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59화 : 맹견
판타지 세상의 법칙 하나
인간족 말고 다른 인외종은 특기가 하나씩 있음.
엘프는 정령술과 궁술, 숲에서 잘 뛰어다니며 채식을 한다
드워프는 땅굴과 광산에 살며 대장장이나 건축 등에 능숙하고
수인족은 종에 따라 육체 능력이나 비행, 수영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드래곤은 마법을 쓰며 오크는 능욕의 달인이고, 고블린은 몰살당하는 역할.
조금은 고정관념이 생길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한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몽마의 특기는 한 단어로 딱 잘라 말하기 힘들지만 환각 계열이 아닐까.
매혹이나 매료도 생각해 봤지만 분신을 보내서 감각을 공유하고 꿈속 존재를 현실에 구현하는 걸 생각해보면
몽마의 주특기는 환각, 환상 계열이겠지.
‘뭔가 애매한데...’
왜 이런 생각을 하나면, 시들지 않는 거목이 내게 보여주는 이미지 때문이다.
‘중반기 VR 게임기기 같아.’
내가 분신을보내 도시를 돌아다닐 때, 후각과 촉각과 미각 그리고 시각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었다.
통각 같은 세세한 부분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적어도 만지면 촉감이 느껴지고,음식의 냄새를 맡고 맛을 즐길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드루이드의 권능을 통해 간접적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조금 달랐다.
TV 스크린이랑 다르고, 직접 보는 것과도 다르다.
굳이 비슷한 것을 고르자면 어중간한 VR 화면이라 해야 할지, 좀 잘 만든 3D 입체 영상이라 해야 하나?
꽤 이름 있는 성좌인 시들지 않는 거목이 자신만만하게 내민 기술이 이 정도라니
엘프라는 종족은 이런 쪽에 익숙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때, 잘 보여?”
“잘 보인다, 고마워.”
“뭘, 별거 아니야-”
침대 머리맡 나무 부분에 등을 기대고 편히 눕는다.
침대 나무 프레임도, 정아린이 매일 차고 다니는 팔찌도 살아 있는 나무라는 것에 조금 놀랐지만
엘프 성좌가 고작 생목 하나 못 다룰 리 있겠나- 하고 생각하니 당연하게 느껴지긴 했다.
살아 있는 나무와 접촉해 감각을 공유하는 기술.
엘프와 몽마족의 특기 차이 때문인지 1440으로 보던 동영상을 720으로 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게 어딘가.
그래도 프로텍터 걸린 찰흙 인간보단 낫지.
지난번의 포위 작전처럼, 3인 1조 베이스로 어디론가 슥슥 이동하고 있는 정아린 팀이 보인다.
정아린의 팔찌를 매개체로 해서, 그 주변을 대충 둘러볼 수 있는 상황.
실시간 구글 스트리트 뷰 라고 해야 할까. 덕분에 정아린은 화면에 나오질 않고, 등 뒤에 있는 남궁희와 한예지만 보인다.
“13조, 목표 지점 도착했다.”
“알겠다, 신호까지 대기할 것.”
정아린의 장비는 모르겠지만, 남궁희와 한예지는 평소와 다른 장비를 갖춰 입고 있었다.
먼저 남궁희는 평소에 들고 다니던 커다란 전경 방패 대신, 두꺼운 검은 글러브를 끼고 양손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옷차림도 제복이 아니라 팔꿈치나 무릎에 각반 같은 걸 덕지덕지 붙이고 있어서
누구 하나 주먹질로 때려잡으려는구나- 싶은 차림새.
한예지도 평소에 들고 다니던 길쭉한 마취총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고무탄을 발사하는 샷건과 근거리 호신용 삼단봉을 들고 다니는 게 평소보다 살벌하기 그지없다.
하긴, 성좌가 얽힌 범죄 조직이면 좀 과하게 진압해도 별말 나오진 않겠지.
지난번과 달리 도심 한가운데서 벌어지는 작전인지,
빌딩 사이의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쭈그려 앉은 세 사람이 말없이 대기한다.
사건이 좀 큰 편이니 긴장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째 메시지도 전할 수 없다.
하기야, 단순히 지켜보는 것조차 막혔는데
화신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내는 기능이 살아 있으면 그것도 이상하지.
초능력과 마법을 쓰는 화신들이 있음에도, 제압부대의 진입은 전생의 영화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다.
슬쩍 위를 보니 건물 외벽에 로프 없이 매달려 있는 특수부대를 제외하면 말이지.
날아서 옥상에 진입하는 조, 악력으로 인근 건물 외벽에 매달려 있는 조, 그리고 건물 주변에 포위망을 펼치고 있는 조.
시야의 제한 때문에 포위망 일부밖에 보이지 않지만 지난번처럼 거의 백여 명이 넘는 화신이 우글우글 모여있었다.
생각해보면 수도도 아닌 주제에 왜 이리 큰 사건이 자주 터지는 걸까.
포인트를 모은다는 측면에서는 좋지만, 한예지가 위험해지는 일이 생길까 걱정되기도 하니.
게임 캐릭터야 부활하기 버튼이나 잡화점에서나 파는 HP 포션으로 뚝딱 완치된다지만 현실이 그럴 리 있나.
“야, 그쪽에 담배 가지고 있는 애 있냐?”
“셋 다 비흡연자야.”
정아린이 옆 골목의 팀장과 이야기를 나눈다.
사복을 입은 한 명이 골목에서 정아린과 친한 척 대화를 나누고, 무장을 한두 명은 똑같이 옆 골목에 숨어 있는 상태.
감지 계열은 사복을 입고 주변 경계를 하는 상황인가?
“에이 씨, 어떻게 아홉 중 흡연자가 나 하나밖에 없지?”
“뭐야, 옆 조에서도 까였어?”
“그래, 저쪽 조는 셋 다 육체파라서 담배 피우면 성좌님한테 혼나.”
“우리 쪽 애도 난공불략 쪽 화신이야.”
“그래? 지난번에 들어왔다던 막내가 너희 팀으로 갔구나. 다른 건 몰라도 턱주가리 날아가서 바닥에 누울 일은 없겠네. 백업 좀 잘 부탁한다고 전해줘.”
도시 한 복판인지라 흘끗흘끗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담배를 물고 너털웃음을 짓는 옆 조 팀장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대충 대답하는 정아린의 모습에
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 1900 작전 시작 예정, 제대로 임무 숙지하도록
띠링, 하고 정아린이 손에 쥔 스마트폰에 문자가 울린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은 이야기가 끝나고 헤어지는 사람처럼 자연스레 헤어진다.
“3분 뒤, 작전 시작되면 한예지 너는 1층 문밖으로 뛰쳐나오는 놈 제압 사격, 남궁희는 바로 나한테 따라붙어서 밖에서 건물 안으로 진입하려는 사람들 막는다. 이해했냐?”
“네, 알겠습니다.”
“...예”
고개를 꾸벅 숙이는 남궁희와, 이를 갈면서 샷건의 펌프를 확 당기는 한예지.
어지간히 화가 난 상태인지 마취총이나 테이저건에는 손도 대지 않고 산탄 고무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이를 갈 듯이 철컥거리는 검은 샷건이 위협적이다.
정아린이 손에 든 스마트폰이 시계 어플을 실행한다.
1857, 1858, 1859-
찰칵찰칵 올라가는 숫자가 1900이 된 순간 사방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난다.
“돌입, 돌입! 작전 개시!”
목소리를 키우는 재능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확성기를 들고 다니는지
우렁찬 여인의 목소리가 시가지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구름 위쪽에 숨어 있던 화신들이 먹이를 낚아채는 매처럼 활강해 옥상으로 뛰어내리고
인근 건물 외벽에 매달려서 숨어 있던 화신들이 벽을 박차고 창문을 통해 들어간다.
“한예지, 뛰어! 우리는 뒤쪽을 맡는다!”
한예지가 앞으로 향하고, 등 뒤를 두 명이 막아서는 상황.
옆의 두 조도 비슷하게 한 방면을 틀어막는지 마취총이나 테이저건을 든 사람 두 명이 한예지의 옆으로 붙고
네 명의 화신이 정아린 쪽으로 다가와 각자 골목 입구를 틀어막는다.
정아린이 한예지의 뒤에 자리 잡은 덕분에 한예지가 잘 보이네.
“이쪽으론 못 지나갑니다!”
“통행금지입니다, 접근하지 마십쇼!”
제압부대의 화신들은 경찰처럼 국가와 계약한 공무원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공무원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골목을 틀어막고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자
시민 대부분은 화신들이 이러니 뭔 일이 일어났나보다- 하고 알아서 물러났다.
스마트폰을 들고 골목을 틀어막는 화신들을 촬영할지언정,
강제로 덤벼들거나 하는 사람이
...있네?
“야, 암마, 너 내가 누군지 알, 아아악”!
번화가에 위치해서 그런지 술에 거나하게 취한 중년의 아줌마 하나가 다가와
삿대질을 하며 남궁희의 가슴 보호대를 툭툭 건드리자, 남궁희는 주저 없이 취객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손목과 멱살을 붙잡은 상태로 예술적인 업어치기.
“화, 화신이 사람 팬, 끄에엑!”
짓눌린 개구리처럼 꾸엑 소리를 내지만, 아스팔트 바닥 위에 던져졌는데 기절로 끝나면 자비로운 게 아닐까.
허공에서 풍차처럼 휙 돌아 바닥에 철퍽 내팽겨쳐지는 그 꼴사나운 모습조차 사람들은 촬영하고 있었다.
육체를 강화한 화신의 업어치기에 당했는데 부러진 곳은 없어 보이니 정말 많이 봐주긴 했네.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듯, 바닥에 엎어져 기절한 중년의 아줌마를 발로 강하게 미니
지이익 소리와 함께 도로에서 주욱 밀려난다.
그러자 술에 덜 취한 일행이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하며 후다닥 들고 도망친다.
“나오는 거, 전부 쏩니까?”
“튀어나오는 년들은 전부 비협조적인 잠재적 협력자야, 갈겻!”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등 뒤쪽에서 퍼엉, 하고 고무탄 발사되는 소리가 들린다.
정아린을 축 삼아 시야를 돌려보니 빌딩 입구에서 몇몇 사람들이 양팔을 들고 뛰쳐나오고 있었다.
테이저건의 바늘이 날아가며 허공에서 수 십개로 분열되며 가장 앞의 세 사람을 감전시킨다.
그와 동시에 마취 다트가 옆으로 돌아서던 사람의 옆구리에 박히며
뭉게뭉게 안개를 피우더니 뒤따르던 몇 사람을 바닥에 눕힌다.
역시 제압팀이라 그런지, 한예지 말고도 꽤 쓸모 있어보이는 특성이 많은데.
그 와중에 육체 강화 능력이 있는 화신인지
쓰러진 사람을 방패 삼아 어마어마한 속도로 달려든 여성이 있었지만-
“씨발, 비켜, 억!”
“누구더러 씨발 거려, 이범죄자 새끼가!”
화가 좀 많이 난 것 같은 한예지가 그대로 복부에 고무 샷건을 갈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발사된 고무탄들이 폭죽처럼 여성의 배에 충돌하고 사방팔방 튕겨 나간다.
퉁퉁 살벌한 소리를 내며 저 멀리까지 굴러가는 고무 구슬을 보니 얼마나 강하게 발사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끄, 으에에엑...”
피멍이 들다 못해 갈비뼈가 멀쩡할까 걱정이 될 정도로 강렬한 충격음.
자세히 보면 샷건 탄 안에 들어있는 슬러그 하나 하나가 두 번씩 충격을 주는 것 같은데.
산탄 하나에 고무 구슬이 몇 개 들어있지?
수를 셀 수 없는 산탄 전부가 두 번씩 타격하니 강화 능력자고 뭐고 어중간한 녀석은 곤죽이되는구나 싶었다.
만약 두 번째 재능이 속도만 두 배가 아니라, 충격력도 두 배였다면 사람이 죽었겠구나~ 할 정도.
진짜, 두 번째 재능이 충격량 두 배였으면 제압팀이 아니라 군대에 갔겠네.
그 정도의 패널티가 있어서 다행인가?
“다들, 얌전히 조사에 협력해주십쇼.”
“이, 미친, 으우에에엑-”
희번득한 눈깔을 부라리며 장전된 샷건 총구를 들이대는 한예지의 모습에
뒤늦게 뛰쳐나온 대부분의 사람이 얌전히 뒷걸음질을 쳐 건물 입구에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한다.
머릿수가 꽤 되지만 화가 난 상태로 샷건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린 사람에게 정면으로 달려들 용감한 사람은 없어 보인다.
그 옆에 양팔로 배를 감싸 안고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구토를 하는 피해자가 하나 있다면, 더욱더.
‘화가, 많이 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