 거로 생각해서
시간이 지체되었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지.
이런 상황에서 의심 없이 덥석 믿어버리면 오히려 우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지도.
화신의 권능과 재능도 사라지고 단련된 육체도 연약해졌지만, 머릿수는 무시할 수 없다.
몇몇 화신들은 허리춤에 손전등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부분 테이저건이나 고무 산탄총으로 무장한 상태였으니
쇠파이프나 주워서 라이터 들고 다니는 밀매범들이 감히 저항할 수 있겠는가.
용감하게 녹슨 쇠파이프나 짧은 단검 하나 꼬나 쥐고 달려들다가
조명 너머에서 총구를 겨눈 수 십 명을 보면 조용히 바닥에 무릎을 꿇는 녀석들이 대부분.
나이프 두 개정도 빼앗아 챙겼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서 범죄자들을 끌고 다닐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것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 꿈을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글쎄, 그 상대 성좌도 여기 안에 있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우글우글, 손전등으로 골목을 비추며 걷는다.
자연스럽게 여자들이 둥글게 밖을 둘러싸고 그 안에 한예지의 팀이 나를 에스코트하는 방식으로.
내가 밀매 조직원들을 몇 명 처치했든 말든 일단 남자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어디 전쟁을 치르러 가는 깡패 조직처럼 우르르 몰려가다 눈 마주치는 밀매범들에게 뭇매를 놓고
기절할 때까지 두들겨 팬 다음 벽의 금속 파이프에 수갑을 채우기를 거의 한 시간.
수갑이 다 떨어져서 옷을 벗기고 그걸로 팔다리를 묶어두기까지 하는 상황이다.
‘씨발, 상대방도 우리를 못 찾나, 아님 도망 다니나?’
교착상태가 계속해서 지속하고 있었다.
이 악몽을 매개체 삼은 결계는 나와 다른 성좌의 마력이 3:7 정도로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냥 미숙해서 타인의 꿈속에 있는 다른 몽마를 탐색하지 못하는 상태.
그러다 보니 걷고 걸어도 잔챙이만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었다.
‘내 마력이 섞여서 내가 어디 있는지 탐색을 못 하거나, 일이 꼬여서 우리를 피해 다니거나. 어느 쪽이든 간에 내가 해결할 방법이 없는데?’
이쪽은 상대를 찾아낼 방법이 없다. 이거 하나로 일이 너무 귀찮아졌다.
저쪽이 지금 밀매범을 모아 머릿수를 불리는지, 아니면 존나 도망치는 중인지 알지도 못하고
십자 모양이 무한 반복되는 복도를 계속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슬슬, 우리 애들은 다 모인 것 같은데?”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계속 튀어나와...”
머릿수가 충분히 불어난 제압팀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손전등을 끄면 암적응을 해도 가시거리 3m도 안 될 어둠 속에서 한 시간 내내 걷는 일이 유쾌할 리 있나.
사람이 많아졌다고 복도가 넓어질 리 없으니 슬슬 같이 이동하는 것조차 귀찮다.
‘뭐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소설이나 만화에서 본 것처럼, 마력의 실을 아지랑이처럼 내뿜어
사방팔방으로 흘려보내는 식으로 탐색을 시도해 봤지만 내 마력에 반응하는 것은 한예지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탐색이 아니라 그냥 마력적 접촉이었는지 마력이 닿은 부분을 벅벅 긁을 뿐이고.
그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으니 어디선가 연녹색의 불빛이 다가온다.
마치 반딧불처럼 나폴나폴 날아서.
경계하는 제압 팀원들 사이로 날아온 녹색 불빛이 나와 정아린 사이로 파고든다.
그 모습에 가장 앞에 있던 화신 하나가 정아린과 동시에 입을 연다.
그와 동시에 연녹색 불빛이 그녀의 팔목으로 스며들었다.
“어, 이건,”
“아, 됐다.”
그러자 그녀의 나무 팔찌가 녹색으로 밝게 빛났다.
“이쪽으로. 잠시만요, 제가 앞장설게요.”
“뭐야, 권능이 발현되는 거야?”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전등 몇 개에 의존하던 수십 명의 사람인지라
누가 봐도 권능이다 싶은 연녹색 불빛을 불평 없이 따라가기 시작했다.
맨 앞에 정아린, 그 뒤에 나와 한예지 남궁희가 서고 나머지 사람들이 우르르 따라 오는 모양새로.
연녹색 반딧불이 몇 마리 더 우리에게 다가오니 주변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진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손전등을 전부 꺼도 앞이 보일 정도.
환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불빛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불빛의 끝에, 금발의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시들지 않는 거목?”
“어서, 와. 무기력, 한 악몽 맞, 지?”
화신들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아니구나, 통성명을 안 했네.
아무튼, 성좌의 이름으로 인사를 하니 피부에 닭살이 오슬오슬 돋아나는 것이 느껴진다.
이곳에서 나가면 무조건 이름을 알아내야겠다.
화면 속에서 시스템 문구가 [무기력한 악몽]이라고 부르는 것은 게임 채팅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 가슴께에나 오는 작은 소녀가 ‘무기력한 악몽’이라며 나를부르는 것은 조금 그렇게 느껴지니까.
까놓고 말해서, 창피하다.
차라리 게임 정모처럼 닉네임 줄여 말하듯 부르면 좀 괜찮으려나?
“이건, 세상에...”
“와, 이렇게 많이 남아 있었다고?”
“어, 이 새끼 간붑니다. 어제 작전 브리핑 할 때 봤던 얼굴인데.”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듯 귓가를 때린 시들지 않는 거목의 정신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안
시들지 않는 거목은 자신이 성좌임을 깔끔하게 증명해냈다.
이런 어둑어둑한 공간에서 사람 허리통만 한 나무뿌리를 다루는 게 성좌 아니면 뭐겠어.
녹슨 문짝을 부수고, 낡은 콘크리트 틈바구니를 비집고 거대하게 성장한 나무의 뿌리.
나와 한예지가 몽마의 마력을 손에 담아 문을 열었다면 시들지 않는 거목은 그냥 부숴버리고 나왔나 보다.
“여기, 권능의 제약이 엄청 심하네. 그래서 시간이 좀 오래 걸렸어.”
새하얀 튜닉을 입은 예쁘장한 소녀가 개구쟁이 소년의 미소를 짓는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자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그녀가 작은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래도, 네 덕분에 움직이는 데 무리가 없네. 아마 그때 먹었던 악몽의 편린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저 세계수가 내 악몽의 편린을 하나 훔쳐먹었지.
다른 사람들은 다 권능이고 뭐고 봉인되었는데 왜 저 나무만 멀쩡하게 꿈틀거리나 했다.
하긴, 성좌의 공간 옆 벽도 뚫고 자라는 놈인데 악몽 속에 뿌리를 못 내릴 이유가 있겠는가.
“다른 능력은 나도 사용할 수 없는데, 어째서인지 세계수의 뿌리가 이곳까지 닿긴 닿았네.”
나무뿌리 밑에 깔린 수 십 명의 밀매범들.
우리가 제압한 녀석들까지 합치면 백 명이 훌쩍 넘겠네.
20층 남짓이었나, 빌딩이 꽤 높은 편이었으니 안에 가득 차 있었다고 생각하면 적당한 숫자다.
아직 밖에서 헤매고 있을 년들도 많을 거고.
그보다, 노래하듯 말하던 엘프식 언어는 어디 가고 저리 유창하게 말하는 걸까.
설마 사투리 하는 사람이 일부러 표준어 쓰듯이 말투를 숨긴 건가?
그런 궁금증을 숨기고 물어보았다. 나보다 성좌 짬도 길고 능력도 대단하니 좀 얹혀가도 되겠지.
나이프 한 자루만 주면 전부 전멸시킬 자신은 있지만, 어느 세월에 이 미궁 같은 지하 통로를 다 뒤진단 말인가.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걱정하지 마, 곧 나무가 뿌리를 내릴 거야.”
성좌와 성좌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한예지도 정아린도 제압 부대원들도 전부 눈치껏 자리를 피해줬다.
탁 트인 시야 사이로 끄드득 꾸드득 소리를 내며 나무뿌리가 바닥을 파고드는 것이 보인다.
마치 나무줄기로 만든 굴착기처럼, 뱀이 땅굴 파듯 바닥을 뚫고 사라지는 두꺼운 뿌리.
“아, 찾았다.”
씨익 하고, 개구쟁이의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생긴 것만 보면 머리에 화관을 쓰고꽃밭에서 노래를 불러야 할 것 같은 가냘프고 귀여운 소녀인데
입꼬리에 맺어진 미소는 죽은 개구리를 들고 돌진하는 골목대장의 미소였으니까.
그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뭐가 된 건지 묻지도 않고 있으니 갑자기 그녀가 크게 소리친다.
“나무뿌리를 잡으렴, 아이들아!”
-안, 돼에에에에에!
저 멀리서 귀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남성의 고함이 들림과 동시에 세상이 덜덜 떨린다.
그러니까, 자각몽에 들어가는 것처럼 시야가 빙글 도는 게 아니다.
정말 이 복도가 지진이 난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다.
천장이 뜯겨 사라진다.
낡은 벽이 무너지고 금속 파이프가 찢기고 날아간다.
바닥에는 금이 가서 사람들이 나무뿌리 위에 올라선다.
꿈속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이 물리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한다.
부서진 틈바구니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뭉글뭉글 몰려 들어오지만
나무뿌리 근처로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아니구나, 오히려 나무뿌리가 달려들어 그 어둠을 흡수하고 있었다.
-넌, 넌 누구냐!
정신을 차리니 어두운 복도 대신 고요한 텃밭이 우리를 반긴다.
시들지 않는 거목의 기억 속에서 봤던 그 인기척 없는 텃밭이.
아마 저 뒤로 쭉 가면 그녀가 손수 묻은 동료들의 시체가 있으리라.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콘크리트 파편이 비처럼 쏟아지고, 땅은 지진이 난 것처럼 출렁거리며 거대한 나무가 뱀처럼 꿀렁거린다.
그 너머, 텃밭 끝자락에 이국적인 외모의 남자 하나가 고함을 지르며 시들지 않는 거목에게 삿대질하고 있었다.
“어떻게, 엘프족이 나의 악몽을 집어삼키냔 말이다!"
"나는, 시들지 않는 거목. 우리 아이들을 집어 삼켜서 뭘 하려 든거야?"
보라색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쭉 뻗은 기럭지가 모델 닮은 미남.
잔 근육만 있어 보이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남성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제압 부대의 화신들이 긴장하여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난, 무기력한 악몽이야.”
그 모습에, 나도 자기소개해야 할 것 같아 찌른 나이프를 빙글 돌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남자의 귀에 소곤거리는 취미는 없지만 누구한테 죽었는지는 알려주고 싶어서.
손 끝에 느껴지는 익숙한 감촉.
몽마의 육체는 인간과 별 다를게 없나.
병신도 아니고, 난리가 난 와중에 주의도 안 기울이고 성큼성큼 걸어오면 뒤를 잡히잖아.
뱀처럼 뻗어나가는 나무 줄기에 몸을 숨기고 접근하자 눈치도 못 채네.
제대로 찔렀는지 뼈에 걸리지도 않고 부드럽게 파고드는 감촉을 느끼며 작게 속삭였다.
“딱히, 네 이름이 궁금하지는 않네.”
“...?”
끄륵, 하고 유언 대신 피거품을 뱉은 남자의 눈을 뒤에서 손바닥으로 스윽 쓸어내린다.
눈 뜨고 죽은 시체는 보기 싫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