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60화 : 도전장
철컥 하고 당겨지는 샷건의 펌프와 바닥에서 움찔거리며 제 토사물에 얼굴을 박은 화신
겁에 질려 유리문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을 제압해도 한예지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는 게 느껴진다.
‘화가 난 수준이 아닌데?’
권능, 드루이드의 세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한예지를 마주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감정이 흘러들어오는 게 느껴진다.
몽마의 분신이 아닌 엘프의 권능을 통해 한 번 걸러졌음에도 이렇게 강렬하다니 무슨 일인지 이해할 수 없다.
까놓고 말해서, 새벽에 잠에서 깨는 게 한두 번은 아니지 않나.
술 처먹은 아지매 하나가 고성방가를 해서 깬 적도 있고, 알람을 잘못 맞춰서 깬 적도 있다.
어느 한 번은 침대 끝자락에서 불편하게 자다 굴러떨어져서 깬 적도 있고.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밤에 잠에서 깬 적이 몇 번 있는 게 당연하지.
그러니까 지금처럼 과도하게 분노하는 게 이상하다는 소리였다.
이상할 정도로 너무 감정적이야.
뒤로 물러나는 사람 중에는 무고한 시민들 말고 진짜 범죄 조직의 화신들이 있는지,
몇몇은 인파를 방패 삼아서 슬쩍 도망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뭘 하려 해도 유리문에서 조금 벗어나는 순간
등짝을 두드리는 고무 탄환의 세례에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거나, 골목을 막은 다른 제압팀에게 붙잡힌다.
세 걸음,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한예지는 빌딩 정문에서 세 걸음만 옆으로 벗어나도 그대로 고무탄을 발포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조금 이상한 점을 느꼈다.
‘지금, 몇 발을 쏜 거지?’
진압용 고무탄 발사기라 해도, 총기인 만큼 당연히 장전해야 한다.
하지만 한예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허리춤의 탄띠에 손이 내려가지 않는다.
다만 샷건의 펌프 부분을 앞뒤로 철컥철컥 당길 때마다 고무탄이 퓽퓽 날아가는 상황.
- 이거, 어떻게 해제해?
- 나무에서 떨어지면 해제될 거야. 다시 나무를 붙잡으면 내가 연결 해 줄게
분신을 해제하듯, 나는 눈을 감고 시야를 흩트리는 감각을 일깨웠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난리가 난 도심 한가운데가 아닌 고요한 나의 원룸.
침대에서 후다닥 일어나 컴퓨터를 향해 달려갔다.
성좌치고는 모양 빠지지만, 어쩌겠는가.
모니터에는 짧은 시스템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화신 한예지가 첫 번째 권능을 깨우칩니다]
[권능 개화 : 트리거 해피]
그 문장을 보고 곧바로 상점에서 검색했다.
권능 중 하위권에 속하는 녀석으로, 이름값을 하는지 원거리 사격 중 총화기를 다루는 화신들의 권능이다.
가장 기초적인 권능으로 평가받지만 가장 사랑받는 권능.
탄약이 없어도 방아쇠를 당길 수 있게 해 주는, 정확히 말하자면 일단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만들어지는 권능이다.
화면 속, 꿀렁꿀렁 움직이는 찰흙 인간 중 딱 하나만 손끝에 보라색 오오라가 맺힌 것이 보인다.
저게 권능을 발현하고 있는 한예지겠구나. 몽마의 권속답게, 꿈속의 총알을 현실로 가져오는 방식 같은데.
재능은 한자인데 권능은 영어인건가? 양산형 싸구려 RPG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긴, 평범 평범 말하더라도 한예지 또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영혼.
1년이나 화신과 성좌가 몸 비비며 자각몽 수련에 힘을 썼는데 권능 하나 정도는 깨우칠 수 있겠지.
이야기의 클리셰처럼 분노를 연료 삼아 새로운 권능을 깨우친 건가.
그 분노의 근원이, 깨져버린 야스각이라는 점은 좀 그렇지만...
20살 피 끓는 청춘에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구경을 하고 있으니, 갑작스레 세상이 빙글 돈다.
어째서 드루이드의 세상을 발동 중인데 자각몽에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
살충제 맞은 벌레 소굴처럼, 사람들이 우글우글 뛰쳐나온다.
‘존나 많네, 진짜...’
반복적으로 펌프와 방아쇠를 당기지만 큰 빌딩 하나에 몇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있었겠는가.
내부에서도 난리가 났지만, 밖으로 튀어나오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만큼 도주를 시도하는 사람도 많았고.
‘왜 하필, 오늘.’
무의식적으로 샷건 방아쇠를 당기며 그렇게 작은 푸념을 입안으로 삼켰다.
늘 다정하고 포용력 넘치는 성좌님 앞에 서면, 꼭 숙맥처럼 어버버- 하고 멍하니 있게 된단 말이지.
그렇게 긴장하다 보면 머리와 몸이 따로 놀고, 그러면 자애로운 웃음과 함께 나를 이끌어주시고.
그게 문제였다.
1년이나 지났으니 조금은 익숙해져야 하는데, 그 아름다운 육체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다.
성좌와 화신을 떠나 여자로서 좀 자신 있고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원.
그리고 그 다른 모습의 첫걸음이 오늘 밤이었다.
성좌님도 그걸 바라시는지 평소처럼 이끌어주는 손길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자애롭게 지켜봐 주시지 않았던가.
이 새끼들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성좌님과-
“물러서지 않으면 발포하겠습니다.”
“아, 아니, 내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우물쭈물 눈도 못 마주치는 아저씨 하나.
하지만 지금은 매우 중요한 작전 중이라 그런 모습에 동정심을 가지고 길을 비켜줄 수 없다.
얼마나 중요한 작전이냐면, 성좌님과의 시간까지 포기하고 튀어나와야 하는 작전이니까.
“그, 아니, 아닙니다.”
총구를 슬쩍 들어 올려 겨누니 대표로 등 떠밀려 나왔던 아저씨가
후다닥 유리문 안으로 들어가 일행들에게 설명하는 게 보인다.
하긴 저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 밀거래 조직 잘못이지.
그 뒤의 작전은 반복적인 작업이었다.
건물 내부에서는 일이 잘 풀리는지 증원 요청 따위는 없었고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녀석들은 수 십 배로 불어난 산탄총의 저지력에 만신창이가 되었으니까.
“와, 투사체의 수를 늘리는 건가요?”
“정확히는 속도에 비례해서 늘어나는 건데, 탄속 관련 재능이 있으신가봐요?”
“아, 예. 물리력 없이 탄속만 두 배가 되는 재능이 하나.”
테이저 건의 바늘을 분열시키던 여자와 어색한 담소를 나누며 펑펑 마음껏 샷건을 발사한다.
왼손으로 펌프를 당기고, 오른손 검지를 딸깍.
펌프와 방아쇠를 철컥 딸각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니 머리한 구석이 간질간질하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 나 장전을 안 했는데?’
[화신 한예지가 첫 번째 권능을 깨우칩니다]
[권능 개화 : 트리거 해피]
시야 한구석에 권능을 개화했다는 메시지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온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선배의 고함.
“야, 한예지!”
목덜미를 잡아당기는 감각과 함께 세상이 빙글 돌았다.
문득 성좌님이 떠올랐지만, 등 뒤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는 정아린 선배와 남궁희를 보니 자각몽 속은 아닌 것 같고.
“무슨, 뭔 상황입니까?”
“모르겠다, 빌딩 옥상을 중심으로 우리 애들 대부분 삼켜진 것 같은데. 이 정도 범위면 성좌 화신체라도 건물 안에 있던 건가?”
꽤 높은 빌딩과 번화가 길거리는 온데간데없고, 어두침침한 지하실이 우리를 반긴다.
낡은 콘크리트 벽, 깜빡거리는 조명, 벽에 붙은 채 쉭쉭 기분 나쁜 소리를 내는 녹슨 금속 배관들.
시뻘겋게 녹슨 문 앞에서 남궁희가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쥔다.
팽팽하게 쥐어지는 글러브, 끼이이익-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그리고 똑같은 방.
“여긴... 맞네, 성좌의 권능 속 같은데.”
남궁희가 문을 열면, 나와 선배가 샷건과 테이저건을 겨누며 경계한다.
하지만 똑같이 생긴 방이 계속되며 무언가 변화가 생기려 들지는 않는다.
깜빡거리는 전등부터 벽에 붙은 배관까지 전부 똑같은 방.
“아 씨, 걸려도 하필 이런 종류... 환각 계열인가?”
걷고 걷고 걷다 보면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 환각 계열이 아니라 몽환 계열 같은데요.”
“뭐야, 느껴져?”
여기도 꿈속이라는 것이.
문을 열려던 남궁희를 뒤로 보내고, 낡은 문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차갑고 쇠 비린내 나는 문짝에 손바닥을 올리니 두근거리는 약동 같은 것이 느껴진다.
꿈속에서 가구나 음식을 소환했던 기억을 되살리며 그대로 힘껏 민다.
‘저쪽 성좌도 몽마족인가?’
녹슨 문이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열리다 이내 소리가 뚝 끊어진다.
“그러네, 그럼 우리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냐?”
“뺨 때려도 안 깨는데...”
“그 새 때려봤어? 설마 화신이나 성좌가 쓴 권능이 고작 뺨 한번 때렸다고 파훼 되겠니?”
나타나는 것은 어두컴컴한 복도.
깜빡거리는 조명조차 없어 몇 m 앞도 바라보기 힘들다.
이대로 방 안에 있을 수도 없어 천천히 벽을 짚으며 앞으로 나아가다-
“...시체, 있는데.”
“우리 쪽 애들은 아닌 거 같습니다. 아마 밀거래 조직 화신 같은데, 왜 죽었지?”
벽에 기댄 시체를 발견했다.
어두컴컴한 공간, 간헐적으로 골목 구석에 숨겨져 있는 시체들.
심장이 조금 더 빨리 뛰는 게 느껴져 총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다른 두 사람도 긴장했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긴장으로 증폭된 감각에, 가벼운 발소리가 들린다.
타박, 타박 하고-
“뭔가 온다, 준비해.”
총을 겨누자 자세를 낮춘 남궁희가 짐승처럼 뛰쳐나갈 준비를 한다.
어둠 속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
그 무방비한 모습에 강하게 바닥을 박찬 남궁희가 허리춤을 향해 바디 태클을 날린다.
“너희도 여기에 있구나?”
“자, 잠깐!”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깔끔한 바디 태클, 목덜미를 꾹 눌러 흘려버리는 가벼운 몸동작.
그 남궁희가 한 손으로 제압당해 벽에 머리부터 박은 것도 놀랍지만, 그걸 제압한 사람이 더욱 놀라웠다.
목소리를 듣고 아차 싶었지만 오히려 다친 것은 남궁희.
“서, 성좌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