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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8화 〉58화 : 씨앗 (58/169)



〈 58화 〉58화 : 씨앗

타이밍이  보고 노렸나 싶을 정도로 얄궂었다.

‘어떻게 팬티에  올리니까  전화가 오냐.’

전화 알람이 울릴 때 팬티에 손을 올리고, 벗기려는 순간 화가 난 남동생이 와서 걷어찼다.
무너져내리는 꿈속 세계를 바라보며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표정이 얼마나 서글퍼 보이던지.
밥그릇 엎어진 강아지가 세상 무너진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프로텍터는 아직 있네... 못 뚫나?’


그래서 무슨 일로 출동을 하는지 궁금한데 볼 방법이 없으니 답답하다.

자각몽에서 튕겨 나오니 보이는 것은 찰흙 인형.
채찍처럼 기기괴괴하게 휘어 다른 인형을 후려치는 걸 보니
정신 차리라며 남동생이 한예지의 등짝이라도 두드려 주는  같은데.

‘이러면 남은 건 이하린 뿐인가.’


한예지는 도시의 프로텍터 너머로 사라졌고,
김하은은 첫 계약과 첫 권능의 반동으로 뻗어 있으니 남은 것은 자연스럽게 이하린 하나.
세계수 가지 때문인지 체력도 팔팔해서 잠이 오지 않지만-

솔직히, 이하린은 재미가 없었다.


편애의 의미나, 이하린이 화신으로서 못 미덥거나, 여성의 매력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요즘, 24시간 중 정말 12시간 내내 마법진만 만지고 있단 말이지.

8시간은  자고 건강을 챙기라는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처럼 시간표를 척척 짠 이하린.
그녀의 일과는 지켜보면 말이 나오질 않는다.
6시 기상, 7시까지 아침 운동 및 샤워. 그 이후로는 점심, 저녁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제사 마법 연구.


8시부터 12시까지, 1시부터 6시까지, 7시부터 10시까지.
딴짓도 하지 않고 정말 12시간 내내 연구만 하고 있으니 보는 재미가 있겠는가.
강림이라도 하면 괜히 방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와중에 마법학 교관과 어떻게 이야기를 해 놨는지 연구 결과를 소논문으로 제출해서
아카데미용 학점도 취득하고 있었다.

한예지가 평범, 김하은이 천재라면 이쪽은 즐기는 수재라고 봐야 한다.

성좌 오타쿠였던 그녀로서는 일이나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하루 12시간 취미에 몰입하고 있다.
동대륙에서 지내는 부모님이 걱정하며 아카데미에 연락할 정도로 푹 빠져 있었으니까.
식사하는 하루  번의 휴식 시간에도 슬금슬금 성좌 관련된 웹 서핑을 하고 있었으니 말 다 했지.


식사 시간이나 휴식 시간도 아닌데 내려가면 방해가 되는 게 아닐까,
고민하는 찰나 목덜미에 무언가 툭 닿았다.

화들짝 놀라 뒤를 확 돌아보니 아무것도 없고 그저 쪽지 한 장만 바닥으로 팔랑팔랑 떨어지는 중.


“아, 씨팔 깜짝야.”

평화로운 세상에 익숙해지고 있긴 하지만, 지금처럼 놀라는 반응은  사라지지를 않네.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서 단검 손잡이를 찾던 손을 괜스레  번 쥐었다 피며 쪽지를 주웠다.
너무 과하게 놀란 것 같아서 보는 사람도 없지만 쪽팔려서.


- 잘 지냈어? 처음 시도하는 고급 정령술이라 그런지 유지하기 너무 힘들더라


동글동글한 글씨로 안부를 묻는 귀여운 편지, 시들지 않는 거목의 연락이었다.


그런데 정아린네 도시에 프로텍터가 걸려있는데 무슨 상황인지 알아?
- 성좌가 얽힌 범죄 조직 소탕한다던데
- 그래? 요즘은 잠잠하다 싶더니 슬슬 또 튀어나오네
- 요즘? 전에도 무슨  있었어?

심심하던 차에 대화 상대가 생겨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보냈다.

역사 공부는 따분하기 그지없지만
성좌나 화신의 초능력이 얽힌 이야기는 역사보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 같단 말이지.
나 또한 판타지의 존재가 되었지만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다르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 다른 대륙은 잘 기억  나고, 동대륙에는 35? 36년 전쯤에 한  일이 있었어

35년이면 내 인생과 비슷한 수준의 시간이지만 엘프에게 있어서는 ‘요즘’으로 표현될 수 있는건가.
별거 아닌 부분에서 신기함을 느끼고 있으니 이번에는 쪽지가 아니라 종이  장이 크게 날아왔다.

- 가장 최근에 타락한 성좌가 얽혔던 동대륙의 사건은...

내가 호기심을 느꼈다고 생각하는지,
동글동글한 글씨가 옆으로 비스듬히 길쭉해질 정도로 급하게  손글씨가 가득한 종이.
오타는 대충 찍찍 그어져 있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위키 읽듯이 그녀가 손으로 적어준 타락한 성좌 썰을 천천히 읽고 있으니 자그마한 쪽지 하나가  던져진다.
왼손으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으며 오른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쪽지를 주워들었다.

- 심심하면 우리 애들 작전하는 거 같이 볼래?

프로텍터에 막혔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싶다가도 문득 생각이 들었다.
1년 차 성좌 따위랑 비교도 되지 않을 경험과 포인트를 쌓아놨으니까,
프로텍터를 뚫는 방법도 있는 게 아닐까?

문득 전생 어느 게임의 강퇴와 반사와 슈퍼 방장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 프로텍터를 뚫을 방법이 있어?
- 프로텍터는 성좌가 위에서 도시를 관찰하는 걸 막는 방어 프로그램이라, 화신에게 강림해서 시야를 빌리는 거라면 가능한데?

도시 관찰을 막는다더니 내 분신은  사라진 건가 싶었지만 곧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불필요한 감각도 구현되지 않았고, 주먹으로 강하게 얻어맞으면 역 소환될 허약한 분신이었으니까...
너무 연약해서 프로텍터의 마력 파동조차 이기지 못했을지도.

이렇게 생각하면 정말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만
레벨이 쭉쭉 오르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성좌가 강해지는 방법이라 해 봐야 포인트를 버는  말고 없는데 갑자기 큰 포인트를 만질 방법이 뭐 있겠는가.


포인트 로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꾸준히 모으는 수밖에.
아니, 로또 대신 김하은을 주웠으니 일단 당첨되긴 했다고 봐도 좋겠지...?

- 너무 갑작스러웠나? 싫으면 어쩔  없고
- 아니, 나는 화신과 감각을 공유한 적이 없어서 놀랐던 거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답장이 멈추자, 안절부절못하는 쪽지가 하나 톡 날아와 답장을 보냈다.
고작해야 화신과 시야 공유해서 같이 구경하자는 이야기에 왜 이리 호들갑을 떠나 싶었지만
대화 상대 없이 백여 년을 성좌로써 살았다는 점에서는 조금 이해가 갔다.

나도 지하실에서 고작 몇 년 혼자 있었는데 정신병에 걸릴 뻔했지...
차라리 감염되어 죽더라도 다른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는 생각까지 많이 했었으니까.
외로움이냐, 방사능 오염이냐를 진지하게 비교하게 될 줄은 몰랐지.

궁금하긴 한데 어떻게 해?
- 세계수 가지 밑으로 가 볼래?

손을 흔드는 것처럼 흔들거리는 세계수의 가지 밑으로 향했다.
어느새 조명처럼 방을 가로지르는 거대 나뭇가지에 익숙해진 내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지네.
하긴, 자각몽과 큰 나뭇가지를 비교하면 자각몽이  신기하긴 하지.


나뭇가지 끝자락에서 동그란 열매가 맺힌다.
끝부분이 뾰족한 물방울 모양은 아몬드를 닮았는데, 색이 특이하다.
형광색이라 해야 할지, 빛나는 연녹색이라 해야 할지.
만화처럼 과장된 에메랄드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반투명하고 반짝반짝한 게 너무 예뻐서, 씨앗보다는 물방울 모양의 보석으로 보인다.

- 먹어

사탕이 아니라 유리 공예품을 깨무는 기분으로 씨앗을 입에 쏙 넣자 깨물기도 전에 사라진다.
그와 함께 시야 한구석에 떠오르는 글자.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권능 : 드루이드의 세상을 학습합니다]
[Yes / No]

드루이드의 세상이라, 특이한 것이 나왔다.
내가 꿈과 관련된 기술을 90% 할인받는 것처럼, 시들지 않는 거목도 이런 기술을 90% 정도 할인받는 걸까?
받기만 하는 처지에서 몇 포인트인지 이야기를 들으면 속이 쓰릴 것 같아 조용히 Yes 버튼을 눌렀다.

몽마의 기술이 문득 어젯밤 꾸었던 꿈을 기억해 내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식이라면
이 드루이드의 기술은 씨앗이 발아하는 느낌이 있었다.


무슨 뜻이냐면, 뜨거운  먹은 것처럼 씨앗이 목구멍을 넘어 뱃속으로 향하는 것이 간질간질하게 느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거 괜찮은 거 맞겠지?’


뱃속을 간질이는 것처럼 조금씩 움직이던 씨앗이 점차 몸을 따스하게  준다.
한겨울에 아늑한 공간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것처럼 뱃속부터 온기가 퍼져 온몸이 나른해진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감각 때문에 약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나저나 엘프가 아니라 드루이드인가?’

드루이드는 꽤 유명한 RPG 게임 속에서 곰이나 올빼미로 변하는 그런 직업군 말고 딱히 아는 게 없기에
대화거리 하나가 생겼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들, 려?”

“악, 씨발 뭐야?”

나른한 기분을 만끽하며 침대에 앉아 있으니 귓가에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확히는, 내가 등을 대고 있는 침대 머리맡 가구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나무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아봐-”

침대의 나무 프레임이 말을 걸어온다는 초유의 사태에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했지만,
그 목소리가 시들지 않는 거목의 목소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아 놀란 가슴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판타지 세상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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