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56화 : 천재 (56/169)



〈 56화 〉56화 : 천재

재능과 권능은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바로 가격.

 소리냐 싶었지만 가장 비싼 재능과 가장 싼 권능의 가격 차이는 거의 5배 이상이 난다.
게임식으로 비교하자면 2차 전직 마법사의 필살기와 5차 전직 대마도사의 평타 정도로 비교할 수 있겠지.


머리가 나쁜 나로서는 이렇게 게임에 대입해서 이해하는 것이 제일 편했다.

한예지가 깨우친 재능은 공격할 때 1회 추가 타격이 있는 환(幻)과 투사체의 속도가 증가하는 쾌(快) 두 가지고,
내가 포인트로 선사해준 권능은 떨리지 않는 손, 날카로운 안목, 차분한 숨소리 같은 사격 보조용 재능들이다.
몽마의 정을 소화했다는 것 말고 스스로 얻은 것은 없다고 봐야겠지.


상점에서 포인트로 환산하자면 개당 대충 1만 ~ 5만 포인트 하는 재능들.
그리고 지금 김하은이 깨우친 권능을 상점에서 찾아보았다.

몽마의 권능, 희망 찬탈자의 상점 가격은 무려 백만 포인트.

공용 기술이 아니라 몽마와 관련된 기술은 가격이 10분의 1로 할인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무려 천만 포인트짜리 권능인 것이다.


이렇게 비교하면 좀 잔인하지만...
1년이 지나도 남이  5만 포인트짜리 기술에 숙달되는 것이 전부인 사람과,
한 시간 만에 천만 포인트짜리 기술을 깨우치는 사람.

정말 단순무식하게 포인트만 비교해도 200배의 재능 차이라고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굳이 따지자면 1만 포인트짜리 기술도 스스로  얻었으니까, 대충 천 배 차이...?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스스로 고위 권능을 깨우친 화신에게 찬사를 보냅니다]


대단하다고 보낸 메시지도 어째서인지 호들갑을 엄청나게 떠는 모습으로 번역되어 있었고.

하긴, 저 정도면 호들갑을  법한 권능이었다.
재능이 찬란하게 빛나는 이들은 어디 판타지 소설 주인공 같다더니, 정말이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화신에게 희망 찬탈자에 감탄합니다]
[타인이 꿈꾸는 완벽한 모습을 흉내 내는 권능이니,  사용하라고 덧붙입니다]



잘 때 꾸는 꿈도 있고 미래를 희망하는 꿈도 있다.
희망 찬탈자는 말 그대로  꿈을 훔쳐와 사용하는 것.
꿈을 꾸는 지적 생명체에게만 사용할  있다지만 그건 원래 몽마족 기술이 다 그렇고.


박동하는 사자심의 계약자는 헬스장 관장으로, 운동에 진심을 보인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는 자그마한 희망 사항이 있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자세로, 완벽하게 운동을 하는 자그마한 꿈.
그 꿈을 김하은이 베껴버린 것이다.


권능의 상세 설명을 읽어본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가진 마력이 적어 고작해야 헬스 자세 따위를 베꼈다지만 단련을 거듭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단순히 체력과 마력량을 늘리는 운동만 해도 만능의 전사가 될  있다.

‘굴레를 베어내는 검’의 화신이 곁에 있다면 최강의 검객이 될 것이고
‘난공불락의 성벽’과 계약한 남궁희 같은 사람을 베낀다면 맨몸 무투가의 정점에 오르게 될 것이다.
검, 창, 활, 체술 부터 다양한 마법까지.


일정 시간만 강해지며 주변에 베낄 사람이 있어야 하는 필살기라지만  효용성이 너무 무궁무진하다.
지금 상황만 봐도 훈련할 때 ‘박동하는 사자심’의 꿈을 베낀다면 이론상 완벽한 훈련을 할  있으니까.


‘이게, 천재라는 종족인가.’

몽마로서의 자질을 보이면 슬금슬금 보고 베껴서 따라가려는 내 생각이 오만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교과서고 뭐고, 아인슈타인이 수학을 암기한다고 그걸 수학 7등급따리가 슬금슬금 따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운이 좋군.’


부모님이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을 추스르고 체육관을 찾은 첫날
우연히 내가 그녀를 발견했다는 것에 얼굴도 모르는 신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나저나, 저걸 도와줘야 하나?

“아니, 제발, 돈을 두 배로 드릴 테니까  개만 더 해보십쇼!”


“아 쫌, 마력 다 썼다고요!”


“촬영이 제대로  되었는데, 제발 딱 하나만 더 당겨봅시다!”


“지금 팔꿈치 아래가 안 움직인다니까요? 제가 어디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왜 이러세요 관장님.”


화면 아래에서, 체육관 관장이 눈에 핏발이 선 상태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저러다가 마룻바닥에 머리까지 박을  같은데.


“그 자세, 심장이 뛰는 그 자세! 내일 꼭 보여 주셔야 합니다? 화신  화신으로 약속 하신 거에요? 아니다, 회원 가입할 때 주소 적으셨죠? 제가 내일 약속 시각에 픽업하러 가겠습니다.”


“알겠다고요, 팔도  올리겠으니까 제발 놔요...”


부작용이라 하면 부작용일까.
몽마, 꿈속 세계의 주민들이 다른 세계에서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이유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남의 꿈을 함부로 휙휙 다루면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겠지.


질투해서 미워하거나, 저렇게 매료되어서 진득하게 달라붙던가.

“제 발로 걸어갈 테니까 내려놔요!”


“하하, 다리가 그렇게 후들대는데요 뭘.”


버둥댈 힘도 없는 김하은을 쌀 포대처럼 어깨에 턱 올린 체육관 관장이 엘리베이터로 향하자
사무실 직원들이 눈동자가 전부 그쪽으로 향한다.

근육질의 동성에게  포대처럼 배달되는  수 십 명 앞에서 보이다니.


나였으면 쪽팔려서 혀 깨물었을 것 같아.






타인의 꿈을 무리하게 베낀 후유증으로 다리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벌벌 떨리는 김하은을
체육관 관장이 집까지 데려다주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느새 어둑어둑하게 해가 졌다.

이하린은 저녁을 먹고 울퉁불퉁한 바닥에 완벽한 원을 그리는 연습을 하는 중이고
김하은은 관장에게 부축받은 상태로 집에 돌아와 씻지도 못하고 현관에서 기절하듯 쓰러져 잠에 빠져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김하은의 꿈에 가고 싶지만... 오늘은 아니지.


아직 도시에 프로텍터가 걸려 있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너무 궁금했다.
밀수꾼들이 무엇을 운반하는지, 왜 성좌가 밀수꾼 따위를 돌보는지, 그리고  성좌는 무슨 성좌인지.
대륙에 재능 넘치는 애들 돌보기만 해도 호화롭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세상에 와서 처음으로 만나는 적대적인 성좌 아닌가.


그렇게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화면을 한예지 집 안방으로 향했다.
세상이 하급 게임 폴리곤처럼 깨져 보일 뿐이지, 뒤죽박죽으로 좌표가 섞이거나 하지는 않았으니까.

저 침대에 누워서 자각몽을 발동시키면 100% 한예지겠지 뭐.


그렇게 냉장고에 추가된 과일 중 귤 닮은 녀석을 먹으면서
이건 귤 닮은 과일일까, 귤인데 품종 개량이 조금 다르게  걸까
이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내니 생각보다 일찍 누군가 돌아왔다.

화면으로 보면 이름도 깨져 보이는 황갈색 마네킹이 팔다리를 뒤로 꺾으며 침대에 눕는 거로 보이지만
프로텍터가 꿈속 세상까지 막아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곧바로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으니까.

울퉁불퉁하게 깨진 더러운 시야가 한순간에 맑고 깨끗하게 변한다.
익숙한  풍경에 적응하기도 전에 와락 팔짱을 끼며 옆에 들러붙는 따듯하면서도 말캉한 감촉.

“성좌님!”


“그래, 할 말이 많아 보이는구나.”

부풀어 오른 호기심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이미 모든 것을 실토할 기세로 그녀가 달라 붙어온다.


뭔가 재밌는 이야기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편히 떠들고 싶은 건지.
산책하러 나가기 직전의 강아지처럼 흥분한 그녀가  새 없이 작은 입술을 움직인다.

기대오는 그녀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들은 이야기는 참으로 다양했다.
오늘 점심 이야기부터 근무 시간이 엇갈려 반년 만에 보는 선배 팀의 이야기까지.
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다고 뭐 그리  말이 많은지.

그 모습이 귀엽다고 느껴져 머리를 팍팍 쓰다듬으니 머리칼이 흐트러져도 별 상관없다는 것처럼 머리를  내민다.

“아, 그리고 밀수 관련된 이야기인데.”


“그래, 그게 좀 궁금했단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으니
점심시간부터 순차대로 흘러간 이야기가 드디어 궁금하던 부분에 도착했다.

“성좌가 직접 연관된  완벽히 확인한 건 아니고, 의심 중이라네요.  80% 정도 확신하는 것 같은데 성좌의 이름을 몰라서 명확히 말은 안 하던데요.”

“흐음, 어떤 성좌인지도 모르고 완벽한 증거도 없는데 성좌가 연관된 건 어떻게 알았다고 하니?”


“국가에 등록되지 않은 비공식 화신이 하나 붙잡혔는데, 화신이  지 2주일도 되지 않은 자질 없는 피라미가 공간계열 권능을 세 개 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수명과 건강을 깎아 먹는 형태지만 어찌어찌 권능 사용만 가능할 정도로 우겨 넣어서...”


“그 정도면 확실하겠구나.”

권능을 깨우치는 것은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불가능하다.

 눈이 마주치고 5분 이내에 몽마의 마력에 동화되어 버리는 김하은이 딱 권능을 깨우치지 않았나.

그 정도의 재능을 지닌 세기의 천재
그것도 어디에서나 사용할  있는 공간계열의 재능을 가진 놈을 시한부 인생으로 만들어서 소모할 리 있나.

놈이 아니라 년이려나?


“네, 체포된 하급 조직원들이 능력에 비교해 과한 권능을 하사받은 상태여서 성좌의 직접적인 개입을 의심한다고 해요. 다루는 물건도 좀 뒤죽박죽이라 노림수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고.”

회의 때 들은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말하던 한예지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온다.
등허리를 감싸고 슬금슬금 허벅지와 허리로 다가오는 손.


딱히 뿌리칠 이유도 없어 살짝 웃어 보이니
헤헤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린 그녀가 계속 말을 이어나가며 내 바지를 슬그머니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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