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2화 〉52화 : 세 번째 (52/169)



〈 52화 〉52화 : 세 번째

고작 화면 하나 가려졌다고 너무 심심하다.


나는 성좌와 화신의 관계를 일종의 클리커 게임, 방치형 게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내가 선택한 캐릭터(화신)가 이벤트를 겪을 때마다 내게 포인트가 들어와서
 포인트로 나와 내 캐릭터(화신)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하는 식으로.


솔직히 말해서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화신이 되어 내게 헌신하는 이하린, 한예지를 데이터 쪼가리처럼 생각한다는 게 아니다.

나는 이 세상을 전생에 하던 방치형 게임처럼 공략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XX 키우기 같은 게임을 하면 방치형 게임이고 뭐고 화면을 손가락에 쥐가 날 때까지 두드려서 효율을 뽑아내듯
그냥 놔둬도 되는 화신들의 꿈에 들어가 케어해주고 돌봐주는 것도 그런 느낌이었다.


솔직히 평범하게 군필, 대학 졸업 준비하다 아포칼립스를 겪은 소시민에게
초능력자와 마법사를 육성하라 하면 근간이 있겠는가.
소설 아니면 게임에서 본 것밖에 없지.

‘존나 심심하네.’

 때문에 지금처럼 화면이 막혀버린 지금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중요한 일 때문에 보안상의 문제로 성좌 프로텍터를 켰다고 머리는 이해하지만
가슴 속에서는  즐기던 모바일 게임 화면이 버그로 깨진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괜스레 침대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서 냉장고의 캔 음료를 마시다가,
화면 앞에 앉았다가 방을 서성인다.


먹고 살만해지니까 슬슬 전생의 습관이 나타나는  같다.
전생에서도 할 것 없이 쉬고 있을 때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침대에 드러누워 폰을 만지다,
TV 잠깐 보는 식으로 되게 정신없이 돌아다녔는데.

심심하니 시들지 않는 거목의 쪽지라도 왔으면 좋겠는데 얼굴 한 번 마주 보고 나서는 연락이  없다.
그쪽에서 뭔가 해야지 대화를  수 있는지 나뭇가지에 꾸역꾸역 종이쪽지를 끼워 넣어도 사라지지 않고.

그래서, 아예 프로텍트가 걸리지 않은 다른 도시로 시선을 돌렸다.

 번째 계약자를 찾기 위해서.

한예지는 슬슬 초보 티를 벗고 자기 지역 중견 화신에 들어갈 정도로 탄탄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이하린은 오늘도 열심히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재능이 한쪽으로 쏠리는 극단(極端) 때문인지 집착하다시피 제사 관련된 수련을 하는 중.

 와중에도 성좌 덕질은 손에서 놓을 수 없는지
웹에 나와 관련된 문서가 정리되어 올라오는 일도 있었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욕을 써 둔 것도 아니고 잘생겼다, 먹을 걸  챙겨준다, 자상하다, 단 걸 좋아한다 이런 것만 쓰여 있었으니까.


내가 고깃집에서 후식으로 멜론 사탕 대신 레몬 사탕 고른 행동을 왜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있는지는 조금 의아하지만
이쪽 세계 문화가 그렇다면 내가 맞춰야지.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는 법이니까.

수도를 비추는 화면을 돌리며 이런저런 잡생각을 했다.
화신 두 명은 너무 적었다. 두 명을 돌본다는 생각으로 화신의 수를 적게 잡을 생각이 틀렸다.
화신들이 내가 건드리지 않으면 멈추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니까.

두 명 모두 자기 일이 생기면 내가  게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이다.
하긴 회사 사장이 직원 백 명을 뽑았다고 백 명 모두의 업무를 같이 확인하지는 않지.

“뭔가 크네...”


짭조름한 감자 과자에 달콤한 탄산음료를 준비한 상태로 수도를 둘러본다.
역시 수도답게 건물들이 좀 더 높은 것 같고 검은 안개도 군데군데 잔뜩 끼어 있었다.
도시화 현상이라 하던가, 아무튼 이쪽 세상도 수도 집값이  높고 건물도 높고 사람도 많은  똑같았다.

“저건 또 처음 보는 음식인데.”

계약자를 하나 늘려보겠다는 핑계로 수도 구경을 시작했지만, 딱히 간절하지는 않아서였을까.
어느새 나는 도시의 골목골목을 구경하며 맛집을 찾기 시작했다.
분신으로 강림하면 돈이 없어서 지금 당장 먹지는 못하지만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음식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여행지에서 밥 먹을 계획을 짜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의 전통 음식  가지도 생소한데, 거기서 다른 대륙 음식이랑 퓨전까지  놨으니 보는 재미도 있었고.

그렇게 골목을 둘러보며 옆으로 옆으로 화면을 옮기다 커다란 빌딩에 화면이 가려졌다.
동대륙 풍이니 서 대륙풍이니 할  없이 그냥 네모반듯한 거대 빌딩.


얼마나 높은지 골목길을 둘러보던 배율로 화면을 움직이면 그 커다란 스크린이 가득 차서 다른 게 보이지도 않는다.


‘한 100층 되려나?’


높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검은 안개가 없어 슬그머니 화면을 움직인다. 꼭대기가 85층, 지하로 15층.
위아래  합쳐서 100층짜리 거대한 건물.

그 안에는 층만큼 무수히 많은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허리 똑바로 들엇!”

“하나 더, 하나만 더, 그렇지 한 번 더!”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뻘뻘 흘리는 중이다.





근육녀들의 향연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전생에서라면 상상도 못 했을 풍경.

‘이 큰 건물이 헬스장이라고?’

정확히는 총 100층짜리 종합 체육 센터였다.

“그렇지 회원님, 하나 더 올리고, 팔 뻗는 거 보니까 하나 더 올릴 수 있겠다.”


“허벅지 모으시고, 어, 발목 돌아가면 큰일 납니다.”


“손가락 똑바로 잡으시고, 엄지 조금 더 밀어서 잡으세요.”


단순 맨몸 운동부터 목검을 든 검술 수련, 플라스틱 활을 쏘는 궁술까지.
심지어 엄중히 보안이 유지되는 지하는 실탄 사격장이었다.
중간중간 목욕 시설, 마사지, 사우나, 식당 등 휴게시설이 있었지만 나머지 층은 전부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상황.


이유는 당연히, 화신이 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결국 회원제로 운영되는 헬스장, 아니 헬스 빌딩.
사무실에 들어가 상담을 받거나 결제를 하는 회원들의 모습과 트레이너들의 조언을 듣다 보니 알  있었다.

육체적 능력을 키우고 체육계열로 진로를 잡는 사람들.
중간에 성좌의 눈에 들어서 화신이 되면 대박이고
안 되면 군인이 되어 군사 학교에서 2차 기회를 노려보는 거다.

포기하면 체대 같은 곳으로 가겠지.

그 때문에 거대한 건물에는 성비가 8:2 정도로 여자가 득실득실한 상태.
계약자를 찾아보기에 좋은 조건이다.

군사대학이 대륙 밖 전쟁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이 모였다면 여기는 대놓고 화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노량진 고시촌을 위아래로 높게 쌓아둔 모양새다.


화신이 되면 전생의 9급 공무원과는 비교할 수 없이 인생이 피는 거니까 사람이 더 많고
사람이 많으니 미녀도 많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수 없는 약쟁이 몸매도 있지만 여자 대부분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팔 운동을 할 때마다 헐렁한 겨드랑이 부분으로  가슴이 슬금슬금 보이는  박스 나시부터,
몸에 착 달라붙는 에어로빅 복장, 전 세계의 남자들이 반바지 입듯 여자들 대부분이 입고 돌아다니는 레깅스까지.
어디를 둘러봐도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들이 자기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아서 더욱더.


남녀 역전 세상이니 음흉한 성적 시선을 보내는 것은 여성이오, 당하는 것이 남성이다.
그런 세상에서 여자들만 잔뜩 모여 있는데 옆 가슴을 가리네, 가슴골을 숨기네 하며 부산스레 움직이겠는가.

그렇게 층층별로 구경을 하던 와중에 시선을 끄는  사람이 있었다.

옷차림은 평범했다.
남자가 입어도 별 상관없을 것 같은 체육복 바지와 반팔티를 입은 여자.
검은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깔끔하게 묶은 여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러닝머신 위에서 계속해서 달린다.

몸매가 어마어마한 것도 아니고, 노출이 심한 것도 아니다.
얼굴도 꽤 예쁜 편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이하린이나 한예지랑 비슷한 수준이다.
광고판에서 보이는 연예인이나 유명 화신보다는  예쁘다는 소리.

그런데도 멍하니 그녀가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슬그머니 화면을 당겨 자세히 보았다.
러닝머신의 속도는 9, 달린 거리는 이미 60km를 넘겼다.
무슨 마라톤이라도 준비하는 건가 싶은 수준.

저렇게 달리기만 하면 오히려 관절에 나쁘지 않나? 같은 작은 의문을 품었지만 얼굴을 보니 사소한 생각이 사라졌다.

울  같이 필사적인 얼굴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달리고 있었으니까.


호흡은 흐트러졌고, 자세도 조금씩 휘청인다.
자세히 보면  디디는 것도 규칙적이지 않으며 꺽꺽거리는 모습은
자빠져서 뒤로 구르든지 넘어져서 속을 게워내든지 할 것 같았다.
힘들어 보이네, 수준이 아니라 저러다 죽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준으로.


사용하는 기구가 구석진 곳에 있는 러닝머신이라 트레이너도 근처에 없어서 그런지 자학에 가까운 달리기는 끝나질 않는다.

그러다 결국 체력의 한계가 왔는지, STOP 버튼을 누르고 러닝머신 팔걸이에 빨래처럼 걸린 여자가 숨을 몰아쉰다.
마치 물에 빠졌다 건져진 사람처럼 캑캑거리며 숨을 몰아쉬더니
호흡이 조금 정돈되자마자 바로 러닝머신 위에 올라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이번에는 3 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달리며 몸을 풀긴 하는데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때문에 이렇게 죽일 듯 러닝머신에 집착하는 걸까.
계속 달릴 생각은 없었는지, 아니면 체력이 없는건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러닝머신에서 다시 내려온 그녀의 옆에 분신을 내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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