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5화 〉55화 : 발아 (55/169)



〈 55화 〉55화 : 발아

스스로를 ‘박동하는 사자심’의 화신이라 밝힌 체육관 관장은 말이 많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너지가 너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발걸음도 성큼성큼 내디디고, 악수도 팔을 붕붕 휘두르듯 하며 목청도 우렁차고  것 아닌 일에도 우하핫! 하고 크게 웃는다.

사자심이라 하니 머리에 떠오르는 역사적인 인물이 하나 있는데...

어째 우리 세상이랑 비슷한 세상에서 온 사람인 것 같아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짜고짜 성좌에게 연결해 달라 하기도 좀 그래서 일단 관장의 설명을 들었다.
멍하니  옆모습을 바라보며 정신줄을 놓은 김하은 대신 나라도 좀 들어 놔야지.


“이게 꽤 알려진 이야기인데 성좌님은 모르시는 눈치니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전에, 음료라도 한 잔 드시겠습니까? 건강 음료밖에 없지만요.”


“난 사과 당근 쥬스.”

냉수를 마시며 지친 몸을 노곤하게 의자에 기댄 김하은과
사과 당근 주스가 생각보다 달콤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린 내게 시선이 몰린다.
조금 전에 관장이 ‘성좌님이십니까?!’ 하고 우렁차게 외친 것이 사무실에 전부 들렸나 보다.

사무실 인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커다란 동작으로 관장이 설명을 시작한다.


“저희 성좌님, ‘박동하는 사자심’께서는 수호와 단련을 관장하시는 분입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화신은 전장으로 나서는 게 아니라, 내륙에서지내고 있죠.”


그 뒤로 이어진 설명은 참으로 길었다.
헬스클럽에 강림한 성좌를 구경하러 온 직원들이 질려서 도망칠 때까지 이어졌으니까.
아무튼,  건물 자체가 박동하는 사자심의 성역에 가깝다는 설명이 주된 이야기였다.

이 간단한 걸 거의 20분간 떠들다니.


“그래서 조건은 아까와 같습니다. 제 건물에서 각성했음을 인정하고 이름  자 적게 해주시면 50, 저한테 한 달 빡세게 트레이닝 받으시면 500. 이래 봬도 화신인데, 돈을 받으면서 PT 받을 기회는 거의 없을 겁니다. 아카데미 들어가기 전에 몸은 만들고 들어가야죠.”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쿵쿵 두드리는 모습이 여성보다는 호쾌한 야만 전사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니?”


“네, 네?”


아직도 정신을  차린 김하은에게 물어보자 어벙하게 대답을 한다.
모델이고 PT고 간에 본인이 원해야 하는 거라 물어봤는데, 어째 20분짜리 설명을 다시 듣게 생겼다.
딱히 유쾌한 시간은 아니고 당근 주스도 입에 안 맞아서 그대로 김하은에게 몸을 기댄다.


“왜, 좋지 않니. 아카데미에 들어가기까지 시간이 좀 있단다.”

대륙 중앙의 아카데미는 매달 1일 화신들을 받아들이지만, 딱히 계약하자마자 반드시 들어와야 한다는 강제성은 없다.
눈앞의 헬스 관장이나 농부, 예술가 같은 비전투직종은 아카데미에 안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하지만 오늘처럼 관절을 혹사하는 달리기만 하는 꼴을 보면 전문적으로 배우는 것이 좋아 보인다.
100층짜리 건물을 하사받은 화신이면 능력 하나는 인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PT를 받는 쪽으로...”

“좋은 선택입니다! 당장 오늘부터, 아니, 조금 전까지 꽤 운동했네요.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부터 나오시면 될 겁니다. 제가 전담을  테니까... 내일 오전 10부터 괜찮으신가요? 아니면 원하는 시간대라도? 아니다, 간단한 체력 테스트는 오늘 한번 해보죠.”

정신을 차린 김하은이 근육 떡대에게 휘감겨 사라진다.
성좌가, 미남이 되고 나서 이렇게 무시당하는 건 처음이라 신선하긴 하네.
같은 여성의 근육질 몸매가 부담스럽게 자신을 이끌자 김하은이 내게 구원을 바라는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주저 없이 분신을 흩어버렸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자신의 화신을  부탁한다고 전합니다]

“예압, 맡겨만 주십쇼!”


허공을 향해 호탕하게 웃은 관장이 그대로 김하은을 질질 끌고 간다.
그 모습이 마치 먹잇감을 제 보금자리로 물고 가는 고양잇과 맹수의 모습처럼 보인 것은 착각일까.

‘아직도 프로텍터네...’


성좌의 방으로 돌아와 슬그머니 화면을 축소해 보았지만
수도 말고 한예지의 동네는 여전히 고장 난 그래픽 카드로 플레이하는 3D게임 화면처럼 변해 있었다.


이러면 심심하니까 밤까지 김하은이 뭘 하는지나 볼까.





잘못된 렌즈를  것처럼, 세상이 보라색으로 일렁인다.
보라색으로 변한 머리카락과 눈 색 때문일까?

PT를 받기  몸을 잠시 식히라고 샤워실에 왔지만
거울 속의 새하얀 나신을 보면 몸을 씻는 것조차 어색하다.

‘화신 계약이 원래 이렇게 육체를 바꾸던가?’

성좌 중에서는 자신의 화신들을 같은 종족으로 바꿔버린다는 이야기도
도시 괴담마냥 들어본 적 있지만 이런 것과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북 대륙의 흡혈귀 성좌가 권속을 감염시킨다던가
 대륙의 화신들이 늑대 인간처럼 반인 반수가 되었다든가 하는 괴담들.


가슴이 커지고 허리가 잘록해지고 골반이 두툼해지며 피부 미백이 되는 변형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누가 봐도 순혈 동대륙 사람이었던 외모가 서대륙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외모로 변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거긴 한데...’

샤워를 끝마치고 근육질의 관장에게 이끌려 다른 층으로 이동했음에도 시야는 바뀌지 않는다.
연보랏빛 기류가 일렁거리는  피부가 근질근질한 느낌.
당연한 이야기지만 계약  보이는 거니까 이게 그 화신의 능력인 것 같았다.

“저기,  눈에 뭐가 자꾸 보이는데-”

“음, 아마 마력 같은 것이겠죠? 원래 감응력이 좋은 화신들은 대부분 기니 차크라니 마력이니 하는 것들이 눈에 보인다던데. 자, 이쪽으로 오셔서 여기 앉아보세요.”

하지만 호기심을 풀 새도 없이 근육 덩어리에게 이끌려 처음 보는 기구를 사용하게 되니
보라색 아지랑이고 뭐고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23년 만에 처음 알게  내 근육을 구석구석 찢어발기고 있었으니까.

“하나 더. 좋다, 회원님 좋다.육체가 바뀐 게 도움이 되는 건가? 하나만 더, 그렇지 그렇게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 씨발, 가볍게 테스트만 한다며-’


러닝머신을 죽자고 뛴 기록을 확인했는지 처음에는 이상한 의자에 앉아 팔을 오므리는 운동이었다.
그러더니 다리에 뭘 걸고, 발차기를 하다가, 어깨 근육을 본다며 뭐를 하다가-


이름도 모르는 운동기구들이 마치 고문 기구처럼 느껴진다.
심지어 관장이 하나만 더 하라면 정말 하나를 더 할  있는 육체 때문에 이 기나긴 고문이 끝나지도 않는 상황.
생소한 운동을 하니 등허리의 있는지도 몰랐던 근육까지 욱신거리기 시작한다.


“좀만 더, 그렇죠, 중량 10kg만 추가해서 딱 하나만 더!”


“끄, 흐아압!”


그렇다고 해서 불쾌하냐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니다.
이 보라색 아지랑이가 간질거리기만 하면 육체에 활력이 도니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근육의 고통으로 돌아오는 데 1분이 걸리지 않아서 문제지.

‘조, 조금 더 할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여자가 자존심이 있지, 더는 못하겠다고 징징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젖탱이 달고 태어나서 화신이  날, 고작 헬스클럽에서 못하겠다고 도련님처럼 징징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심지어 메시지를 날려주신 걸 보면 성좌님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세 번째 화신이랬으니까... 33% 확률로 보고 계신 거 아닌가?’

오기가 생겨 이를 악문다.
어금니에서 뿌득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뭐 화신이 되었는데  정도는 어떻게든 되겠지.
고작 추 하나 늘렸다고 버티질 못하는 팔이 후들후들 떨린다.
동시에 피가 쏠렸는지 귓가가 멍하고 시야가 흐릿해진다.

이거,  당기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못하지?
뭐가 잘못된 거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점점 강제로 올라간다.
고작 손잡이 하나 내려 당기는 게 왜 안 되는 걸까.
멍한 머리에 불합리한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보라색 기류, 마력이라며-


어째서인지 허공을 휘감는 아지랑이가 진하게 느껴진다.
팔을 당긴다, 마력을 당긴다, 팔을 당긴다, 마력을 당긴다.
피가 쏠려 어질어질한 시야 너머로, 그 정도만 하셔도 된다고 외치는 관장이 보인다.

보라색 마력은, 그녀에게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남의 마력을 빨아 먹는 건가? 몽마라서?’

결국,힘을 잃은 팔이 쭉 딸려 올라간다.
봉을 손에서 놓지 않아 만세 자세가 되어 겨드랑이가 땅기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 보라색 아지랑이를 잡아당길 수 있을  같아서.

“그만, 손 놓으셔도 됩니다.”

보라색 아지랑이가 피부를 간질이다 얼굴을 감싼다.
스읍, 하고 가습기 안개를 들이마시는 것 같은 기분.
봉을 잡느라 새하얗게 핏기가 가신 손이 보인다.

이거 이렇게 잡으면  되는데.


머리 한 구석에서, 자그마한 영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람 몸통만 한 거대한 추를 달고, 랫  다운이라는 기구에 앉아 완벽에 가까운 모습으로 운동을 하는 관장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 보라색 기류가 온몸을 감싼다.
얼굴만이 아니라 손끝부터 발끝까지 마치 피부처럼 온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지고 축 늘어졌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아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볍게 팔을 당겼다.


매끄럽게 내려오는 

놀란 표정의 관장


시야를 가리는 메시지.







[화신 김하은이 첫 번째 권능을 깨우칩니다]
[권능 개화 : 희망 찬탈자]

“...뭐요?”

계약한  1시간 하고 대충 15분쯤.

해가 지기도 전에 세 번째 화신이 ‘권능’을 깨우쳤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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