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61화 : 도전장 2
팔다리에 묘하게 힘이 없다.
온몸을 휘감은 무기력한 기운에 활력이 빠져나간 느낌.
이 나른하고 허약해진 기운에 지하실의 퀴퀴한 공기까지 더해지니 과거와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진다.
몸 상태를 점검하며 발소리를 죽이고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걷는다.
저 멀리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탁탁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을 헤치기 위해
손바닥과 발바닥으로 탁탁 돌벽을 두드리며 조금씩 이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적어도, 제압 부대의 제복은 아니었다.
“젠장, 뭐 이리 어두워? 원래 이런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아무튼, 합류가 우선이야. 꿈이 이 모양이라도 작전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몸에 익은 행동을 하기 위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조명 하나 없이 어두운 골목, 무방비하게 떠드는 놈들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금속 조각, 강하게 틀어막은 입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숨결
서걱서걱 목덜미를 후벼 파이다 바둥거리다 축 늘어지는 육체.
익숙하기 짝이 없는 일련의 작업.
“...한승윤? 야, 어디 갔어?”
날 벼리지 않은 금속 조각이라 피가 조금 많이 튀었지만
다행히 피 냄새에 몰려드는 크리쳐는 없는 것 같았다.
겁에 질린 고함이 아직 따듯한 시체 누이는 소리를 묻어버린다.
“장난치지 말고 나와, 재미없어 새꺄!”
이런 상황에서 왜 고함을 지를까.
이럴 때 목소리를 내서 좋을 게 뭐 있다고.
등 뒤에서 기습할 때 끼야압! 하고 고함을 지르는 놈이나
혼자 고립된 상황에서 크게 외치는 놈이나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전에 다 죽었으니까.
길게 이어지는 골목에는 두세 명씩 산발적으로 사람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나같이 당황해서 어둠 속에서 고함을 지르고 바둥거리고 쿵쿵 소음을 내는 상태.
그야 사전에 들었던 것과 이야기가 다르니 당황할 수밖에 없지.
지금 이 꿈의 절반 정도는 나의 악몽이 반쯤 뒤섞인 상태.
상대 화신도 몽마였는지, 범위 내 꿈을 쭈욱 빨아들여 거대한 환상 결계를 만들어낸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아까 봤던 한예지처럼 가슴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화가 난다.
다른 몽마 때문일까? 한예지도 나도 감정이 기묘할 정도로 고양된 상태.
무슨 결계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이 악몽의 30% 정도는 나의 꿈이 뒤섞여 있다.
원래대로라면자신들이 만든 꿈속에 제압 대원들을 전부 흩어지게 한 뒤,
육체 능력을 같게 제한해서 머릿수로 제압하려 한 것 같은데.
나의 꿈이 뒤섞여서 자신들까지 전부 흩어진 상황.
어처구니도 없고, 짜증도 나고,
아무리 1년 차 몽마라지만 이 정도인가 싶어 자괴감까지 들 지경.
나를 노린 권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수영 모르는 어린이가 수영장 물살에 휩쓸려가듯
무기력하게 덤으로 휩쓸린 상황이니 어처구니가 없다.
몽마에게 있어 자신의 꿈이란 일종의 영토이자, 자신의 영역이다.
부글부글 끓는 분노는 인간인 내가 아니라 몽마인 나의 분노.
자고 일어났더니 도둑이 우리 집에 들어와 안방 가구를 싹 쓸어간 기분이 든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그리고 그 훔쳐간 가구가 우리 집 앞에 재활용되어 전시된 걸 본 기분이 더해진다.
공개적으로 도둑 새끼한테 능욕당했다는 분노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든다.
그러니까, 죽여버린다.
‘권능 없이 개싸움으로 가면 나야 좋지.’
제압대의 엘리트들은 대부분 화신으로서의 능력을 극한으로 갈고닦은 사람들.
아마 밀거래가 주목적이 아니라, 이 도시의 제압 부대를 엿 먹이고 싶어서 파 둔 함정 같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타락한 성좌의 대응책이 확실히 마련되어 있는 걸 보면 몇 번이고 마찰이 있었다는 뜻이니까.
스으, 마른 숨이 입술을 간질이며 나온다.
삼 일 내내 입에 댄 것이라고는 통조림 하나밖에 없던 시절보다 강인한 육체,
날카로운 쇠붙이로 사람의 목덜미와 혈관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손아귀,
발소리를 내지 않고 성큼성큼 걸을 수 있는 강인한 다리,
비명조차 어둠 속에 묻어버릴 수 있는 커다란 손과 악력.
육체 능력의 제한선을 두었다 하더라도
그 시절의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인한 육체다.
‘얘들도 딱히 들고 있는 장비가 없네.’
시체를 뒤져보지만 품 안에 딱히 도움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이 녀석들도 어디선가 주워온 각목이나 쇠파이프 따위만 들고 있으니까.
나처럼 복도에서 주워든 잡동사니가 전부.
몽마의 권능 속에서 제압할 예정이었으니 아마 장비도 꿈속에서 챙길 생각이었겠지.
나 하나 때문에 작전이 전부 망해버렸구나.
하긴, 누가 1년도 되지 않은 초짜 몽마의 정신체가 프로텍터 속에 숨어 있을 거라 상상하며 작전을 계획하겠는가.
어둠 속에서 차게 식어가는 시체를 손끝의 감촉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흐릿한 불빛이 보인다.
조명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불빛이 얼마나 멀리까지 퍼지는지 모르는 멍청이들.
그런 멍청이들에게 날이 손바닥 길이 정도 되는 단검을 얻어낸 이후부터는 계속 똑같은 패턴이었다.
금속 조각으로는 목을 그어야 하지만 잘 벼려진 단검으로는 등 뒤에서 폐에 구멍을 내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폐에구멍이 난 녀석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지.
라이터나 스마트폰의 불빛에 의존해 더듬더듬 돌아다니는 무방비한 녀석들이 소리 없는 비명 속에서 죽어 나갈 때,
갑자기 복도에 끼이이익 하는 큰 소리가 들린다.
사람 떠드는 소리는 들렸어도 문 열리는 소리는 처음인데.
“- 그럼 우리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냐?”
“뺨 때려도 안 깨는데...”
“그 새 때려봤어? 설마 화신이나 성좌가 쓴 권능이 고작 뺨 한번 때렸다고 파훼 되겠니?”
문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 목소리를 줄이려는 시도조차 없다.
그 모습에 대충 이 꿈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복도에 있던 무수히 많은 낡은 문들, 그 안에 제압 부대의 팀원들이 고립된 상태로 있는 건가.
한예지는 나와 계약한데다, 방금 권능을 각성했으니 문 하나 정도는 열 수 있을 것이고.
원래대로라면 고립된 세 명을 수십 명의 범죄자가 집단 린치를 하며 조금씩 수를 줄이려 들었겠지만,
범죄자들도 뿔뿔이 흩어진 상황에 내 악몽이 섞여 몽마족의 마력을 다루지 못하면 저 문을 열 수 없게 된 것이다.
“...시체, 있는데.”
“우리 쪽 애들은 아닌 거 같습니다. 아마 밀거래 조직 화신 같은데, 왜 죽었지?”
눈에 암적응이 덜 되었는지, 아니면 밤눈이 어두운지 벽을 더듬으며 내 쪽으로 다가오던 세 명이 시체를 발견한다.
저 낡은 철문이 안 열릴 줄 알고 근처에 기대놨더니 귀찮게 되었네.
목덜미가 너덜너덜해진 시체를 발견한 세 사람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몸에 힘이 들어가며 근육이 바짝 긴장하는 게 보인다.
너무 겁먹은 모습처럼 보여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낸다.
“뭔가 온다, 준비해.”
한 가지 잘못 생각한 점이라면, 우리 세상에서 발소리를 내며 접근하는 것은
나는 나쁜 의도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이쪽 세상에서는 그런 암묵적인 규칙을 알 리 없다는 것.
웅크리며 허벅지에 힘을 주는 남궁희를 보고 급히 입을 열었다.
“너희도 여기에 있구나?”
“자, 잠깐!”
마치 달리기 선수가 부정 출발을 하듯
내 목소리를 일종의 신호처럼 받아들인 남궁희가 내 쪽으로 와락 달려든다.
하지만 그 이상적인 바디 태클에 걸맞은 파워는 없었다.
역시, 제압팀 애들도 육체가 약해졌군. 하향 평균화라 봐야하나?
나이프는 진작 오는 길 금속 파이프 위에 올려놨으니 맨손으로 달려드는 남궁희를 맞이한다.
허리춤을 붙잡으려는 손아귀를 탁 쳐내고, 목덜미를 눌러 옆으로 흘려낸다
. 벽에 쿵! 소리가 나게 이마를 박는 모습에 아차 싶었다.
감정이 고양된 만큼 성격이 좀 난폭해진 것 같은데.
“서, 성좌님?”
“그래, 네 성좌님이란다.”
당황하는 얼굴이 묘하게 귀엽다.
이마를 박은 남궁희가 제 얼굴을 마른세수하듯 쓸어내리며 일어나고
한예지가 긴장을 풀고 내게 다가오는 걸 정아린이 막아선다.
“성좌님이시란 걸,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네, 꽤 똑똑하구나.”
자신이 왜 제압당했는지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이는 남궁희와
왜 자기를 붙잡는지 모르겠다는 한예지에 비하면 정아린은 아주 훌륭한 모습을 보였다.
이상한 공간에 끌려왔는데, 눈앞에 나타난 인물이 진짜인지 아닌지는 확인을 해야지.
나야 한예지가 권능을 각성하고 나서 느껴지는 오오라를 보고 알 수 있다지만
그녀들은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네, 그럼 예지를 통해 증명해야 하지 않겠니?”
“예, 증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으음, 우리 예지가 왜 저렇게 저기압이냐면, 출동 직전에 꿈에서-”
“성좌니임?! 성좌님 맞으시, 녝!”
퍼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정아린의 깔끔한 팔꿈치 후리기가 다급히 앞으로 나서려는 한예지의 복부를 깔끔하게 후려쳤으니까.
좀만 더 강하게 때렸으면 갈비뼈에 금이 갔겠구나- 싶은 클린 히트.
“일단, 목소리부터 죽여 이 멍청아. 그리고 성좌님... 혹시 이 시체들.”
“맞아, 내가 처리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이프 챙겨 올 걸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