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57화 : 타이밍
한예지를 보면 손바닥에 온 몸을 비벼대는 강아지의 애교가 떠오른다.
재잘대던 목소리가점차 잦아들고 조금씩 내게 기대는 모습을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상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진도를 나가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부드러운 손바닥이 옆구리와 허벅지를 살살 쓸며 지나간다.
남녀의 역할이 뒤바뀌며 애무를 하는 쪽에서 애무를 당하는 쪽이 되어서그런지, 정중하고 섬세한 손길이 다가온다.
허락을 받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애를 태우고 싶어 하는 마음도 조금 담긴 것 같고.
“하아, 성좌니임...?”
“왜 그러느냐?”
그 모습을 보니 괜스레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 가만히 있었다.
소파에 앉아 떡하니 자세를 굳히고 있으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으니까.
막말로 남자가 누운 여자 바지를 벗길 때도 엉덩이를 들어줘야 편할 텐데,
근육질의 180cm 거한이 앉아 있는걸 무슨 수로 움직이겠는가.
내 얼굴에 어린 장난기를 읽었는지, 가만히 버티는 내게 들러붙은 한예지가 계속해서 손바닥으로 몸을 살살 간질인다.
척추를 따라 손가락을 슥슥 내리기도 하고, 옆구리를 슬며시 쓸다 복근 위에 손바닥을 둥글둥글 문지르기도 한다.
어느새 마루는 대화 소리 없이 고요한 숨소리로 가득하다.
나를 애태울 생각으로 움직이는 한예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무리 김하은의 발끝을 따라가는 것도 힘든 몽마라지만 인간과 몽마에게는 종족적인 차이가 존재하니까.
스으읍, 하아-
“뭔가, 향기 같은...”
내게 기대서 나를 희롱하는 것처럼 손바닥을 문질러대던 그녀가 코를 킁킁 들썩인다.
게슴츠레 눈을 뜨고 코에 의존해 냄새를 더듬어가는 모습이
방금 전까지 생각하던강아지의 이미지와 너무 닮아서 크게 웃을 뻔했다.
그래도 몽마인데, 매료 능력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약하기 짝이 없던 나의 마력이 슬슬 가까운 상대에게는 통할 정도로 늘어났다는 점이 기쁘게 다가온다.
“되게, 좋은, 냄새가.”
단어 하나, 깊은 들숨 한 번
단어 하나, 깊은 들숨 두 번
냄새가 흩어지는 것조차 아깝다고 생각하는지 크게 숨을 들이쉬니 말이 점차 느려진다.
나를 애태우던 손이 천천히 느려지더니, 점점 한 곳을 반복적으로 문지르다 추욱 늘어졌다.
“으, 음... 성좌님?”
이상하다는 듯, 내 옆에 기대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양 뺨, 입 대신 숨을 쉬며 호흡이 가팔라지더라도 냄새를 더 맡고 싶어 하는 자그마한 코,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미세하게 땀이 나며 촉촉해진 피부까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몸이 달아오르니 스스로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겠지.
“왜 그러니, 계속하지 않고?”
살풋 웃어 보이자 그녀의 입에서 작은 혀가 빼꼼 나와 내 손등을 핥는다.
불쾌할 정도로 침이 질척이는 것은 아니다.
내 손을 가지고 놀겠다는 것처럼 살짝 핥았다 가볍게 입을 맞추고, 앞니로 살금살금 깨물기도 하고.
제 미숙한 실력으로는 뭘 할 수 없으니까, 애교라도 부리겠다는 걸까.
아니면 부족한 지식으로 어떻게든 하려는 걸까.
화신 계약 이후, 한예지의 삶에 아주 사소하지만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바로, 야동을 즐기는 혼자만의 해피타임이 사라진 것.
내가 시도 때도 없이 말을 걸어오거나, 꿈속에 부르거나, 혹은 자신의 방에 강림해 컴퓨터를 빌려 쓰기까지 한다.
그이후로 그녀는 혼자만의 해피 타임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가질 필요가 없게 된 거지.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에 두, 세 번은 나와 함께 하는데
회사에서 지친 몸 이끌고 현실에서 오른손 군과 찔걱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현실에서 퇴근하고 남동생 몰래 야동 보면서 즐기기 vs 자각몽 속에서 이상형과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즐기기.
남자와 여자, 아니 역전 세계의 남자와 여자까지 포함해 네 부류 전부 후자를 선택하지 않을까.
성적 지식이라곤 야동에서 배운 엉터리 지식밖에 없는데 그 야동마저 보지 않게 되었으니 그녀가 무얼 알까.
그나마 나와 함께 하는 동안에 어느 정도 얼추 배웠지만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남자를 다루는 법은 알 리가 없다.
여태껏 내가 다 호응하고 토닥이며 이끌었으니까.
“흐아암, 이게, 왜 이러지...”
그런 식으로 안절부절못하는 귀여운 모습을 보려고 골려주려 했는데
오히려 한예지의 눈이 흐리멍덩해지는 것이 보인다.
아직 미숙해서 내 마력이 그녀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우기라도 하는 건지
점차 숨소리도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씨발, 누구는 보기만 해도 권능을 깨우치더만...’
잠들거나 취한 여자와 즐기는 취미는 없었다.
여성의 반응과 표정을 보고 시각적으로 흥분하는 것이 남자라는 생물이었으니까.
마력 하나 제대로 못 다뤄서 즐기려다 말고 숙면을 취하게 둘 수는 없지.
※
동대륙의 설화중에는 성좌들이 전해 준 이야기가 있다.
하늘 높은 곳에 앉아 인간계를 내려다보는 옥상 여제(玉皇女帝)와 그녀를 보필하는 천상의 선인들 이야기.
몽롱하게 녹아내린 머릿속에서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든다.
‘여기가 극락이라는 곳이 아닐까?’
하늘에서 내려온 아름다운 남성이 따스하게 맞이해주고, 몸은 따듯하고 나른하다.
어디선가 맡아본 적도 없는 좋은 향기가 머리를 가득 채우니 몸에서 힘이 쭉 빠진다.
몸에서 힘이 쭉 빠져도 불편한 점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이대로 녹아내린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왜 그러니, 계속하지 않고?”
귓가에 들려오는 자상한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렸다.
비스듬히 기댄 나를 받아주는 자세로 마치 아이를 어르듯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남성의 얼굴.
그 모습에 멍하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돌아온다.
“흐아암, 이게, 왜 이러지...”
그 모습을 보며 숨을 들이쉬자 누군가 턱을 잡아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하품이 흘러나온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자각몽 속에 있지, 그런데 왜 이리 졸릴까...
질척이는 수마를 떨쳐내기 위해 억지로 팔다리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남성의 살결.
탄탄하면서도 매끄러운 그 감촉에 조금은 넋이 나간 것처럼 행동했던 것 같다.
‘어, 벗겨도 되나?’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저 가벼운 바지를 벗기고,
그 안의 속옷을 내려 우람하고도 아름다운물건을 직면하고 싶지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연인 관계에서도 배려 없이 장대를 조물딱대다 헤어지는 연애 사정이 많다고 들었는데
하물며 성좌님에게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성좌님이 안 계실 때, 한창 회식 자리에서 떠들던 선배들의 말을 떠올렸다.
‘남자는 분위기, 남자는 분위기... 근데 지금보다 더한 분위기가 있나?’
아늑한 방, 따듯하고 달콤한 공기, 충분한 아이컨택트, 서로 살살 어루만지면서 웃고-
이거보다 더, 뭘?
더 잡을 분위기가 있긴 한 건가?
멍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아 욕망대로 손을 뻗는다.
‘괜찮나? 괜찮겠지? 성좌님은 자상하시니까 이 정도쯤이야...’
문득 군 전역 후 화신이 된 선배 하나가 해도 되나 싶으면 하지 말고, 해야 하나 싶으면 하라는 조언이 떠올랐지만-
생각과 다르게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손은 이미 반바지의 허리춤을 잡고 거칠게 당겨버렸으니까.
이미 늦어버린 상황이다.
바지춤이 훅 내려가고, 탁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궈진 바지 너머로 달큰한 냄새가 훅 풍겨온다.
“흐음, 더 해보렴.”
뺨을 붙잡고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자신감을 찾는다.
아까보다 훨씬 강렬해진 향기.
소파 아래로 내려가 바닥에 앉아 탄탄한 허벅지에 턱을 괴고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신 걸 보니 놀라시긴 했지만,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는 걸 보니 기분이 상하지는 않으신 것 같고.
빠빠빠-
무릎과 허벅지에 입을 맞추며 점차 안쪽으로 향했다.
꿀을 찾는 꿀벌과 같이 점점 달큼해지는 향기를 따라서.
저 얇은 천 조각 안에 숨어 있는 살덩이가 가져다줄 쾌락을 알기에 점차 숨이 가빠진다.
빠빠-
그리하여 큰 기대감을 품소 다시 한번 손을 뻗, 뻗어서...?
빠빠빠빰! 굿! 모! 닝!
누나, 좀 일어나라고! 야!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울린다.
“저런, 방해꾼이 왔구나.”
참으로 아쉽다는 목소리와 함께 세상이 빙글 변한다.
달콤한 냄새는 온데간데없고 홀어미 쉰내 나는 방의 쿱쿱한 냄새를 코를 파고드니 자연스럽게 인상이 찡그려진다.
“아니, 저렇게 울리면 좀 일어나라고!”
자상하고 듣기 좋은 미성은 없고, 짜증으로 점칠 된 남동생의 목소리가 알람 소리와 함께 귓가를 때린다.
천금보다 무거운 눈꺼풀을 강제로 들어 올려 상황을 파악한다.
본부에서 온 비상 연락이 스마트폰의 알람과 연동되었고
자각몽에서 깨어나질 않으니까 옆 방에서 알람 때문에 깬 동생이 방으로 쳐들어 와서...
하필, 이 타이밍에?
“예, 한예집니다.”
- 야!대충 씻고 출동 준비해라, 큰 거 움직인댄다!
“정아린 선배님...?”
- 아직 덜 깼으면 일단 찬 물로 세수라도 하고 와!
띠익, 하고 일방적으로 끊어지는 전화.
무언가 가슴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