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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화 〉53화 : 본능 (53/169)



〈 53화 〉53화 : 본능

때로는 본능이 무언가를 일깨워줄 때가 있다.
어쩌면 불사르는 폭군이 주고 간 작은 지식일지도 모르지.
분신을 만들어 운동기구에서 쉬고 있는 여성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그것을 깨달았다.


‘으, 달아...’

그녀에게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땀에 젖은 여인의 향기니, 페로몬이니, 당신에게서는 꽃냄새가 나요~ 이딴 내용이 아니었다.


코가 아리고 눈이 따끔거릴 정도의 단 냄새.
은은하게 느껴지는 꽃향기, 배고픔을 유발하는 달콤한  냄새 수준이 아니다.
어디서 향수 원료라도 잘못 부어버린 것처럼 눈과 코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렬히 느껴지는 기운.


“...남성 전용층은 따로 있어요.”

종아리를 주무르던 그녀가 내게 말했다.
내가 나타난 것은 보지 못해서 그저 말을 걸려고 다가온 줄 알았나 보다.
무뚝뚝하게 말하며 다리를 주무르고 스트레칭을 하는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강렬한 향이 풍겨온다.

새카만 향, 달콤한 색.
시각과 후각과 미각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것 같은 기묘한 감각.
인간이라면 느낄 수 없고 몽마로서 느껴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그 미묘한 감각.
아니, 이걸 미묘하다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너무 강렬했으니까.


“저기, 왜 그렇게 달려요?”

이 달콤한 향은 분명 악몽의 향기일 것이다.

새끼 오리가 연못에 가면 알아서 물장구를 치듯, 그녀를 마주한 나는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다.
그녀는 몽마인 내게 가장 적합한 화신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재능을 지닌 여성이 아직 다른 몽마들과 계약을 하지 않은 걸까?


많다고 할 수 없지만, 성좌 중 몽마 계열이 어림잡아  명은 넘는 거로 아는데.


“그러니까, 남성 전용은, 하아...”

눈이 마주친다.

“나는, 운동을, 운동이라도 해야 해.”


새카만 눈동자가 보라색으로 변한다.

아니, 눈동자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점차 물들어가고, 땀에 젖은 피부도 점차 하얗게 변하는 것이 보인다.
짜증을 내던 목소리가 무기력하게 낮아지고, 잠에 취한 것처럼 웅얼거리기 시작한다.


‘뭐지?’


머릿속의 지식을 최대한 뒤져본다.
불사르는 폭군이 알려준 몽마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들.
꽤 기초적인 내용인지라 떠올리는데 별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와, 대단하네...”

“지난달, 대규모 공습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어. 나는 딱히 화신을 꿈꾸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을 따라서 군인이 되고 싶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공부나 하고 싶지는 않아.”

그녀는 나의 분신과 마주 보고  것만으로도 몽마의 마력에 취했다.
내가 그녀에게 마법을 쓴 것도 아니고, 꿈과 꿈을 연결한 것도 아니며, 화신과 성좌의 계약을 맺지도 않았다.
단지 마주 보고 바라본 것만으로도 그녀는 몽마를 ‘이해’하고 나의 꿈에 반쯤 취해버린 것이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천재들이 타인의 검술을 한 번 보고 베끼거나,
명상 한 번 했다고 서클 하나 뚝딱 만드는 것처럼.


그녀는 나의 분신을 보고 몽마의 기초적인 기술을 무의식의 영역에서 전부 깨달았다.


‘이건 인간의 재능이 아닌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런 기괴한 재능이 인간에게 있을 리 없다.
불사르는 폭군의 미래 제국에서도 시험관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슈퍼 베이비들이나 가질 법한 능력이니까.

어쩌면 그녀도 전생에 몽마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할 줄 아는 운동이 없어. 어머니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라고 하셨지만, 딱히 장래 희망이 있던 것도 아니니까. 그래서 평범하게 공부를 하고 대학을 다녔으니까... 달리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

“그래, 알겠으니까-”

“하지만 달리기만으로 화신이 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자니 가슴이 답답해. 사실 화신이 되고 싶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어... 그냥 몸을 혹사하면 다른 생각을 안 해도 되니까 이러고 있을 뿐이지.”

잠에 취한 듯, 술에 취한 듯
고개를 바닥을 향해 처박은 그녀가 계속 중얼거린다.

“이건 좀 골 때리네... 저기, 저기요?”


눈앞에서 손바닥을 휙휙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리카락을 툭툭 잡아 당겨보거나, 뺨을 탁탁 두드려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체육복 아래에서 자기 주장을 열심히 하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쥐어도 마찬가지다.

제정신으로 돌아와야 화신 계약을 할 수 있지 않나?

일단 돌아갔다가 제정신이 되면 메시지를 보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분신을 다시 흩어버리는 순간, 세상이 빙글 돌았다.


꽤 익숙한 감각, 그러니까 자각몽으로 들어가는 감각이다.
빙글 돌던 시야가 눈 두어  깜빡이니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어두컴컴한 지하 터널, 반쯤 부서져서 깜빡거리는 조명, 지하 특유의 퀴퀴하고 습한 냄새.

당연하지만, 나의 꿈속이었다.
1년 만에 보는 광경이지만 꼴도 보기 싫어서 곧바로 꿈을 휘젓는다.
낡은 콘크리트의 지하터널이 순식간에 고풍스러운 펜트하우스로 변한다.
낡고 습한 냄새도 청량한 공기로 바꾸고 부서지고 깨진 통로 대신 값비싼 명품 가구들이 자리를 잡는다.

그 가운데 앉아서 멍하니 졸고 있는, 아직 이름도 모르는 여성.

‘그냥 마력에 취해 졸고 있을 때 날치기 계약해버릴까?’


몽마는커녕 꿈의 마력도 다루지 못하는 민간인이 분신을 해제할  접촉한 소량의 마력을 타고 내 꿈속까지 들어온 것이다.
대체 무의식적으로 어디까지 하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렸을 때 읽었던 소설 속에서는 먼치킨 주인공이 대단한 일을 하면
주변에서 우효오옷, 대단해! 같은 반응을 보이던데,  구라였다.


실제로 보니까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오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의 육체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여, 여기는...”

체육복이 낑길 정도로 가슴이 커지고, 적당히 황갈색이던 피부는 나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밋밋하던 골반과 허리도 잘록하게 변한 것이, 전체적으로 서양의 포르노스타처럼 변했네.
머리카락이 연보라색이라  그렇게 느껴진다.


당황해서 자신의 손과 몸을 내려다보고머리카락을 손으로 잡아 확인하는 모습에 나는 마음을 먹었다.

“어서 오렴, 나의 화신아.”

날치기 계약, 하자.






머리가 멍하다.


심장이 터질  같다고 느낀 적은 있지만, 정말 터졌나? 싶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하고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시야에 들어오는 새하얗고 길쭉길쭉한 팔다리만 봐도 그렇다.

동대륙인이 아니라 북서 혼혈이라도 된 것처럼 새하얀 피부.
발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가슴,
옆으로 삐딱하게 앉으려니 묘하게 불편할 정도로 커진 엉덩이까지.

다행인 점은 서대륙의 몇몇 여자들처럼 골반이 과도하게 넓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근육은 없지만 딱 남자들이 좋아할 정도의 아이돌 같은 아름다운 몸.

당연하지만, 23년 평생 운동은 수험생 건강 관리용 아침 조깅만 했던  몸과 천치만별이다.


“어서 오렴, 나의 화신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처럼 재능 있는 아이가 나를 찾아주다니, 정말 기쁘구나.”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남성.

체육 센터에서 스쳐 지나간 미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몇몇 화신과 성좌들은 감히 사진으로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더니, 그게 맞나보다.
눈앞의 남성이 성좌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니까.

“너는 스스로가 재능이 없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니란다.”

“네에...”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남성이 속삭인다.
목소리만큼 달콤한 내용.

하지만 너무 달콤하니 의심도 자꾸 솟아난다.
눈앞의 남성에 대한 불신감, 의심이 아니다.


‘내가, 화신이 될 정도로 재능이 있다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가슴 한구석을 좀 먹는다.

공부만 진득하게 해서 명문 고등학교에 갔지만 거기서 내신을 1등급 달성한 것은 아니다.
이름 꽤 있는 동대륙 수도권 명문대에 들어갔지만, 학점을 A+로 도배해 장학금을 받은 것도 아니다.

노력은 하지만 최고는 되지 않은, 딱 그 수준.
상위 1%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대답하지만
네가 최고냐고 물어보면 감히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운 위치.

“왜 그렇게 기운이 없니? 네 재능을 발견한 기분 좋은 날에.”

“저의, 재능이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애매하게 살아왔으며
남들보다 특출나게 뛰어난 점이 있다고 자부할 수도 없는 인생.
그런데도 눈앞의 남성은 내게 너무나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그래, 네 재능.”


어느새 귓가에서 속살이는 목소리에 등허리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귓가가 간지럽다 싶더니 목덜미를 타고 짜르르 흐르는 이름 모를 감각이 손끝과 발끝으로 퍼져나가는  같다.

“네, 손을, 보렴. 목이 마르지 않니? 시원한 음료... 그래, 운동했으니 이온 음료가 좋겠구나.”

그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목이 타는 듯이 말라온다.
고급스러운 호텔처럼 보이는 방 안을 둘러보기도 전에, 손바닥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진다.
손안에 쥐고 있던 것은 차갑게 식혀진 이온 음료 페트병.

“그래, 그 음료 꽤 맛이 있더구나. 배가 고프지는 않니?”


“조명이 어둡게 느껴지지는 않니?”

“소파의 색은 마음에 드니? 난 가죽 소파보다는 천 소파가 좋구나.”

눈앞의 남자가 속삭일 때마다 세상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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