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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화 〉54화 : 재능 (54/169)



〈 54화 〉54화 : 재능

육상 경주에 대해 모르는 어린 아이가 8초에 100m를 뛰는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겠는가?


사람은 알아야 놀랄 수 있고, 모르면 놀라지도 못한다.
어떤 뛰어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하니까.
그러한 점에서 눈앞의 여인은 나를 놀라다 못해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 수준이었다.


“네, 손을, 보렴. 목이 마르지 않니? 시원한 음료... 그래, 운동했으니 이온 음료가 좋겠구나.”


정신도 못 차리고 멍하니 헤매는 시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과 발가락, 괜스레 올렸다 내리는 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나의 자각몽 속에서 자기 마음대로 무언가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게 말이 되나?’

자각몽에도 레벨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하린과 한예지의 자각몽을 다룰 수 있지만,
이하린과 한예지는 내 자각몽 속으로 못 들어오지.

자각몽 권능을 하사한 뒤, 내가 직접 그녀들의 꿈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성좌가 화신의 꿈에 간섭할 수는 있어도, 화신이 성좌의 꿈에 간섭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눈앞의 화신은 제멋대로 손에 음료수를 소환해낸다.

“그래, 그 음료  맛이 있더구나. 배가 고프지는 않니?”


레몬 향 포카리라 해야 할까, 동대륙에서 이온 음료 하면 바로 튀어나오는 유명 음료수.
차가운 이슬 맺힌 페트병이 손아귀에 쥐어지자 그녀가 그걸 멍하니 바라본다.
자기가 소환했다는 것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도록 귓가에 속삭인다.

“조명이 어둡게 느껴지지는 않니?”


천장의 둥그런 형광등이 순식간에 네모 모양의 거대한 조명으로 바뀌며 새하얗게 빛난다.
흰색과 검은색의 모던풍 천장과 벽지 또한 하늘색 벽지에 백색 천장으로 바뀌며 가정집처럼 변한다.

“소파의 색은 마음에 드니?  가죽 소파보다는  소파가 좋구나.”

검은 가죽 소파가 어느새 베이지색  소파로 변해 엉덩이가  들어간다.
테이블도 TV도 마룻바닥도 말을 걸 때마다 휙휙 바뀐다.


아마 그녀에게 익숙한 모습이겠지.
어느새 고급스럽지만 딱딱해 보이는 펜트하우스는 포근한 가정집으로 변해 있었다.


“그래서, 나와 계약하겠니?”

계약이라는 단어에 드디어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바라본다.
 다듬은 자수정 같은 보라색 눈동자가 드디어 또렷하게 초점을 맞추고 나를 향한다.
바들바들 떨리더니 살며시 열리는 그 자그마한 붉은 입술.


“계약... 내가, 화신이?”

그와 동시에 세상이 다시 한번 뒤집히고 섞인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그녀의 정신상태가 일부분이지만 나의 꿈을 잠식하는 것이다.


1년 내리 두 화신의 꿈속에서 자각몽 다루는 연습을 하고, 불사르는 폭군에게 지식도 전승받았는데.
꿈속 세상에 들어온 지 1시간도 되지 않은 인간에게 꿈을 뺏기고 있었다.


‘진짜 잭팟 터졌네.’


내가 화신이었다면 인생 때려치우고 다른 직장을 알아보러 떠날지도 모르는 광경이지만, 나는 성좌.
 화신이 이렇게 재능이 넘치면 나야 좋지.


강력한 몽마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으니, 얘를 교과서 삼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화신.”


이제 가정집은 온데간데없고 황량한 황무지가 보인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풍경이다 싶었더니 머리 위로 익숙한 전함이 날아다니며 폭격을 시작한다.


불사르는 폭군의 정예병들.

지평선 끝에서 무수히 많은 괴물이 접근하지만
꿈속답게 과장된 전함은 기괴할 정도로 굵은 레이저 빔과 폭격으로 괴물들을 가볍게 지워버린다.
그런 살벌하고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전장을 배경으로 그녀에게서 커다란 감정이 흘러들어온다.

그녀는,화신이 되고 싶어 한다.


정확히는 불사르는 폭군의 군세처럼 괴수를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화신이.
본인의 무력이던, 정치적 세력이던, 군세를 불려 나가던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그저 자신이 직, 간접적으로 괴물들을 쓸어버리길 강렬히 소망하고 있었다.


“그래, 그러면...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구나.”


헤벌쭉한 표정이 꿈속에서 괴물 죽이기에 푹 취한 모양새라
더 있다가는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아 자각몽에서 그녀를 끄집어냈다.


아무리 일부분을 잠식당했다 해도 결국 내 꿈이니까.
짜악- 길게 울려 퍼진  박수 소리는 전장의 소음을 뚫고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아직 이름도 모르네.


헬스장 구석에 멍하니 앉아 있는 이름도 모르는 화신(진)을 보고, 곧바로 분신을 사라지게 만들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일단 저 컴퓨터의 상점 기능을 사용해야 계약서도 구매하고 그녀의 기초적인 신상명세도 확인할 수 있으니까.

이름, 김하은.
나이 23세 여성.

[성좌, 무기력한 악몽이 당신에게 계약서를 제시합니다]


“어, 어어?”

아직도 자각몽에 취해 있었는지,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린 그녀가 허공을 툭 누른다.
거절할 리 없으니 당연히 Y 버튼이겠지.

손가락이 허공을 꾸욱 누르며 살며시 꺾이자, 재차 메시지가 떠오른다.


[성좌, 무기력한 악몽과 화신, 김하은의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건물 내부에서 시끄러운 방송이 울려 퍼진다.

-안내 방송 드립니다. 현재 32층 기초 단련 센터에서 새로운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 새롭게 화신이 되신 고객님께서는 계약 이행을 원하신다면 10층 사무실로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 다시 한번 안내 방송 드립니다, 현재 32층 기초 단련 센터에서 새로운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새롭게 화신이 되신 고객님께서는 계약 이행을 원하신다면 10층 사무실로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체육 센터의 모든 층을 아우르는 커다란 안내 방송이 운동할 때 들으라고 틀어둔 노랫소리조차 잡아먹고 울렸다.
그 커다란 방송을 들은 100층 건물의 사람들은 마치 걷어차인 벌집의 벌떼처럼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와, 진짜 계약을 하네, 부럽다.”


“인생 핀 거지 뭐. 확실히 사람이 모여 있어야 성좌님들이 보신다니까.”

“뭔 백 층짜리냐고 생각했는데 성능 확실하네.”


“일단 눈에 띄어야 성좌님들도 보실 거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건물 외관도 삐까뻔쩍하게 바꿨으면 좋겠는데.”

“너무 기괴하면 성좌님들이 기분 나빠서  보는 거 아니야?”


군사 학교나 체육 대학, 검술 지도장 같은 곳에서 재능 넘치는 사람을 화신으로 데려가니까
대놓고 그런 점을 노린 초거대 체육 센터였나.

어째 상술에 당한 기분이었지만 당첨을 뽑았으니  말이 없었다.

왜, 뻔히 보이는 10+1회 가챠 같은 것도 가격표를 보면  씨발 소리가 나오지만
일단 거기서 뭘 뽑으면 혜자 소리가 나오는 것과 같다.

뻔히 보이는 수법에 당했는데, 일단 화신 하나 제대로 주웠으니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며 구경을 하고 있으니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하은이 엘리베이터를 향해 터덜터덜 향한다.
동시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다.

다들 빡세게 운동 루틴을 조지고 있는데 방송이 끝나자마자 혼자 엘리베이터로 향하니까.

“저 사람인가?”


“몰라, 아무튼 부럽다.”


어깨 근육 하나는 나와 비견될  같은 여자 하나가 작게 중얼거리자
허벅지가 나랑 비슷할 정도로 두꺼운 여자가 하체를 조지며 대답하는 광경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향한다.
 안에서 어색하게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김하은.

“내가, 내가 화신?”

[무기력한 악몽이 세 번째 화신이라고 알려줍니다]

“서, 성좌님?!”

화들짝 놀라 엘리베이터 천장을 올려다보는 모습이 다른 두 사람이랑 똑 닮았다.
성좌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걸 알아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주변을 두리번대는 게 아니라 바로 천장을 바라보네.

김하은이 놀라든 말든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10층으로 향했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운동기구가 아닌 무수히 많은 책상.
100층짜리 건물의 사무실답게, 어지간한 회사 사무실 크기에 비견될 정도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김하은에게 사무실 안에서 나온 남성이 미소를 지으며 응대한다.

“어서오십쇼,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 저기... 화신 계약을 해서.”

“아, 방금 계약하신 분, 관장님!”

그런데 계약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리 실시간으로알 수 있었던 거지.
헬스장 관장도 화신인 걸까? 사무실 안에서 걸어 나오는 거대한 인간을 구경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사무실 안에서나온 것은 키가 190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여성.

긴 머리카락은 여성의 머리보다는 사자 갈기처럼 풍성하게 흐트러져 있고,
 벌어진 어깨부터 반바지 아래 드러난 종아리는 보자마자 아마조네스라는 단어가 떠오를 수준.
여성임을 안 이유는 그 와중에 약물로 펌핑한 것은 아닌지 가슴과 골반의 여성성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우, 우리 고객님! 계약이라니 환영합니다!”

덩치만큼 커다란 목소리가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리자 그 성량과 덩치에 압도당한 김하은이 소심하게 손을 내민다.
훙훙 바람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악수를 하고 그대로 가까운 테이블로 향해
팔랑이는 서류를 들이미는 모습이 덩치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

“일단, 전액 환불받을 계좌 적으시고. 여기 좀 읽어 보실래요? 이름만 걸면 50, 사진 찍으면 100, 나한테 PT 받아서 비포 애프터 사진 박아두면 500. 어때요?”

우다다다 쏟아지는 말에 정신을  차리는 김하은을 보며 나 또한 호기심이 생겨 다시 한번 분신을 만들었다.
나의 분신이 옆에 자리한 것도 눈치 채지 못한 그녀가 열성적으로 말을 우다다닷 쏟아 붓는다.

“이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에요. 우리야 화신을 광고탑으로 써먹는데 고작 500 준다 하면 양심이 좀 아프긴 한데, 우리 센터가 있었으니까 성좌님을 만났다, 좋은 인연 만들었다 생각하고, 오?”

말, 진짜 많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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